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당신을 채점하러 올 때,
그가 보는 것은 당신의 승패가 아니라
당신이 어떻게 경기를 했느냐다.
- 그랜트랜드 라이스, 미국의 스포츠 기자
인간 : 죄로 인해 신의 형상을 상실한 존재!
성서에서 ‘육신’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나약한 측면을 가리키며, 허무함이나 무상함, 또는 죄에 물들기 쉬움을 나타낸다.“
“사람은 한낱 고깃덩어리,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 … (시편 78:39)
“하느님 보시기에 세상은 너무나 썩어 있었다.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하느님 보시기에 속속들이 썩어, 사람들이 하는 일이 땅 위에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창세기 6:11~12)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명령을 거역한다는 이 표현 속에는 이미 인간의 ‘자유 의지’가 전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명령이란 그것에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선택 능력을 지닌 자에게만 의미가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역사는 신의 작품이므로 선에서 시작하고, 자유의 역사는 인간의 작품이므로 악에서 시작한다”라는 칸트의 지적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죄와의 관계, 즉 자유의지와 더불어 세상에 죄가 출현하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한 처음에 주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도록 하셨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며 주님께 충실하고 않고는 너에게 달려 있다.
주님께서는 네 앞에 불과 물을 놓아주셨으니 손을 뻗쳐 네 마음대로 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받을 것이다. (집회서 15:14~17)
성서 <창세기>는 신의 명령을 거역함으로써 죄를 지은 인간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되,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창세기 3:2~3)
그리고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 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창세기 3:17)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었다. (창세기 3:22~23)
성서는 인류의 첫 조상이자 대표인 아담이 신의 명령을 거역하여 죄를 짓고 그 대가로 벌을 받는다는 상징적인 설화를 통해 죄란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그것은 신을 망각하고 자신이 스스로 신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오만함을 가리킨다. 즉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 인간과 신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 인간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라는 것을 망각한 짓인 것이다.
신의 뜻에 반하여,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양, 자신의 자율성을 헛되게 주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타락이다. 이로써 원래 인간성 속에 깃들어 있던 신의 형상은 상실되었다.
아담이 범한 원죄의 결과로 인간은 정죄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현재의 죄의식과 사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신약성서는 이러한 인간의 운명을 한마디로 표현해 주고 있다!
인간 : 그리스도를 통해 신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존재
신의 뜻을 거역한 죄인으로서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신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고 성서는 진단한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에게 가능한 일은 신에게 간청하고 기도하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신은 그 기도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몸소 이 땅에 찾아와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인류의 죗값을 치른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에게는 상실한 신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이 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요한이 지적하듯이, ‘빛’에 속하는가 혹은 ‘어둠’에 속하는가, 하늘에 속한 사람인가 혹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인가 하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요한 3:19)
이처럼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거나 혹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인격으로서 스스로를 결정하는 존재이다. 여기서는 영과 육신 사이의 구분이 뚜렷하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로마서 8:6)”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에게는 성실한 신의 형상을 회복할 희망이 주어진다.
세상에 속한 자에서 하늘에 속한 자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22)”
그리스도교는 인간을 영육의 통일체로 간주하며, 전인적이고 구체적인 존재로 본다. 몸과 영혼의 이분법, 또는 둘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하는 유심론적 인간관이나 유물론적 인간관을 모두 배격한다.
그리스인들이 영혼의 불멸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데 비해 그리스도교는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영혼만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함께 구원받는 것이며, 따라서 부활이란 육신을 포함한 전(全) 인간이 영적 존재로 변화됨을 의미한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고린도전서 15:44)” 이리하여 인간은 그의 완성, 즉 종말론적 희망의 실현을 하느님 곁에서의 최후의 삶에서 발견한다.
그때에는 그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고(고린도 후서 3:18), 하느님이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이다.(고린도 전서 15:28)
신의 최종적 승리에 대한 희망
그리스도교는 우리 영육의 구원과 부활의 희망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이지만, 또한 종교의 특성도 지닌다. 그리스도교에서 신은 한편으로 도덕적 의무의 원천이자 보증자로 여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신은 역사의 주인으로, 다시 말해 우리의 선한 의도가 실패할 때에도 여전히 숭배되는 자로 여겨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신은, 선한 의도와 역사 진행 과정을 최종적으로 화해시키는 보증자로 여겨진다.
이 후자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유비 추리를 통해 데카르트가 생각해 낸 것과 같은 어떤 악령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악령은, 선한 의도들이 항상 정반대의 결과를 나타나도록 하고, 나쁜 결과를 낳도록 교묘하게 조종한다. 그러한 세계에서라면 우리는 결코 선한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행동의 실현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선은 선을 낳는다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 선한 행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악이 끝까지 관철되어 결정적으로 승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동시에 믿을 때에만 이것을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악이 승리한다면, 선한 의도들은 결국 헛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에 대한 믿음은, 악한 의도란 길게 볼 때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어쨌든 선에 기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수반한다. 이러한 생각은 칸트를 비롯한 피히테와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의 핵심을 이룬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령인 메피스토의 언급도 이러한 생각의 반영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악을 지향하지만 언제나 선을 낳는 세력의 일부이다.”
