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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한' 시기임을 알려주는 느낌!

[중산] 2025. 6. 24. 06:45

울주군 진하 송정항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멀리서 개가 짓는다는 것

지금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

지금 어딘가에서 병사가 상처 입는다는 것

(…)

달팽이가 기어간다는 것

사람은 사랑한다는 것

당신 손의 온기

생명이라는 것

 

- 다나카와 슌타로, 「산다」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인들은 대상을 붙잡고 피를 빠는 흡혈귀다. 이 무슨 끔찍한 소리인가? 시인들은 느낌과 의미라는 피를 흡혈한다. 시인들은 맹수가 약한 짐승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고 구멍을 낸 뒤 피를 빨아대듯이 이 의미를 흡혈한다.

 

시인들은 흡혈하되 대상들을 죽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죽은 것들에 생명을 주고 피를 돌게 한다. 시는 “산다”는 것에 대한 호응, 생명의 맥동에 대한 반향하는 리듬, 죽은 언어들에 숨결을 되돌려주는 일이다.

 

시는 본질에서 무용하다. 우리는 기껏해야 시에서 하나의 이야기, 단말마 같은 자아의 외침들, 체험의 단면들, 아니 그것들에 묻은 피의 흔적을 구할 따름이다.

 

시는 의미화에의 의지가 아니라 존재에의 의지에 의해 더 강한 탄력을 얻는다. 의미 과잉의 태도는 종종 시를 망친다. 좋은 시인들은 의미의 영역을 덜어내고 그것을 한사코 줄이려고 한다.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태도와 시선의 영역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유의 힘’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장석주 지음, 다산북스출판>

* 장석주 : 시인. 산책자 겸 문장노동자, 서재, 도서관 정원, 대숲, 고전음악, 고요를 사랑한다. 스무살 때 <월간문학>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풍경의 탄생>,<장소의 탄생>, <들뢰즈 카프카 김훈>,<일상의 인문학>,<마흔의 서재><사랑에 대해하여>등의 저서가 있다.

 

 

 

어느 날이었다. 탄크레디는, 머리 속으로는 여전히 기다려야 한다고 했지만, 그러나 몸속의 피가 끓어올라 오늘이야말로 매듭을 짓겠다고 과감한 판단을 내렸다.

 

앙겔리는 그날 아침 요염한 악녀처럼, “나의 숫처녀를 당신에게 바치겠어요”라고, 분명히 그런 유혹을 암시하는 말들을 속삭였던 것이다.

 

여자는 머리를 풀고 자리에 누웠다. 남자는 ‘인간’을 이기고 그 가면을 벗으려 하고 있었다. 그때 교회의 우렁찬 종소리가 누워 있는 두 사람의 몸에 수직으로 내리꽂히며 방안 공기를 흔들었다.

 

웃음을 띤 얼굴로 혀가 뒤엉켰던 두 사람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 시기는 탄크레디와 앙겔리가 숙명적으로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난과 불성실과 불륜으로 점철된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나날들이었다.

 

두 사람이 노인이 되어 뒤늦게나마 사리분별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잊지 못할 무한한 그리움으로 그 시절을 돌아보곤 했다.

 

매 순간 억제하면서, 그러나 그만큼 되 솟아나는 욕망으로 유혹과 눈빛과 동의를 반복하면서도 끝내 거부했던 침대에의 유혹, 날마다 관능적 유혹을 반복하면서도 단념하고 극복함으로써, 말하자면 진실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날들이었다.

 

그 일련의 나날들은 결국 성애적인 면에서 성공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마는 결혼 생활의 예고편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결혼은 처음에는 짧지만 절묘한, 그것만으로도 완벽하게 하나가 된 완성품처럼 보였다.

