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로지기가 직업인 틸, 그는 그저 평범하고 선량하며 직무에 충실한 소시민이었다. 바로 그 사건이 생기기 전까지는. 전처가 죽은 후 맞이한 두 번째 부인은 그가 원했던 대로 씩씩한 일꾼이자 가정주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사납고 거칠며 상스러운 또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틸은 그런 아내에게 종속되어갔다. 그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자신의 삶을 견디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내가 전처의 아들인 토비아스를 학대하는 것을 묵인해야 하는 것만큼은 그에게 큰 고통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의 무관심과 부주의 때문에 토비아스가 사고를 당했다. 그가 매일 지키고 있던 바로 그 선로 위에 떨어져 기차와 충돌한 것이다. 토비아스는 죽고 틸은 아내에 대해 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 ‘응징의 벌’이 내려져야 함을 깨달았다. 그는 마침내 직접 그 일을 실행하려 하고,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는데...(요약)
어떤사람들? 무슨 이야기?
틸 한적한 역의 철로지기. 선량하며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지만 아들의 죽음을 보면서 참았던 분노가 폭발한다.
민나 틸의첫번째부인. 결혼한 지 2년만에 죽지만 틸과 정신적인 교감을 계속나눈다.
레네 틸의 두 번째 부인. 건장한 체구와 거칠고 사나운 성격을 지녔다. 전처의 아들을 학대하고 사건의 동기를 부여하는 인물
토비아스 틸의 아들. 계모로부터 학대를 받다가 사고를 당하는 불행한 운명을이지녔다.
잘못된 소망
한적한 시골 마을의 기차 건널목, 틸은 여러 해 동안 여기서 철로지기를 하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에 맞춰 횡목을 내리고 올리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 매일 거의 똑같은 일과가 반복되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고 이곳에 애착을 느꼈다. 건장한 체구를 가졌지만 선량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 그의 첫 번째 부인은 민나라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가냘프고 여린 모습을 지녔다. 그래서 두 사람의 겉모습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요일마다 교회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이들의 모습은 어딘지 조화롭게 보였다. 그런데 결혼한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틸은 혼자 그 자리에 앉아야 했다. 몸이 약했던 부인은 아이를 낳은 후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틸의 모습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아내의 죽음을 그다지 슬퍼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생각을 증명이나 하듯이 그는 1년 후 재혼을 결심했다. 그의 두 번째 부인 레네는 소젖을 짜던 여인으로 퉁퉁하고 튼튼한 여자였다. 틸이 재혼을 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처의 아들 토비아스를 제대로 돌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일 잘하고 가사를 돌볼 씩씩한 여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틸의 이러한 소망이 부분적으로 충족된 것은 사실이었다. 레네는 생활력이 강했고 살림도 잘 꾸려갔다. 그러나 그외의 다른 모습들은 틸에게 실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거칠고 사납고 상스러웠으며 동물적인 정욕을 지닌 여자였다.
결혼 생활이 6개월쯤 지나자 주위의 사람들도 레네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고, 틸을 측은하게 여겼다. 그러나 당사자인 틸은 이런 아내를 그저 참고 견디었다. 어찌 보면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무기력하게 아내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들 토비아스에 관한 일만큼은 나름대로 뜻대로 밀고 나가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마저도 아내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활을 계속하는 틸에게 작은 탈출구는 그가 일하는 선로 구역과 그곳에 있는 막사였다. 그곳에는 우악스러운 아내도 없었고 자기만의 세상이 있었다. 틸은 이곳을 전처와 교감할 수 있는 성스러운 장소로 정해놓기도 했다. 마을에서 동떨어져 인적조차 드문 이곳에서 그는 환상과 상상 속에서 죽은 아내와 만났다. 때로는 성경 읽고 찬송가를 부르는 신앙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발육이 늦었던 불쌍한 토비아스는 돌이 되어서야 겨우 걸음마를 배웠고 말을 배우면서 아빠를 특히 잘 따랐다. 그러자 덤덤하던 아빠의 정도 되살아나 틸은 아들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토비아스의 고통스러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계모인 레네는 틸이 그럴수록 토비아스를 점점 더 미워했으며, 자신의 아이를 낳은 후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아버지와 아들
6월의 어느날 틸은 밤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집으로 돌아왔다. 퇴근한 남편을 보자마자 레네는 불평해대기 시작했다. 그동안 요긴하게 사용했던 감자밭을 반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감자를 돈주고 사먹어야 될 지도 모른다며 틸의 무능함을 탓했다. 틸은 이런 소리를 듣는둥 마는둥 자고 있는 토비아스에게 갔다.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아이의 뺨에 시퍼런 손자국이 있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식사를 하면서 틸은 아내에게 막사 근처에 있는 밭 한 도막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너무 외진 곳이라 선로감독원이 그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이 말에 레네는 매우 기뻐하며 흥분했다. 틸은 식사 후에 잠시 눈을 붙이고는 토비아스를 데리고 강으로 갔다. 강가에 앉아 아버지와 아들은 여러 가지 놀이를 했다. 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렇게 토비아스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재미있는 놀이도 하고 간단한 것을 가르쳐주는 일을 즐거워했다.