신을 향해 부르짖는 인간의 모습
인간의 운명과 관련하여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모든 인간의 ‘노력’은 그의 삶의 실현을 위한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마땅히 자기반성을 통해 늘 진리를 깨우치도록 노력하고 또 올바른 길을 걸어가야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물론 불교나 도교, 또는 명상을 통해 자기완성을 지향하는 종교적 노력이야말로, 인간이 소우주임을 생각해 볼 때,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라는 데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인간의 문제를 괴력난신(怪力亂神)에 의지하려 하지 않고 항상 상식과 인륜이 의거하여 해결하려 했던 유교 또한 동양의 영원한 지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도덕적 삶의 완성은(최소한의 실현조차도) 늘 벅찬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절대적인 사랑에 기대를 걸게 된다. 다음 <욥기>의 구절은 절대적인 한계상황 속에서 신을 향해 부르짖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당신께 부르짖사오나 당신께서는 대답도 없으시고 당신 앞에 섰사오나 보고만 계시옵니다.
당신은 이다지도 모진 분이십니까? 손을 들어 힘껏 치시다니.
나를 번쩍 들어 바람에 실어 보내시고 폭풍에 휘말려 사라지게 하시더니.
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당신께서 나를 죽음으로 이끌어 가시리라는 것을.
모든 산 자가 모여 갈 곳으로 데려가시리라는 것을.
이렇게 빠져들어 가면서 그 누가 살려달라고 손을 내뻗지 않으며 절망에 빠져서 도움을 청하지 않으랴(욥기 30:20~24)
인간은 이렇게 죽음과 허무의 심연 속에서 절규할 때조차 절대자를 향해 마지막 희망을 거는 존재이다. 물론 이모든 것에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는 절대자는 우리의 한정된 경험 안에서는 그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한 번도 완전하게 우리에게 이해된 적은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우리 인간 세계의 의미 전체에 항상 전제되어 있다.
그는, 우리가 무력한 상태에서 ‘하느님’이라는 인간의 말로 부르는, 비밀로 가득 찬 배경으로 남아 있다. 신은 어쩌면 자유의지를 지닌 유한한 정신을 창조한 다음, 그들에 의해 다시 자기 자신이 알려지도록, 즉 그들이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선택하게 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절박하게, 그리고 안타깝게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테오 27:46) 또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라고 ‘무력하게’(그러나 무한한 사랑의 힘을 가지고)외치며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길을 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셨는데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저 사람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주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요한 9:1~5)
위의 신약성서에 나오는 구절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조건이란 결코 절대적인 한계상황이 될 수 없다는 것, 신은 인간의 타고난 조건으로 인한 불행도 역전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즉 천형(天刑)처럼 보이는 인간의 조건조차 장차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사 창조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앞 구절이 던져 주는 교훈에 관해 성찰해 보자!
토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대심문관>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다. 원고인 대심문관이 피고인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형식으로 서술된 이 글을 읽고, 인간의 자유와 참된 신앙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당신(예수 그리스도)은 인간의 자유를 지배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 자유를 증진시켜, 그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정신의 왕국에 영원히 무거운 짐을 지워 주었소.
당신은 당신에게 유혹되어 사로잡힌 인간이 자유롭게 당신을 따라올 수 있도록 인간의 자유로운 사랑을 바랐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확고한 율법 대신에, 인간은 그 후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자유로운 마음으로 혼자서 결정지어야만 했소.
그러나 선택의 자유라는 무서운 짐이 인간을 압박할 때 그들은 당신에게 등을 돌리고 당신의 형상도 당신의 진리도 반박하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있소?
그들은 마침내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고 외치게 될 거요. 그것은 당신이 그처럼 많은 걱정거리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그들에게 붐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혼란과 고통 속에 남아 있게 했기 때문이오.
그리하여 당신은 스스로 자기 왕국을 붕괴시키는 기초를 놓았으니 그 점에 있어서 누구를 더 이상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신보다 오히려 기적을 구하는 존재라오. 인간이란 기적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제멋대로 기적을 만들어내고, 마침내 기도사의 기적이나 무당의 요술까지도 믿게 되는 거요.
다른 사람보다 몇백 배 더한 반역자, 이교도, 무신론자조차 이 점에서는 역시 매한가지라오. 당신이 갈망한 것은 무서운 위력에 의한 인간의 노예적인 환희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이었던 거요. 그러나 이점에서도 당신은 인간을 너무 높이 평가했었소. 그들은 태생이 반역이긴 하지만 역시 노예이기 때문이오.
(…) 단언컨대, 인간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고 비열하게 만들어졌단 말이오! 과연 당신이 한 것과 같은 일을 인간이 해낼 수 있을까요? 그들을 그렇게까지 존경함으로써 오히려 당신의 행위는 그들에게 동정을 품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렸소.
그것은 당신이 그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오. 이것이 인간을 당신이 그렇게까지 그들을 존경하지 않았던들 그들에게 그렇게까지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을 거요.
그리고 그 편이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는 결과가 되었을지도 모르오. 그들의 부담도 가벼워졌을 테니까. 인간이란 원래가 무력하고 비열한 존속이니까. (…) 따라서 불안과 혼란과 불행 - 이것이 당신이 그들의 자유를 위해 그토록 고난을 겪고 난 후 현세의 인간의 운명이오!“
<'사상과 인물로 본, 철학적 인간학'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박찬구교수지음, 세창출판사> *박찬구교수 : 서울대학교 철하과를 졸업 후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윤리교육학 명예교수이다.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개념과 주제로 본 우리들의 윤리학>등 10여권의 저서가 있다. 한국철학적인간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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