 

그것은 마치 오페라 극에서 작품을 미뤄둔 채 따로 남겨진 희곡 대본 같았다. 그 작품은 서곡 단계에서는 적당한 해학과 전주곡을 통해 아름다운 멜로디를 제시했으나 더 이상 조화롭게 전개되지 않은 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

 

<‘표범’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최명희님 옮김, 동아출판> *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1893~1957): 양 시칠리아 왕국에서 대대로 재상을 역임한 가문에서 태어나 외동아들로 자랐다. 1915년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군에 소집된다. 전장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헝가리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뒤 중위로 다시 군복무를 했다. 시칠리아 섬으로 돌아간 후 외국문학 연구에 전념했다. <표범>은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가와 함께 출판된 후 1959년 스트레가상을 수상하고 각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우울은 다양한 증상으로 발현된다.

 

떨어진 집중력, 어마어마한 불안감,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심박수, 공황발작, 많이 자도 늘 피곤한 느낌,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통증, 산더미처럼 쌓인 일들 가운데서 느끼는 두려움과 공허,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무기력, 고마운 이들에게 감사편지 한 장 쓰기 힘든 상태 등이다.

 

저자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조울증을 겪었던 아버지를 떠올리지만 우울을 유전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대신 이주민으로서 아버지의 삶과 조울증을 아메리칸 드림과 연결해 생각한다.

 

우울이 사회적 압력이나 폭력의 역사에 대응하면서 생긴 흔적이라면, 우울을 말하고 이해하는 다양한 이야기가 우울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항우울제와 심리상담 외에 우리에겐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우울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하는 신호로 생각하게 해주는 다양한 자원들을 찾아내는 것 역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현재의 치료 문화와 뇌 과학은 우울증이 어릴 때 또는 언젠가 일어난 나쁜 일 때문이라거나 어린 시절 “상처 입은 내면아이” 때문이라거나, 호르몬 탓(생화학적 장애이거나 유전자적 불운)이라고도 설명한다.

 

저자는 또 항 우울제 혁명은 “과학의 혁명이 아니라 마케팅의 혁명”이며, 약물로 우울을 해결하는 시장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한다.

 

현재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사회구조가 식민주의, 노예제도, 집단학살 등 폭력의 역사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 습관의 유토피아

 

수공예는 창의성과 예술과 정치뿐 아니라 영성 및 의례와도 맞닿아 있다. 수공예는 종교적 묵상이나 명상과 비슷한 종류의 주의력을 요구한다.

 

손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동시에 이완도 시켜주고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다른 일에 신경을 빼앗겨도 된다. 뜨개질과 명상은 둘 다 평범한 일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우리는 따스하고 폭신한 느낌과 밝고 기분 좋은 색깔로 고통을 은폐하는 뜨개물,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강렬한 감정을 노래하는 팝송을 통해 빌런트가 “감상적 흥정”이라고 비판했던 화폐를 쓰고 싸구려 감정을 소비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때 우리는 함께 있다는 가슴 저미는 느낌, 질 돌런이 “유토피아적 수행”이라 칭하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느낌을 창조해 내고 있었다.

 

일상의 뜨개질 습관과 영적 실천, 그리고 수공예와 우울 간의 연결점은 희망, 행복, 낙관, 그리고 유토피아 같은 핵심 낱말들로 이어진다.

 

가정은 마음이 있는 곳이다. 집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는다. 우리는 크고 아름답고 감각적인 생활용품, 오래된 돌과 귀금속 질감으로 꾸민 욕실, 화려한 장식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

 

그러나 바로 그때, 가정이라는 도피처 한가운데서 작은 것들이 자꾸 사라지기 시작하고, 그 소멸이 상황에 뭔가 역동성을 부여한다.

 

우리의 마음이 집으로 끌고 들어오는 온갖 것-중독, 고독, 뭔가 부패하거나 무가치한 것들에서 풍기는 기미로 오염되는 듯 보일 때가 있다.

 

집으로 끌려오는 것들의 목록에 우울을 보탤 수 있겠다. 캐슬린 스튜어트는 가정의 안락함을 느낌의 기만적 구조라고 기술한다. 

 

가정의 안락함은 나쁜 느낌을 차단해주는 완충제이긴 하지만, 우울이 만연해 있다는 점이 암시하는 바대로 나쁜 느낌, 즉 내부에서건 외부에서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에 쫓기는 환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01년 9∙11테러와 전쟁과 인종 폭력 같은 실제 사건뿐 아니라, 선정적인 사건들에 의해 종종 구멍이 뚫린다. 그러나 가정에는 더 낮은 수준의 근심과 불안, 그리고 사람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들어 결국 코앞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는 상태에 빠뜨리는 일상적 스트레스도 만연해 있다.