오후가 되자 틸은 출근 준비를 했다. 마을과 떨어져 있는 막사로 가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 소나무 숲을 통과해야 했다. 소나무 숲을 지나던 틸은 갑자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늘 가져오던 빵을 잊고 왔던 것이다. 그는 잠시 서서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시 집 쪽으로 방향을 돌려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땀을 흘리며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조용한 마을을 깨우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의 귀청을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는 바로 그의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창문 가로 다가갔다. 여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아니, 뭐! 이 인정머리 없는 것아, 갓난애가 배가 고파 울도록 만들어야겠어? 어디 너 오늘 혼 좀 나봐라!” 그리고 말소리가 끊기더니 뭔가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다시 심한 욕설이 이어졌다. “너 같은 놈 때문에 내 아이를 굶기란 말이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틸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무거운 눈빛은 땅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굳은 살이 박힌 거친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는 순간적으로 어떤 전율을 느꼈다. 그러나 그 전율이 지나가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천천히 현관 쪽으로 돌아갔다. 그때 다시 화가 치밀어 내지르는 소리와 침 뱉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틸이 들어섰다. 레네는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분노를 삭이지 못해 얼굴이 하얗게 되었고, 이것저것을 만지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침내 남편에게 어째서 이 시간에 집에 왔는지를 물었다. 설마 자신을 엿보려던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뭐라 해도 자신은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도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틸은 레네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울고 있는 토비아스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순간적으로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엇인가를 참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냉정함을 되찾았다. 아내도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씩씩거리는 가슴과 걷어 올려진 치마 밑으로 보이는 엉덩이 때문에 그녀는 선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틸은 이런 아내에게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묶인 것 같았다. 그는 단지 난로 가에 있는 의자에 두고 갔던 빵을 집어들고 그것을 아내에게 내보였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말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방 한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있던 토비아스는 젖은 눈으로 그런 아빠를 바라보았다.
죄의식
틸은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조금 지각을 했다. 교대자는 이미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악수를 한 후 간단히 인수인계를 하고 헤어졌다. 교대자는 틸이 걸어온 길을 따라 점점 멀어져갔다. 외떨어진 이곳에 이제는 틸 만이 남게 되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온 틸은 그의 취향대로 방을 정리했다. 거의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도 그의 머리 속은 방금 전에 목격했던 장면으로 가득 차있었다. 방 정리가 거의 끝났을 때 전 역에서 기차가 출발했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틸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느릿느릿 건널목으로 향했다.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늘 조심스럽게 잘 살피면서 기차가 오기 전에 횡목을 내리고 기차가 지나간 뒤에는 횡목을 올리곤 했다. 틸은 건널목에 기대어 기차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철로는 좌우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그 주변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저녁 노을이 지고있었다. 소나무 숲도 철로도 불타오르듯 빨갛게 물들었다. 저 멀리 철로 끝에 보이는 작은 점이 점점 커지면서 다가왔다.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요란한 진동과 소음을 남기고 기차는 다시 멀어져갔다.
틸은 입 속으로 작게 민나를 불러 보았다. 막사로 돌아온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었다. 아니, 읽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꾸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무시하려고 해도 그런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기분을 바꾸기 위해 방에 있던 삽을 들고 선로감독원에게 넘겨받은 밭으로 갔다. 작은 밭에는 두 그루의 과일나무가 있었다. 틸의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삽질을 시작했다. 한참을 멈추지 않고 일하던 그가 갑자기 일손을 멈추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그건 안돼. 절대로 안돼.”
