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죄!
악과 죄 : 악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죄의 난해성, 완고성, 경직성에 있다. 악한 사람들의 핵심적인 결함은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에 있다(융은 '악'이란 섀도우(Shadow)를 ‘충족시키지’못하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정확히 짚어 냈다). 정치적 권력이 주어졌다든지 해서 자신의 제약된 힘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된 히틀러처럼 몇몇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범죄’는 너무 미묘하고 가려져 있어서 내놓고 범죄로서 지명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은폐와 위장이라는 주제는 이 책에서 앞으로도 계속 쉬지 않고 되풀이해 나올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을 '거짓의 사람들'이라고 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교도소에서 범죄자들을 상대로 일한 경험이 있었으나 그들을 겪으면서 그들이 악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의 파괴성에는 일종의 임의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정직한 범인인 까닭에 잡혀 온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주저하지 않고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다. 악한 사람들과 일반적인 범죄자들 사이의 구분과 함께 나는 또한 인격 특성으로서의 악과 악한 행동 사이에도 뚜렷한 구분을 짓는다. 다시 말하면 행동들이 악하다고 해서 사람도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려진 정의는 ‘표적을 빗나간다’는 것이다. 죄란 연속적인 완전 상태에 미치지 못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계속적으로 완전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까닭에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다. 물론 범죄에는 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죄나 악까지도 정도의 문제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도덕적 붕괴를 막아주는 것은 곧 자신의 죄성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을 거스르는 수고를 묵묵히 감내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들이 악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수고를 감내하지 않으려 하는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내가 악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행동에 있는 가장 지배적인 특징은 곧 남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책임 전가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부터 스스로를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까닭에 자연히 자신을 비난하는 상대에게 손가락을 겨누게 된다. 이 책임 전가는 정신과 의사들이 투사(projection)라고 부르는 방어기제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악한 사람들은 밑바닥에서부터 자신들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혹시 무슨 갈등이라도 생기면 그 갈등을 일관되게 세상 탓으로 돌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이다.
나는 악을 이렇게 정의했다. “악은 정신적 성장을 피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정신적 힘의 구사, 즉 공개적이거나 은폐적인 강압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악한 사람들이 파괴적인 이유는 종종 그들이 악을 퇴치하려는 데 있다. 인생이라는 것이 종종 완전한 자아상을 위협해 오는 까닭에 그들은 그 인생을 미워하고 파괴하려는 일에 이따금씩 반사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인생을 미워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자신의 죄 된 부분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런 극단의 자기 방어는 언제나 자신보다는 남을 희생시키게 마련이다. 자신을 미워할 줄 모르는 것, 자신을 거스르지 못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악하다고 부르는 책임 전가 행위의 뿌리요 핵심적인 죄라고 생각된다. 악한 사람들의 도덕성을 이해하는 데는 ‘이미지’, ‘외형상’,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말들이 퍽 중요하다. 그들의 ‘선함’이란 모두 가식과 위선의 수준에서 선함일 뿐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거짓이다. 그들이 ‘거짓의 사람들’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만약 악한 사람들에게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이런 자기기만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거짓 행위에는 아무리 덜 발달된 것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양심이 선행된다. 그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은 특정한 고통 하나뿐이다. 자신의 양심을 직시하는 고통, 자신의 죄성과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고통이다. 내가 보기에 인간의 악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심리 문제는 바로 여러 가지 특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나르시시즘이다.
나르시즘과 자기의지 : 나르시시즘 또는 자아 도취는 여러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에리히 프롬이 ‘악성 니르시시즘’이라고 불렀던 한 특정한 병적 변이 형태로 들어가려고 한다. 악성 나르시시즘의 특징은 복종할 줄 모르는 자기 의지에 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기 양심의 요구에 스스로를 굴복시킨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죄책감과 자기 의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때, 사라져야 하는 것은 언제나 죄책감이고 이기고 마는 것은 언제나 자기 의지다. 히틀러의 의지가 자기 자신의 의지였던 반면 예수님의 의지는 그의 아버지의 의지였다. 이 두 의지의 결정적인 차이는 ‘고집의 의지’냐 ‘순종의 의지’이냐 하는 데 있다. 이 복종할 줄 모르는 고집의 의지가 바로 악성 나르시시즘의 특성이다. 프롬은 인간 악의 기원을 하나의 발달 과정으로 보고 있다. 즉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악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오랜 선택들을 통하여 오랜 시간 서서히 악해져 간다는 것이다.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에서 일부 요약 발췌, M. 스캇 펙 지음/윤종석옮김
비전과리더십>▣ 저 자 M. 스캇 펙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했다. 심리상담자로서 미 행정부의 요직을 맡기도 했던 그는 1978년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출간하면서 전 세계에서 가장 신망 받는 의학자이자 영적 상담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현재 미 코네티컷 주 뉴 밀퍼트에서 정신과 의사로 개업해 있으면서 밀퍼트 종합병원 정신건강 치료센터의 책임자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아직도 가야 할 길』 『영혼의 부정』 『해리 이야기』 등이 있다.
<애기참반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