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뭣고’, 화두참구!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론과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론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을 추구하느냐면 자기가 원하는 조건이 충족될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더 큰 것,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원하는 것들이 충족될 때에는 행복감을 느끼지만 안 되면 불만족, 즉 괴로움을 느끼게 되므로 이렇게 해서는 결코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뿐만 아니라 서양의 유명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 같은 사람도 이와 같은 거짓 행복의 삶을 소유양식의 삶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삶으로는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 수 없다고 그의 저서<소유나 존재냐>에서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인 거짓 행복, 이런 것으로는 안 됩니다. 참다운 행복은 밖으로 조건이 맞아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참다운 행복은 참마음의 내용, 즉 진리대로 사는데서 오는 행복입니다.
그 참다운 행복은 거짓 행복처럼 조건에 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그런 행복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참행복은 한 번 열리면 영원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행복입니다. 이것을 불교의 전문 용어로는 열반(涅槃)이라고 합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나고 죽고 하는 생사윤회 과정에서 겪게 되는 수없는 이일체고(離一切苦)하고 득구경락(得求竟樂)의 삶을 위해서 참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이 제대로 확립이 안 된 사람이라면 법문이나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해서 이에 대한 확실한 가치관을 확립해야 합니다. 참선하려고 하면 왜 그렇게 망상이 떠오르는지, 어떤 때는 이런 저런 망상으로 하루종일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치성하는 망상을 억지라도 없애서 마음을 닦으려는 것이 수행법입니다. 수행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최고의 수행법은 화두선입니다. 화두란 참선자들이 깨쳐야 할 문제입니다. 문제란 무엇인가?
옛 조사스님들의 법문이나 참선자들을 지도하면서 보여준 행위의 종요(宗要)를 모아 참선자들에게 과제로 준 것이 화두입니다. 즉 살림살이가 담겨진 법문 중의 법문입니다.
‘뜰 앞에 잣나무니라(庭前柏樹子).’라는 소리가 나오기 이전 조사스님의 그 뜻, 즉 마음 속에 숨겨진 뜻이 화두라는 거예요. 화두는 내가 찾아야할 대상이 아니라 내 자신이 되는 겁니다.
화두 참구자는 첫째, 의정(疑情)을 일으켜야 합니다. 화두에 의심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삼라만상 우주만물이 모두 화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옛 스님들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의지해가며 공부하는 것이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화두는 ‘말길이 끊기고 마음작용이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스승과 제자가 마음과 마음으로써 서로 상속하지 않으면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다 너다, 있다 없다’의 분별을 초월한 말이 화두입니다. 분별하는 한 화두를 타파할 수 없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부서져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둘째, 화두는 간절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오직 그것뿐인 것처럼 절실하고 반드시 해야 합니다. 어린애가 집 나간 엄마 생각하듯이 하셔야 합니다.
셋째, 화두는 한결같이, 끊임없이 하십시오. 참선자는 항상 일여(一如), 여여(如如)라는 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화두참구는 한결같이, 물 흐르듯이, 쉼이 없어야 합니다. 고인(古人)은 “화두참구는 닭이 알을 품듯이 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화두에 진의가 나지 않고 화두가 되다가 말다가 하는 것을 주작화두(做作話頭), 조작의심이라고 합니다.
화두가 안 되는 사람은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너는 진정으로 화두 할 생각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참선자는 참으로 발심해야 합니다. 화두가 안 되는 사람은 큰 분심을 일으키십시오.
부처님 제자 중에 ‘주리반특가’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머리가 나빠도 너무 나빠 저능아에 가까웠습니다. 부처님께서 하도 안타까워 어느 날 동정어린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쓸고 닦으라’ ‘쓸고 닦으리.’만 외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었지만, 진실한 사람이라 부처님이 시키는 대로 계속하니 그렇게 흐리고 탁한 마음이 점점 맑아지고 밝아져서 드디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게 되었습니다.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하게 들리면 몸은 가볍고 편안하며 거뜬해 집니다. 그러면 지혜가 생깁니다. 경전이나 어록을 몇 구절 보더라도 이해가 되고 거침없이 내려갑니다.
그럴 때는 아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고, 어디가면 법문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더 지극하게 밀고 나가야 참으로 깊은 경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 화두가 몽중일여(夢中一如)의 경계가 지나면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안목이 트이고 힘이 납니다. 절대 즐기거나 빠지지 말고 더 열심히 하고 더 애쓰십시오.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지엽적인 일이지 본분사는 아닙니다.
수행자는 매일 자기를 점검해서 반성하고 참회해야 합니다. 바로 고칠 수 없는 것은 메모를 해서 벽에 써놓고라도 매일 고치고 보완해 나가야 합니다.
그 문제점만 고치고 보완하면 화두는 자연스럽게 들릴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어요. 자기를 손바닥 보듯이 훤히 들여다보고 자기를 다스려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이 뭣고’ 화두는 내려오는 것입니다. 예컨대 推殘古木依寒林 베고 버려진 고목이 찬 나무에 의지하니, 여기서 베고 버려진(쓸모없는)나무는 ‘이 뭣고’ 화두를 들고 평생 씨름하는 수좌의 모습입니다.
<‘선 너는 누구냐’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현대불교신문사 엮음, 여시아문출판> * 이 법문집은 ‘간화선 중흥을 위한 선원장 초청 대법회’에서 선원장 스님 11분과 조게종 총무원장 스님의 특별법문을 엮은 것이다.
외적인 도움 없이, 저 자신의 노력만으로 더 깊은 진리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 그대가 참자아를 탐구하겠다고 마음먹은 것 자체가 신의 은총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의 은총이 참자아인 그대의 가슴 속에서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다. 신의 은총이 그대의 내면에서 그대를 끌어당기고 있다. 그대는 이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은총 없이는 진정한 탐구가 이루어질 수 없으며, 참자아를 찾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은총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은총과 탐구, 이 둘은 동시에 작용한다.
깨닫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스승을 섬기야 합니까?
- 무지가 남아 있는 한 스승이 필요하다. 참자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무지이고, 그 무지는 그대가 스스로 만들어 짊어진 것이다. 꾸준하게 신을 섬기는 사람은 복종에 도달한다.
스승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은 자신이 곧 모든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참자아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이 구도자의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고,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
<‘있는 그대로’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 지음, 데이비드 갓맨 편집, 정창영님 옮김, 한문화출판>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 : 1879년 남인도 타밀지방에서 태어남. 열여섯 살에 죽음을 체험한 그는, 참자아는 육체나 마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우침. 1950년에 열반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