틸은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이제부터 레네가 밭을 일구러 여기에 자주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유일한 자유의 공간, 성스러운 공간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밭을 얻어서 생겼던 기쁨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막사로 돌아와서도 틸은 계속 그 생각을 했다.
자신이 근무하는 동안 레네가 바로 옆에서 일을 한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만의 소중한 것을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몸에서 약한 경련이 일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어두운 곳에서 커튼이 걷히듯 눈앞이 환해졌다. 마치 2년 동안 잠이 들었다 깨어난 것처럼 그동안의 여러 가지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방금 전 목격한 것처럼 아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겠는가! 그런 아이를 보호해 주지도 못하고 그저 침묵으로 묵인하며 살아온 삶이 너무도 치욕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고통스러웠다. 죄의식과 자책 속에 피로감이 짓눌러 왔다. 그리고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얼마를 그렇게 잤는지 틸은 엄청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의 모든 것이 들썩거렸고, 시간을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워져 있었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바람에 숲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는 더듬거리며 등이 있는 곳으로 갔다. 겨우 등을 찾아 불을 켰다. 엄청난 천둥과 비바람에 그는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급행열차가 올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사력을 다해 건널목으로 달려갔다. 그가 횡목을 내리자마자, 종소리가 들렸다. 틸은 비속에서 모자를 벗어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차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눈물이 빗물과 섞이며 얼굴을 적셨다. 그리고 조금 전, 꿈속에서 보았던 여러 가지 모습이 떠올랐다. 토비아스가 학대를 당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한 여자의 모습도 분명하게 떠올랐다. 어딘지 병약해 보이는 그녀는 저쪽에서 선로를 따라 다가왔다. 그리고는 틸의 막사 앞을 지나 계속 앞으로 힘겹게 걸어갔다.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가던 그녀는 걷기조차 힘들었던지 가끔 주저앉기도 했다. 틸은 그녀가 어디론가 도망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옷가지에 둘둘 만 것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죽은 아내와 매우 흡사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과 갈등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틸의 손을 거부하고 혼자 캄캄한 폭풍 속으로 계속 걸어갔다. 틸은 “민나”라고 불렀다. 그 순간 틸은 잠에서 깨었던 것이다. 그런 꿈을 회상하던 그는 마치 하늘에서 피비가 내리는 것 같은 환상을 보았다. 무서웠다. 기차가 다가오자 더욱 불안했다. 아직도 선로 위에 그녀가 있는 듯했다. 기차를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차는 지나가 버렸다.
이런 밤을 보낸 뒤 틸은 안절부절못했다. 무엇보다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토비아스를 보고 싶었다.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아들이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의 의무를 포기할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선로를 살펴 보면서, 아침 여섯 시가 되자 틸은 서둘러 교대를 끝내고 집으로 향했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제서야 어젯밤의 어두운 환상으로 인한 걱정과 불안감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러나 틸은 어딘지 달라 보였다.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레네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틸은 교회에 가서도 성경책은 보지 않고 옆에 앉은 레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점심때 평소처럼 토비아스가 아기를 안고 나가려고 하자, 틸은 아무 말 없이 아기를 토비아스에서 빼앗아 레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그 정도의 작은 변화들이었다.
어느날, 레네는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은 자신도 같이 새 밭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흙을 엎고 씨를 뿌리려면 하루가 꼬박 걸릴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도 데려가야겠다고 했다. 틸은 화난 눈빛으로 아내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고 베개 깊숙이 머리를 묻었다.
아침이 되었다. 레네는 일찍 일어나 밭에 나갈 준비를 했다. 어린 아기를 깨워 유모차에 앉혔고, 토비아스를 깨워 옷을 입혔다. 토비아스는 아빠가 일하는 곳에 가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난 후에야 틸은 일어났다. 틸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는 이 상황을 막아야 했지만 방법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레네에게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먹힐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너무도 즐거워하는 토비아스의 모습에서, 틸은 마음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함께 숲을 지나 그의 막사로 가게 되었다. 길을 걸으면서도 틸의 불안한 마음은 사실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토비아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즐겁고 활기차 보였다.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을 꺾기도 하고 날아다니는 잠자리들을 쫓아다니기도 했다.
