독서 자료

인생을 깊게 고민한 톨스토이

[중산] 2024. 11. 28. 10:39

 

담양 메타세콰이어길

 

 

옷이 추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듯,

인내는 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한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탈리아의 미술가, 과학자, 사상가

 

 

 

원자력은 얼마나 치명적일까?

 

우리는 석탄과 천연가스를 비롯한 화석연료에 비해 원자력 에너지의 인명 피해가 비현실적으로 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소개할 데이터는 옥스퍼드대학교<글로벌 체인지>데이터 연구소의 공동프로젝트인 <데이터로 보는 세계>에서 수집한 것이다.

 

가장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는 무엇일까? ( / )괄호 안은, 사고와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망률/온실가스방출량)이다. 

 

태양광(0.02명/5톤)>원자력(0.03명/3톤)>풍력(0.04명/4톤)>수력발전(0.04명/34톤)>바이오매스(4.6명/78~230톤)>천연가스(2.8명/490톤)>기름(18.4명/720톤)>석탄(24.8명/820톤)

 

이 자료는 과학적 연구를 사용하여 테라와트-시(terawatt-hour)당 사망자 수를 바탕으로 대기오염과 사고로 인한 에너지별 사망자를 분석한다.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 원자력은 수력, 풍력, 태양광과 같은 재생에너지와 동등한 수준으로 놀랍도록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다.

 

풍력이나 태양광의 재생에너지는 바람이 불지 않거나 태양이 구름을 가릴 때도 있어 전력 공급이 일정하지 않지만, 원자력은 지속적으로 전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나쁜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은 아니다. 체르노빌과 같은 사고는 원자력 재해의 심각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불안은 마음에 원자력을 피하고 유해한 화석연료에 주로 의존하면 득보다 실이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력에 대한 반대의 대부분은 환경 운동가들로부터 나온다! 환경단체인 <그린 아메리카>는 이렇게 말한다. “화석연료에서 똑 같이 위험한 에너지원인 원자력 에너지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이다.”

 

원자력에 대한 염려는 핵폐기물, 원자력이 무기로 사용되거나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될 가능성, 가난한 국가는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어렵다는 점 등이다.

 

이런 염려 중 몇 가지는 합리적이지만, 그렇다고 원자력을 금지하기보다는 위험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 사고, 암 발생 위험, 온실 가스 배출에 대한 우려는 원자력이 안전하고 깨끗하다는 과학적 데이터에 의해 이미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후변화 문제에 원자력을 적용한다고 해서 재생에너지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은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인지 오류다. 원자력을 수용하면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없다는 증거는 없다. 실제로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는 경쟁관계가 아니다. 경쟁 대상은 화석연료이며, 여러 대안이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요소다.

 

고귀한 명분(재생에너지 사용의 확대)에 매달리다 보면 고집에 빠지기 쉽고, 이 목표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사회에서 제거해야 하는 제로섬게임의 대상으로 간주하기 쉽다.

 

하지만 균형적으로 볼 때 원자력이 화석연료보다 안전하고 깨끗하며, 적어도 현재로서는 재생에너지보다 잠재적으로 더 쉽게 구현할 수 있다면, 왜 그렇게 많은 반대가 있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위험을 잘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초기에 심리학자들이 ‘사람들이 질병의 위험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주장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우리가 많은 것을 걱정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진화했기 때문이다. 왜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 괴물이 숨어 있다고 생각할까? 옛날에 그랬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험을 [잘못] 평가하는 방법

 

동물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모든 뱀은 아니지만 많은 뱀이 독을 가지고 있으므로, 뱀을 잡거나 다루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정상이다.

 

미국에서 독이 있는 동물에 물려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매년 약 157명이 동물에 의해 죽는다고 한다.

 

가장 큰 가해자는 말벌, 기타 특정 동물(곰, 표범, 악어 등), 개의 순서였다. 이를 제외하면 자동차 공포증은 매우 드물다. 2019년 미국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은 사람은 약 3만 6천 명에 이른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매년 40~70명의 소비자와 300~400명의 근로자가 감전 사고로 죽는다. 이는 자동차 사고에 비해서는 높지 않지만 여전히 동물사망류의 두 배 이상에 달하는 수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전기와 자동차를 두려워하지 않을까? 이것들이 최근에 나왔고, 종 전체의 공포증을 진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려움 중 일부는 단순한 진화에 의한 것이다.

