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문인들이 사군자를 그린 것은 속된 감정을 씻어내기에 딱 알맞은 소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화는 겨울을 이기며 봄을 알리는 끈기가 있고, 난초는 깊은 산에서 홀로 향을 피우는 고결함이 있고, 국화는 서리를 맞으면서도 늦게까지 피는 정절이 있고, 대나무는 북풍한설을 견디는 지조가 있다하여 선비는 이런 품성을 본받고자 매난국죽을 그리며 세상의 풍파를 이겨내는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었다는 것이다.
대개 난초를 먼저 그리고 국화를 나중에 배운다고 하는데 실제 난부터 먼저 그리고 싶어진다. 난 잎의 꺾이는 위치와 꽃대를 그리고 꽃잎을 그릴 때는 난의 아름다움에 매료 된다
파격적으로 그린 추사의 불이선란(不二禪蘭圖)〉부터 난 그림을 감상해볼까요.
그는 “크고 작고 부드럽고 강하고를 따지지 않고 오직 내 취향대로 그릴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 그림은, 추사가 그린 〈세한도〉와 더불어 문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담묵의 몇 안되는 필선으로 한 포기의 난을 그렸는데, 잘 그리려고 애쓴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붓 가는 대로 맡겨진 필선이 난의 모습으로 변해 있을 뿐이다. 난 주위의 여백에 추사 특유의 강건 활달하고 서권기 넘치는 필체로 쓴 화제가 가득하여 그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예 작품인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처럼 그림에 문학적인 요소을 가미하는 형식은 이미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의 남종화적 그림들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그림은 그 속성상 일단 자연물의 외형적 묘사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런 한계성 때문에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심회나 사상을 명료하게 들어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래서 동양화에서는 시각적인 묘사만으로는 부족한 사상이나 심회의 표현을 위해 화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추사는 〈부작란도〉에서 난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자신의 심회를 화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화면의 위쪽에 있는 화제의 내용을 보면.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若有 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
「난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우연히 하늘의 본성을 그렸네. 마음속의 자연을 문을 닫고 생각해 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힐(維摩詰)의 불이선(不二禪)이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비야이성(毘耶離城)에 있던 유마힐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답하겠다」
우리나라에서 묵란도는 난초 그리기와 서예의 관련성을 강조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이후 본격적으로 성행하였다. 그 중에도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민영익이 쌍벽을 이뤘다. 이들의 난초는 회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지만 그 화풍은 사뭇 대조적이다. 대원군의 난초가 섬뜩할 정도로 예리하다면 민영익의 난초는 부드럽고 원만하다. 이 대조적인 화풍은 그들의 판이한 인생을 그대로 담고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추사이후로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그린 난을 최고로 친다.
구한말 난초 일인자로 유명하다.
고종의 아버지로 호는 석파, 흥선대원군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난을 잘 그리며 추사체를 잘 구사하였다.
이그림의 화제는 추사체로 썼기 때문에 석파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소호 김응원 묵란도 비단에 수묵 | 42.2×119.5㎝
峭壁一千尺 벼랑은 일천척이요
蘭花在空壁 난 꽃은 벼랑 틈에 있고
下有采樵童 그 밑에 나무하는 초동이 있는데
伸手折不得 손을 뻗어 꺾으려 하여도 닿지가 않는구나!
小湖 金應元,1855~1921. 조선 말기 선비 화가로서 난과 서예에 매우 능숙한 솜씨를 보여
석파의대신 난을 그려주기도 한것으로 알려진다.
소호 김응원 석란도 4폭대련(石蘭圖 四幅對聯) 비단에 수묵 | 33×127㎝ | 1916
소호 김응원은 묵란과 예서, 행서에 능했다. 네 폭에 난초의 그윽한 향기와 완숙미가 세련되게 표현되었다. 그의 묵란화법은 석파 화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세장한 석파의 묵란보다는 추사의 묵란 세계에 더 가깝다.
작품으로 창덕궁의 <묵란도>, <지란정상도> 등이 있다.
난초 잎의 굵기와 비수의 두드러진 변화 없이시원스럽게 직선으로 뻗어나간 묵란 한포기를 그렸다. 간결한 필의가 필획의 기운이 돋보이며 묵새이 깊고 은은한 작품이다
김응원의 묵란도 축 시
춘란은 미인 같아서
캐지 않고 스스로 바치는 것을 부끄러워하네
때때로 바람에 향기 날리지만
쑥대 속에 깊이 묻혀 보이지 않네
그림으로 그 참모습을 그려
굴원의 이소를 도우려 하였는데,
대해보니 굴원 같아
함부로 장식으로 쓰지 못하네
고매한 난은 시냇물 깊은 가에 생기는데
향기는 깊은 숲에 가득하네.
캐어서 드리려 하니
어떤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할꼬.
해는 저물어 그저 손에 가득할 뿐
배회하며 근심만 깊어지네
슬퍼 탄식하며 난을 엮어차고
언덕에서 거문고만 거듭 연주 하노라
소호거사 지음, 석파 이하응의 난을 대신처 주었다고
할 만큼 난을 잘첬다
그의 대표작인「노근묵란도」를 보면, 뿌리가 노출된 난을 포함하여, 크게 두 무더기로 나눠진 구도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구도이며, 이것은 나라를 잃으면 난을 그리되 뿌리가 묻혀 있어야 할 땅은 그리지 않는다는 중국 남송말(南宋末) 유민화가(遺民畵家) 정사초(鄭思肖, ?∼1332)의 고사(故事)에서 따온 것으로, 당시 나라를 잃은 민영익의 심경이 그대로 토로되어 있다.
화면 왼쪽 아래에 찍혀 있는 화가 자신의 백문방인(白文方印)‘민영익인(閔泳翊印)’외에도 화면 곳곳에 안중식,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이도영(李道榮, 1884∼1933), 최린(崔麟, 1878∼1950이후)의 후기찬문(後記讚文)이 빽빽하게 쓰여 있다.
잎끝이 뭉툭한 난잎, 예외없이 꽃 중심부에 찍힌 묵점, 장봉획을 사용한 고른 잎의 선 등에서 운미란의 특징을 잘 살필 수 있다. 이와같이 운미의 난은 개성이 뚜렷하여 쉽게 타인의 것과 구별이 되는데, 그것은 전통의 흐름에서 볼 때도 확연히 이탈하여 국내에서는 스승을 찾기가 힘들다.
상해시절에 교유했던 오창석과의 강한 연결은 두 사람의 밀접한 교분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영익의 난
민영익의 난
민영익의 난
민영익의 난
대원군은 여백을 살리고 화면 한쪽에 한떨기 춘란(春蘭)을 즐겨 그렸다. 난은 섬세하고 동적이며 칼날처럼 예리하다. 특히 줄기가 가늘고 날카롭다. 뿌리에서 굵고 힘차게 시작하지만 갑자기 가늘어지고 끝부분에 이르면 길고 예리하게 쭉 뻗어나간다. 또 중간중간 각을 이루며 반전을 거듭한다.
반면 민영익의 난초는 여백이 없다. 줄기는 고르고 일정하며 끝은 뭉툭하다. 대원군이 붓끝으로 섬세하게 그렸다면 민영익은 붓 중간으로 굵기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대원군 난은 휙휙 휘늘어지지만 민영익 난은 줄기가 뻣뻣하다. 이는 두 사람의 삶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