도착하자마자 레네는 우선 밭을 살폈다. 틸은 아내의 반응이 어떨지 사뭇 두려웠다. “그래, 밭이 어떤 것 같아?” “비옥한 편이에요.” 그런 대답에, 틸은 겨우 마음이 놓였다. 레네는 가져온 빵을 후다닥 먹어치우고, 겉옷을 벗고 일을 시작했다. 거의 기계처럼 쉬지 않고 움직였다. 아기를 달래거나 젖을 먹일 때만 잠깐 허리를 폈을 뿐이었다. 틸은 막사 앞에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선로를 좀 살펴봐야겠어. 토비아스를 데리고 가겠소.” “뭐라고요? 말도 안돼요. 그럼 아기는 어떻게 해요?” 레네가 소리쳤지만 틸은 못 들은 척하며 토비아스를 데리고 갔다.
틸과 토비아스는 선로 옆에 있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토비아스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궁금한 것도 너무 많았다. 끊임 없이 아빠에게 질문을 해댔다. 특히 전신주에서 들려오는 웅웅거리는 소리에 관심을 보였다. 틸과 토비아스는 손을 잡고 걷가다가 가끔씩 멈춰서 전신주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선로를 한바퀴 점검하고 돌아오니, 레네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열차들이 쏜살같이 지나갈 때마다 토비아스는 소리를 질러대며 좋아했다. 레네조차 그런 아이의 모습에 미소를 띠었다. 틸의 막사에서 온 가족이 오붓하게 점심식사를 했다. 레네도 기분이 좋았고, 틸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는 레네에게 자신의 일과 선로에 대해 처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땅을 파엎는 작업은 이미 점심 전에 끝나 있었다. 오후에는 감자 씨를 심는 일이 남아 있었다. 레네는 이제부터 토비아스가 아기를 돌봐주어야 한다며, 아들을 데리고 나갔다. 틸은 그저 조심하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불안한 마음이 들어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토비아스가 선로에 너무 가까이 가지 않도록 잘 봐야 해!” 레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서운 사고, 그리고 분노
열차가 들어오는 종이 울렸다. 틸은 늘 그렇듯이 약속된 위치로 가서 준비를 했다. 저쪽에서 열차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갑자기 귀가 찢어질 듯한 기적소리가 울려 펴졌다. 틸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브레이크를 잡는 거지?” 다시 한번 급박한 기적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붉은 기를 내밀었다. 선로 위에 어떤 물체가 있었다. 맙소사! 그제야 틸은 선로 사이에 있는 것을 보았다.
“정지, 정지!” 그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이미 검은 물체는 기차 바퀴에 치여 퉁겨져 나갔다. 잠시 후 기차가 정지했다.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열차에 타고 있던 직원들이 뛰어내려 뒤쪽으로 달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하고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틸은 아득해진 정신을 다시 가다듬으려 애썼다. ‘정말 사고가 일어난 걸까?’
사람들이 그를 불렸다. 사고가 난 지점에서 끔찍한 아우성이 들렸다. 한 남자가 틸을 부르며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사고가 났어요.” 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비스듬하게 씌어진 모자 속에서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남자가 그를 재촉했다. “어서 갑시다.” 틸은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움직였다.
사고 현장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지만 틸의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레네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시야가 노랗게 변하더니 저만큼 피로 범벅된 물체가 보였다. 토비아스였다. 틸은 말을 잃었다. 그의 얼굴은 안쓰러울 만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축 늘어진 아이의 몸은 엉망이었다. 얼굴은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 있었고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틸은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들고 있던 깃발로 아이를 감쌌다. 아이를 안은 채 그는 앞으로 걸어갔다.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철도 의무실로 데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열차 안의 객실에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다. 그러나 틸이 아이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들것을 내려놓고 한 남자가 그를 돕기 위해 남았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호각 소리가 들리고 열차는 다시 출발했다. 레네는 절규하며 몸부림쳤다. 창문으로 바라보고 있던 승객들은 레네를 가엾은 어머니라 생각했다. 그리고 열차는 순식간에 멀리 사라졌다. 틸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들것으로 옮겼다. 아이는 가쁜 숨을 겨우 쉬고 있었다. 팔과 다리는 으스러져 알아보기 힘들었다. 레네는 옆에서 미친 듯이 계속 울어댔다. 그동안의 거칠고 사나웠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명을 해댔다. 틸은 그녀에게는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로지 토비아스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가장 가까운 역으로 토비아스를 옮기기로 했다. 건널목을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야 했기에, 틸은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는 말없이 레네에게 손짓하여 들것을 들도록 하였다. 갓난아기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레네는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틸은 레네와 동료가 들것을 들고 가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그는 막사로 들어서자마자 앞으로 거꾸러졌다. 시계가 깨졌고, 그의 몸은 마비되었다. 그 순간 종이 울렸다. 종소리 덕분에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 힘을 내어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다시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에야 깨어난 그는 막사로 돌아와 깨어진 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머리 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그들은 이제 막 도착 했을 것이다. 의사가 토비아스를 진찰한다. 그리고 고개를 젓는다. “힘들겠습니다. 상태가 매우 나쁩니다. 그렇지만....” 의사는 더 자세히 아이를 살펴본다. 그리고 말한다. “역시 가망이 없습니다.” 틸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내 아들은 살아야 해. 반드시 살아야 해.”
