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도둑!
내 전 생애가
나팔꽃만 같아라
오늘 아침은
- 모리타케(守武)
☞ 바람에 잘 찢기는 나팔꽃의 꽃말은 ‘덧없음’이다. 시인은 자신의 전 생애를 한 송이 나팔꽃에 비유하고 있다.
인생이란 도둑!
인생(과 시간)이란 얼마나 도둑 같은가, 어? 얼마나 강도 같은가…평화로운 카라반을 매복 공격하는 악랄한 노상강도 보다 더 악랄하다.
그런 노상강도들은 돈 가방과 숨겨둔 황금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당신이 유순하여 실랑이 없이 재물을 내놓으면 다른 것 - 목숨, 기억, 심장, 생기 - 은 빼앗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이나 시간이라는 이 강도는 어느덧 다가와 모든 것 - 기억, 심장, 청력, 생기 -을 앗아간다. 심지어 고르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손에 넣는다.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그 와중에 당신을 조롱거리까지 한다.
가슴을 축 늘어지게 하고, 엉덩이엔 뼈만 남게 하고, 허리를 굽게 하고, 머리칼은 성긴 백발로 변하게 하고, 귀에서 털이 자라게 하고, 온몸에 점을 뿌려놓고, 손과 얼굴에 검버섯을 돋게 하고, 앞뒤 안 맞는 말을 지껄이지 않으면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게 하고, 모든 말을 빼앗아 아둔하고 망령 든 사람이 되게 한다.
그 개자식은 - 인생, 시간, 노년 다 똑 같다. 똑같은 쓰레기, 똑같은 깡패다. 그 개자식은 처음에는 적어도 공손해지려는 노력이라도 한다.
솜씨 좋은 소매치기처럼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도둑질하는 것이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작은 것들을 훔쳐간다 - 단추 한 개, 양말 한 짝, 가슴 왼쪽 미세하게 찌릿한 통증, 몇 밀리미터쯤 두꺼워진 안경, 앨범 속 사진 세 장, 얼굴들,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당신은 문을 잠그고, 밖에 나가지 않으며, 몸속에 비타민을 가득 채워넣고, 저 호수에서 채취한 심해 해초의 완전히 입증된 마법을 발견한다.
당신을 다시 젊어지게 할, 이름이 뭐였더라, 하여간 그것을, 깨끗한 북쪽 바다의 작은 게에서 추출한 칼슘을, 불가리아 요구르트나 장미유의 경이로운 효과를 찾는다.
소뼈의 골수를 낮은 온도에서 푹 끓여 당신 몸의 결합조직을 위한 콜라겐을 얻고, 드노프의 밀 다이어트법의 태음 주기를 따르고, 그러다가 카스타네다, 페테르 드노프, 마담 블라바츠키와 함께 영혼의 미로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는 모험을 떠나고,
오쇼와 함께 고대의 가르침에 대한 신비주의 속으로 사라지고, 환생, 프라이멀 스크림 요법, 역산법, 동네 체육관의 호흡 요법 등을 시도(했다 실패)하고,
물리적 육체는 환상이라고 말하며 당신을 아스트랄계라는 영적 공간으로 이끄는 이들의 지시에 따라 평행봉과 체조용 벽 사다리와 뜀틀을 노려보고,
그러면서 학교에 다닐 때 당신에게 고통을 주던 그 체육 기구들을 계속 눈앞에 두고 바라보며 속으로 말하기를. 자, 이게 노년의 작은 기쁨이로구나.
이제 더 이상 평균대나 체조용 벽 사다리에 오르지 않아도 되니까. 당신의 아스트랄계 영체(靈體)는 그런 것 따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다가 나중에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곧바로 깨닫게 되는 사실은 다른 종류의 육체는 모두 당신을 떠나갔고 남은 건 물리적 육체뿐이라는 것이다 -
그 절뚝거리는 늙은 당나귀만을 데리고 당신은 홀로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이젠 그 어떤 강도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
<‘TIME SHELTER,타임 셀터’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지음, 문학동네> * 고스포디노프 : 불가리아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 유럽에서 가장 인지도 있는 불가리아 작가 중 하나로, 날카로운 통찰이 빛나는 유머와 아름다운 문장이 특징적이며 동유럽의 프루스트라고도 불린다. 소피아대학교에서 불가리아학을 전공. 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첫 장편소설 <자연 소설>로 2삼 개국으로 번역되면서 독자와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슬픔의 물리학>, 세 번째 소설<타임 셀러>로 2023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했다. <타임 셀러>는 미스터리한 남자 가우스틴이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위해 과거를 정교하게 재현한 클리닉을 만들게 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독특하고 지적인 작품이다.
어디서 읽었더라?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 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천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다고 했다지!
살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든, 살 수 있기만 하다면…!
그만한 진실이 또 어디 있겠나! 그래,
이건 정말 대단한 진실이 아닌가! 인간은 비열하다…!
- 『죄와 벌』제2부 제6장에서.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저도 음주가 선행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진실이지요.
그러나 빌어먹어야 할 지경의 가난은, 존경하는 선생 그런 극빈(極貧)은 죄악입니다. 그저 가난하다면 타고난 고결한 성품을 그래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빈 상태에 이르면, 어느 누구도 결단코 그럴 수 없지요. 누군가가 극빈 상태에 이르면, 그를 몽둥이로도 쫓아내지 않습니다. 아예 빗자루로 인간이라는 무리에서 쓸어내 버리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모욕을 느끼라고 말입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극빈 상태에 이르면 자기가 먼저 자신을 모욕하려 드니까요. 그래서 술집이 있는 겁니다.
- 『죄와 벌』제1부 제2장에서
☞ 극빈자 마르멜라도프가 술집에서 늘어놓은 장광설. 고통의 가장 적나라하고 모멸스럽고 무의미하고 피할 수 없는 형태가 극빈이다. 극빈은 일종의 선을 넘은 고통이다.
음주는 선을 넘은 상태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모욕하는 방식 중의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시고 어떤 사람은 고통을 배가시키기 위해 마신다.
술은 비참한 사람의 비참함을 가중시킨다. 이미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비참한 사람에게 술은 추악함이란 낙인까지 찍어 준다.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에서 일부 발췌, 석영중 지음> *석영중 :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졸업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슬라브어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매핑 도스토옙스키 : 대문호의 공간을 다시 여행하다> 등 많은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