 

문화에 의해서도 때때로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다. 미디어가 풍부한 현대사회에 대해 설명하려고 시도한 이론 중 하나가 배양이론culitivation theory이다.

 

배양효과(미디어가 대중의 마음에 무언가를 심거나 자라게 하는 효과)는 사전 지식이 없고 권위자의 주장을 확인할 능력이 없을 때만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시청률로 돈을 벌면서 점점 더 양극화되고 있다.

 

*가용성 휴리스틱이 여기에 더해지면, 위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왜곡될 수 있다. 원자력 발전소의 사망자는 극소수인 사건이 석탄 화력발전소의 대기오염으로 인한 수많은 사람들의 조용한 죽음보다 더 많이 주목을 받는다.

 

사실 원자력은 원자폭탄으로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에, 1950년대부터 괴물, 번개를 뿜는 도마뱀 등이 원자력의 마스코트가 된 것은 당연하다.

 

일단 무언가를 두려워하게 되면, 우리는 고집스럽게 그렇게 될 수 있다. 두려움은 우리가 정말 어리석은 짓을 하게 만들 수 있다. 기후변화가 파국이라면, 원자력에 대한 우리의 혐오는 분명히 이 파국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 가용성 휴리스틱휴리스틱은 상당히 유용하지만 때로 심각하고 체계적인 오류를 일으킨다. 쉽게 얻은 정보나 최근 정보에 더 큰 비중을 두는 현상을 말한다.

 

<‘나만 옳다는 착각’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크리스토퍼 J.퍼거슨 지음, 김희봉님 옮김, 선순환출판> 크리스토퍼 J.퍼거슨 : 미국 플로리다 스탯슨대학교의 심리학 교수로 범죄와 폭력과 반사회적 행동을 주로 연구한다. <Violent Crime>의 편집자이며 뉴욕타임스 등에 기고한다. <How Madness Shaped History> 등을 썼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죽음 앞에서

대문호는 완전한 허무를 체험했다.

그러나 그는 그 허무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했다.

살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

이 두 가지 모두를 그는 도덕에서 찾아냈다!

 

 

 

인생을 깊게 고민한 톨스토이의 깨달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

톨스토이는 평생 동안 삶과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유년 시대>부터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그리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설은 죽음에 관한 사색을 담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를 대신하여 죽음을 사색하는 인물은 레빈이다. 먹고 마시고 노는 데 도가 튼 인물인 스티바는 죽음이라는 것을 아예 무시하고 산다. 반면 톨스토이의 분신인 레빈은 줄기차게,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죽음에 관해 생각한다.

 

“~ 결국 사람이란 오직 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사냥이나 노동으로 마음을 달래면서 일생을 보내는 거야” 레빈은 형의 임종을 지키면서 더욱더 세차게 죽음의 불가해성을 경험한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1856년에 셋째 형 드미트리를, 4년 후 큰형 니콜라이를 여의였다. 두 형의 죽음 앞에서 톨스토이는 슬픔도 두려움도 아닌, 죽음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톨스토이는 자기 체험을 문학적으로 각색하여 레빈이라는 허구의 인물 속에 집어 넣는다. 레빈에게 두렵고 이상한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 더불어 삶이란 것 역시 알 수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일이 그저 허무하게 느껴진다. “나는 일을 하고 있다. 뭔가를 하고 싶어 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죽음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레빈의 고뇌는 톨스토이의 고뇌와 맞물린다. 이제 우리는 톨스토이가 왜 쉰 살 이후 그렇게 과격한 도덕주의자로 거듭나게 되었나 하는 문제의 해답에 가까이 와 있다. 그는 <참회록>에서 문제의 핵심을 건드린다.

 

“5년 전부터 이상한 생각이 이따금 나의 내부에 일어나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도무지 짐작도 되지 않는 회의 순간이 나를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당황하여 근심 속에 깊숙이 가라앉았다. (…) 생활이 정지해버린 같은 이런 상태에서는 언제나 ‘무엇 때문에?’‘그래서 삶은 어디로 가는가?’하는 의문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하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였고, 이 결론을 반박할 수 있는 다른 결론을 얻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자살의 문턱에서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나는 왜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톨스토이는 이세상의 모든 종교를 공부했고 철학책과 과학책을 읽었다. 이 문제에 답할 수 없다면 자살할 참이었다.