틸은 힘겨운 걸음으로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눈빛이 이상해지면서,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기 시작했다. “여보, 거기 서! 아이를 돌려줘. 그래, 그 아이는 많은 고통을 당했어. 내가 그 여자에게 그대로 갚아 주겠어. 그러니 여보, 아이를 돌려줘, 제발.” 틸은 애걸하고 있었다. “여보, 알았어. 반드시 그 여자에게 복수를 할거야. 도끼로.. 아니 칼로... 반드시 복수를 하겠어.” 틸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때 근처 숲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틸은 그곳으로 달려갔다. 혼자 내버려진 레네의 아기가 유모차에서 발버둥을 치며 울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달려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틸은 아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 여자가 내 아들을 그렇게 만들었어. 내가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도...” “악한 계모! 잔인한 여자.” “그런데 저 녀석은 멀쩡히 살아 있다니...” 그리고 틸은 물컹한 것을 손아귀에 넣고 힘을 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때 종소리가 들리면서 제정신이 들었다. 다행히 아이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급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차하는 역이 많은 기차였다. 기차 안에는 50명 정도의 남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쩐지 엄숙한 분위기였고,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아무도 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사람들이 제일 뒤에 있던 객차에서 아이를 내렸다.
토비아스는 죽어 있었다.
그 뒤로 레네가 내렸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틸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레네는 남편을 흘낏 쳐다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시간 사이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섭기까지 했다. 들것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한참을 기다리던 기차가 막 떠나려는 순간, 틸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기차가 다시 멈추었다. 사람들이 모여 의논을 했다. 결국 기절한 틸을 들것으로 옮기기로 하고 아이의 시체는 일단 막사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사람들이 틸을 들것에 실어 마을에 들어서자, 이 불행한 사건을 들어 알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레네는 마을 사람들을 보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틸은 방으로 옮겨졌고, 레네는 계속해서 그 옆을 지키며 간호했다. 아기도 잠이 들었고, 자신도 무거운 몸으로 잠을 청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왠지 어둠이 무서워 불을 켜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그녀는 잠이 들었다.
잠시 후 남자들이 막사에 남겨두었던 토비아스의 시체를 들고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틸의 집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들은 어두운 방을 향해 레네를 여러 번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사람들이 성냥을 그어 방을 밝혔다. 그리고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사람이 죽었다!” 레네는 머리가 깨진 채 죽어 있었다. “틸이 아내를 죽였어.” 사람들이 몰려오고 소란이 일어났다. 누군가 아기 요람을 들여다보았다. “으악” 그는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기의 목이 잘려 있었다. 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한 철로지기가 틸을 발견했다. 그는 아들이 죽은 선로 위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그를 선로 밖으로 끌어내리려 여러 사람이 달려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열차까지 정지시켜야 했다. 더 많은 사람이 동원되고서야 그를 끌어낼 수 있었다. 틸은 결박되었고 경찰서로 넘겨졌다. 그리고 다시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송되는 순간에도 그는 한손에 토비아스의 작은 모자를 꼭 쥐고 있었다.
<“철로지기 틸(Bahnw rter Thiel)”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게하르트 하우프트만 지음, 글쓴이 신혜원님>
▣ 저 자 게하르트 하우프트만 Gehart Hauptmann(1862∼1946)
독일 자연주의의 거장.