 

우울이 가정과 엮여 있는 이유는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이며, 우울은 도처에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이 주권적 행위주체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들을 지나치게 많은 할 일(혹은 지나치게 적은 일)로 끊임없이 짓누르는 문화의 은밀한 영향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중산층에 속하는 주체들에게 적용된다. 물론 중산층의 출세 지향적인 궤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미첼의 <근심거리와의 전쟁>은 가정의 근심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섬처럼 고립되어 존재하는 가정의 성격 때문임을 시사한다. 

 

가정은 다른 (더 큰) 근심거리들과 다른 (더 생생한)전쟁을 막아주는 완충제이기도 하지만, 그런 문제에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하는 이중적 역할을 하며 가정의 이런 이중성을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이 가정의 근심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때로는 느낌이 힘을 충분히 축적하면 누군가는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버려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타나기도 한다. 청년들, 대부분 남성 청년들이 총기를 구해 타인이나 자신을 죽이는 이야기 - 버지니아공대(2007), 노르웨이 여름캠프(2011년) - 가 그러한 사례들이다.

 

내 친구 낸시가 우울을 돌파하기 위해 세운 핵심 계획은 두 가지다. (1) 계속 움직인다. (2) 타인을 돕는다.

 

저자는 우울이 “몸의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며”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달라는 마음의 소리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한” 시기임을 알려주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우울 아카이브 : 습관

 

하루가 끝날 때 나는 생각한다.

내가 작업을 하는 목적은 나의 역사적 현재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내게는 그 점이 매우 중요하다.

나 자신만의 순간을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

다른 어떤 종류의 세계적 의미도, 당신에게 띠는 의미도,

다른 누구의 의미도 아닌 내게 지금 현재가 띠는 의미가 중요하다.

오랜 시간 동안 나 자신을 위한 우주론을 어떻게든 생산하려

노력하지 않을 때 나는 괴롭다. -그레그 보도위츠.<습관>

 

영적 실천(혹은 신성한 일상)

 

내가 영적 실천을 일상 습관의 유토피아의 한 형태로, 그리고 정치적 우울에 대한 가능한 대응책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일부 독자들은 분명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수많은 학자들이 단호히 세속주의를 고수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붙잡을 수 있는, 내 손안의(비유가 아닌)말 그대로의 실체”로서 기도나 영적 수행은 대개 아주 평범한 형식의 지속, 할 수 없는 것이 많은 상황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믿음이나 희망의 작은 몸짓이다.

 

영적인 문제를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영적 실천 개념을 탈신비화할 방법이 많다. 영적 실천을 일상의 습관이나 창조적 실천이라는 더 세속적 범주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편이 이를 이해하기 더 쉬운 방법일 수 있다.

 

영적 실천은 체현이나 물리적 차원을 지닌 의례의 형식- 촛불켜기, 주문 암송하기, 침묵 속에 앉아 있기-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감각과 정동의 관점에서도 얼마든지 기술할 수 있다.

 

나는 황홀경 따위 믿지 않아

하늘을 날고 싶지 않아

친구들을 모조리 뒤에 버려두고

인류에게 등을 돌린 채 말이야.

왜 우리는 이 땅에 머물며 잘 살 수 없는 것일까?

- 그레천 필립스.<황홀>

 

<‘우울 : 공적 감정’P478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앤 츠베트코비치지음, 박미선/오수원님 옮김, 마티출판> * 앤 츠베트코비치 : 텍사스대학교 오스틴 캠퍼스 여성학 및 젠더∙ 섹슈얼리티 연구 교수. 캐나다 온타리오주 오타와의 칼턴대학교 페미니즘 사회변화 연구소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복잡한 느낌들>,<느낌의 아카이브>의 저서가 있다.

 

진하해수욕장의 명선도와 명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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