 

<참회록>에서 아무렇게나 살려거든 차라리 자살을 하라고 종용하기까지 한다. “~삶이 싫으면 자살하면 된다. 살아서 삶의 의의를 깨달을 수 없다면 삶을 끊어버리는 것이 좋다.” 몇 년 뒤 비폭력과 무저항을 설파하게 될 사람이 한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해답을 찾았다. 그 해답을 인류에게 전하기 위해 이후 30년 동안 교훈적인 글을 써댔다. 톨스토이를 위대한 기독교 그리스도교 사상가라고들 말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른 말이다.

 

그는 모든 종교를 열심히 공부하기는 했지만 어느 것 하나 믿을 수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종교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정통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이단에 가까운 사람이다.

 

믿을 수 없는 종교

<전쟁과 평화>에는 열렬한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등장한다. 공작의 누이동생인 마리야는 겸손과 온유와 사랑의 화신 같은 존재다.

 

그녀는 말한다. “하느님의 뜻 없이는 한 올의 머리카락도 머리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뜻은 우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설령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모든 것이 우리의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런 인물을 창조한 톨스토이는 도저히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는 믿을 수 없었다. 문제는 그의 성향이었다.

 

그는 대단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매사에 분석하고 따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신비주의를 인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신비주의적인 구석이 전혀 없는 종교는 별로 없다.

 

게다가 톨스토이는 이 세상 모든 것에서 거짓과 위선을 발견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아무튼 그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믿을 수 없었다.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은 톨스토이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레빈은 신앙 없는 사람이다.

 

레빈은 삶의 의의를 ‘선’에서 찾은 것이다. 착하게 사는 것. 이것이 인생의 답인 것이다. 레빈에게 신은 그리스도일 수도 있고 마호메트일수도 있고 붓다일 수도 있다. 그의 하느님은 이 모든 신적인 존재를 포괄한다.

 

그래서 그는 이 가르침을 제공해줄 수 있다면 어떤 종교든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동서고금의 모든 현인들의 저술을 읽으며 해답을 갈구했다. 플라톤, 쇼펜하우어, 호먀코프 등등, 그러나 어떤 것도 그에게 지속적인 위안이나 해답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우연히 어떤 농부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그 해답을 발견한다. "그야 사람들 중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요. 자기 이익만 차리고 사는 미추하처럼, 포카니치처럼 정직한 아저씨도 있지요. 아저씨는 영혼을 위해 살아서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거든요."

 

"어떻게 하면 영혼을 위해 사는 거지?" 레빈은 거의 외치다시피 말했다. "정직하게 하느님의 율법대로 살아가는 겁니다요, 요컨대 주인어른도 남을 못살게 구는 일은 안 하시지요."

 

신을 위해 산다는 것은 자기 욕망을 위해 살지 않는 것, 영혼을 위해 사는 것, 타인을 위해 사는 것, 즉 선하게 사는 것이다. 이것이 답이다. 

 

파문

 

톨스토이의 하느님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을 이렇게 너무 넓게, 자기 생각에 맞게 개념화한 ‘죄’ 때문에 톨스토이는 결국 교회에서 쫓겨나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은 자아 성찰의 종착역에서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궁극의 진리를 발견한다. 

 

그는 인류 모두가 한마음으로 영적인 생활을 구축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것을 신앙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그렇다 톨스토이에게는 곧 신앙이었다. 교회도 나갈 필요도 없고, 미사나 성찬 예배식도 필요 없고, 고해성사도 필요 없고, 다 필요 없다.

 

영적으로 살기만 하면 된다. 육체의 욕망을 버리고 모두가 형제처럼 영혼을 위해 살면 된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발견한 신앙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 즉 채식, 시골 살이, 즉각적이고도 전면적인 성생활의 중단, 예술의 박멸 등은 이 신앙의 실천을 위한 세부 항목이었던 것이다.

 

그는 신앙에서 ‘신비’라는 부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기적이라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내세라는 것도, 그리스도의 부활도 다 믿기 어려웠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가르침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온 세상의 종교를 다 공부하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신을 만들어 냈다.