결혼도 사랑도 쉬운 것은 없다.
하우프트만에게는 형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두 형들은 모두 테네만 가의 딸들과 약혼을 했다. 이에 합세하여 하우프트만도 같은 집안의 다섯째 딸 마리에 테네만과 약혼을 하고 세 형제가 나란히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베를린 근교 에르크너라는 아름다운 곳에서 지내면서 이곳 풍경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어느 결혼생활에서든 갈등의 시기가 있듯이 하우프트만도 부인과의 사이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우프트만이 배우인 마가레테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실을 아내가 알게 되면서 둘의 갈등은 심각해졌다. 그의 아내는 이런 상황을 힘들어하다가 혼자 미국에 갔지만 몇 개월 후 뒤따라온 하우프트만을 따라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한번 벌어진 틈을 다시 메우기는 힘들었다. 이혼이 합의에 이르기 전까지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건강도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내로부터 이혼 제안을 거절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혼자서 베를린으로 갔고, 거기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1904년 하우프트만과 아내 마리에는 결국 합의 이혼을 했다. 그리고 그는 성격이 밝고 활동적인 여배우 마가레트와 재혼하였다. 재혼과 더불어 생활이 안정되었고, 그는 다시 작가로서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흔히 독일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가로 소개되는 하우프트만은 시와 소설, 희곡과 서사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남겼다. 독일 슐레지엔 지방의 잘츠부룬에서 태어나서 실업학교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문학과 미술 외에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예술학교에 들어가서 조각을 배우기도 하고 예나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자연과학과 철학 등을 공부했다. 한때는 이태리 여행을 하고 나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아 조각에 몰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학에 쏠리는 열정과 관심을 억제할 수 없었다. 결혼을 한 후에도 미술을 할 것인지, 문학을 할 것인지 갈등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남긴 수많은 문학 작품은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우프트만의 초기 작품 중 가장 획기적이었던 것은 『해뜨기 전 Vor Sonnenaufgang』(1889)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문학적으로 의미 있는 평가를 받게 됐다. 그런데 이 5막으로 된 비극이 독일에서 공연됐을 당시 관객들의 반응은 두 가지 상반되는 평가로 나뉘었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열띤 지지의 목소리와 이를 비난하는 야유와 휘파람으로 공연장이 야단법석이었다.
어쨌든 그는 이 작품으로 자연주의를 이끄는 작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자연주의 작품은 관찰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정신적이거나 미적인 이상을 배격하여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과 사회의 부패상을 냉철하게 표현한다. 하우프트만의 작품들은 이런 경향과 더불어 따뜻한 인간미와 낭만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미덕을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높다.
또 한번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작품은『직조공 Die Weber』(1892)이었다. 하우프트만의 할아버지가 직조공이었기 때문이었는지 그는 1844년에 있었던 직조공들의 폭동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 분노와 동정을 함께 느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많은 자료들을 자세히 조사했다. 그러나 막상 이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자 당국의 제재를 받아 1년 이상 상연금지 조치를 당했다. 그러나 하우프트만의 의도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면 그의 작품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레싱이 말하고자 한 것은 특수한 환경 속에 있는 한 인간의 삶이었다. 이 작품은 1894년 다시 상연이 재개되었고, 그후 3년 동안 계속되면서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끊임없는 열정
나이가 들어가고 인생의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하우프트만의 작품은 자연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낭만주의와 이상주의적 경향까지 포괄하는 경향을 선보인다.『한넬레의 승천 Hanneles Himmelfahrt』(1893) 『침종 Die versunkene Glocke』(1896)등의 희곡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또한 하우프트만은 장편소설『아트란티스 Atlantis』(1912), 중편소설『조아나의 이단자 Der Kezter von Soana』(1918) 등을 통해 소설 분야에서도 굳건한 자리를 확립했다.
하우푸트만은 노령으로 쇠약해진 몸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때까지 자신의 정열을 문학에 바쳤다. 그리하여 최후의 작품인 『이피게니아』에 이르기까지 문학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문학과 함께 했던 그의 삶은 국민실러상, 노벨문학상(1912) 등의 수상으로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레싱이 후세들에게 보다 더 마음 깊이 다가오는 것은 독일의 자연주의를 독자적인 방법으로 선도해가면서 남긴 많은 작품들과 문학을 향한 그의 끊임없는 열정, 그리고 사랑일 것이다.