 

1855년의 일기에 드러나듯이 “신앙과 신비가 제거된 그리스도의 종교, 인류의 발전에 상응하는 새로운 종교, 미래의 행복을 약속하는 대신 지상의 행복을 제공해주는 실질적인 종교의 창설”이 그의 목표였다.

 

톨스토이는 자신만의 신을 만들어내는 한편 기존 교회를 비판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조목조목 비난한 <교의 신학 연구>를 썼고, 엄청난 지식을 과시하면서 4대 복음서를 자기 식으로 고쳐 쓰기도 했다.

 

또 <내가 믿는 것>이라는 책에서는 그리스도교를 독자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참다못해 1901년에 마침내 이 무례한 지식인을 파문했다. 파문은 오히려 톨스토이가 원했던 것이기도 했다.

 

파문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교회와 성직자에 대해 염증을 내고 있던 대중의 인기까지 한 몸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톨스토이교

<참회록>과 <인생의 길>에 쓰인 ‘톨스토이의교‘의 교리를 요약해보자. 첫째, 항상 죽음을 기억하며 살라. 죽음을 기억하면 누구나 참되게 살 수밖에 없다.

 

“당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가슴속으로 상기만 한다면 교활한 행동을 하는 것도, 남을 속이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남의 물건을 빼앗는 것도 하지 않게 될 것이 분명하다.

 

죽음을 앞두고 행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선행뿐이다. (…) 우리는 날마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빈둥빈둥 죽을 때를 기다리지 말고 어느 순간에든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인생의 길>

 

둘째, 사랑하라. “죽음에 임박했다는 의식은 사람들에게 자기 일을 완성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존재하는 모든 일 가운데서 언제나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다. 현재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다.

 

죽음을 망각한 삶과 날마다 죽음에 접근해 가고 있다는 의식을 지닌 삶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동물의 삶에 가깝고 후자는 신의 삶에 가깝다.<인생의 길>

 

사랑하라는 그의 계명은 ‘신은 곧 사랑이다’라는 말로 바꿔 말해진다. “신은 사랑이다. 사랑 가운데 있는 자는 신의 품에 안주하는 것이며, 또한 신도 그 자의 가슴에 머문다.

 

어디에서도 신을 본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신은 우리의 가슴에 머문다. 그리고 신의 사랑은 우리의 내부에서 완성되는 것이다.“<인생의 길> 여기서 그가 말하는 사랑은 물론 아가페적인 사랑, 성을 초월하여 인류를 하나로 화합시켜주는 거룩한 사랑이다.

 

셋째, 착실하게 살아라. “죽음에 대한 준비는 오직 하나다. 바로 선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 삶이 선량해질수록 그만큼 죽음의 공포는 적어지며 그만큼 죽는 것이 편해진다. 성자에게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인생의 길>

 

착하게 산다는 것은 ‘신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뜻에 따라 살려면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버리고 부지런히 일하며 처신이 겸손해야 하고 인내의 덕을 기르고 자비로워야 한다.<참회록>

 

결국 ‘톨스토이교’. 혹은 톨스토이즘의 본질은 죽음의 자각과 맞물린다. 톨스토이가 중년의 위기 이후 도덕, 도덕하며 큰 소리로 외치게 된 것은 모두 죽음 때문이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죽음 앞에서 대문호는 완전한 허무를 체험했다.

 

그러나 그는 그 허무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했다. 살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살아 가는 방식, 이 두 가지 모두를 그는 도덕에서 찾아냈다.

 

그의 도덕은 지극히 실용적인 정신과 종교에 대한 학습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육체에 대한 혐오감이 합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인생의 허무는 어디에서 오는가 - 도덕을 상실한 시대의 톨스토이 읽기’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석영중교수지음, 위즈덤하우스출판>

*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하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24년까지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한국슬라브학회 회장을 역임. 저서로<매핑 도스토옙스키 : 대문호의 공간을 다시 여행하다>,<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 : 종교와 과학의 관점에서>,<죽음의 집에서 보다 : 도스토옙스키의 갱생의 서사(공저) >,<도스토예스키의 명장면 200>과 수많은 역서 등이 있다. 1999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시킨 메달을 수여했다.

 

 

담양 메타세콰이어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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