더재미있게읽기위하여
하우프트만의 이 작품은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그 속에는 독자를 사로잡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 간결한 문체로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함께 흥분하고 분노하게 된다. 특히 책을 덮고 난 후에도 틸의 마지막 모습이 머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다. 선량하고 평범했던 그가 왜 그런 엄청난 상황으로까지 몰리게 되었는가?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하우프트만은 그 주범이 외부환경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운명은 그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 의해 좌우된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은 당시 그가 흥미를 가졌던 자연주의의 경향이기도 했다.
폐쇄적인 인간의 파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몇 명 안되지만 모두가 정해진 틀 안에 갇혀 있는 듯한 갑갑함을 느끼게 한다. 우선 주인공 틸은 가장 뚜렷하게 그런 삶을 보여준다. 그는 첫 번째 부인을 2년 만에 잃고 전혀 다른 성격의 여자를 재혼 상대로 선택했다. 물론 전처의 아들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상처한지 1년 만에 두 번째 부인을 얻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틸의 이중적인 삶이 시작됐다. 정신적으로는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면서 육체적으로는 거칠고 상스럽지만 튼튼하고 건강한 두 번째 아내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아들이 아내에게 학대받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면적으로는 자책과 슬픔을 느끼면서도 그런 아내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삶 속에서 그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게다가 철로지기라는 직업과 한적한 마을 등 그를 둘러싼 여건이 그를 단절되고 폐쇄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폭발시키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토비아스의 죽음이었다. 그가 선택한 마지막 방법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가정을 완전히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하층민의 실상과 사회 모순 표현
두 아내, 민나와 레네는 외모적으로도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가냘프고 여린 민나. 건강하고 풍만한 레네. 민나는 레네와 대조적으로 착하고 상냥한 아내로 묘사된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민나가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즉 그녀는 틸의 환상 속에서 거의 신격화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틸이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꿈이나 환상 속에 나타나 그의 갈등을 더 악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틸이 이중적인 삶을 살고, 결국에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데 동기를 제공한 사람은 레네였다. 그녀는 생활력이 강했고 거칠었다. 그러나 동시에 성적으로 남편을 지배하고 있었다. 남편인 틸과 진정한 부부로서 가지는 공감대도 없었고, 애정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소처럼 일을 할 뿐이었다. 레네는 자기 뜻대로 집안을 휘둘렀고, 틸은 점점 집 밖에서 안식을 찾으려고 했다. 그런 레네지만 자신의 부주의로 토비아스가 열차에 치여 죽게 되자 돌연 다른 모습을 보였다.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남편이 두렵기도 했고, 자기 탓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려고 더 서럽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틸의 응징을 받아야 했다. 그녀가 자초한 결말이었을까?
하우프트만의 「철로지기 틸」은 1888년 잡지 『사회』에 실렸던 작품으로 하층민의 실상과 사회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이후에 발표된 작품들의 기본적인 모티프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사실적인 상황묘사와 사회적 색채를 띠고 있는 점은 당시 사조인 자연주의의 영향이지만, 작품 속에 녹아 있는 낭만적 요소들(가령, 전처와 꿈속에서 만나는 장면의 묘사)과 자세한 심리묘사는 하우프트만의 독자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한 인간이 개인적, 사회적 틀에 갇혀 결국 진정한 자아를 상실해 가는 모습을 본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삶이었다. 틸은 겉으로 이런 삶을 용인하는 듯했지만, 내적인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그런 갈등은 비극적인 파멸로 끝이 났지만 그것은 아마도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그런 틀이나 굴레를 느끼지도 못한 채 일상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 게하르트하우프트만의생애와작품
1862 11월 15일 독일의 잘츠부룬에서 태어났다.
1880 조각을 공부하기 위해 브레스라우 미술학교에 들어가지만 중도에 포기
1882 예나 대학에서 자연과학과 역사공부. 이때 여러 철학자들과 교수들에 의해 많은 자극을 받았
다.
1884 로마로 여행 가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감명 받아 조각에 몰두
1885 부유한 티네만가의 다섯째 딸 마리와 결혼
1888 하우프트만 부부는 베를린 교외의 에르크너로 이사. 그리고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한 「철로지기 틸 Bahnw rter Thiel」 등의 작품들을 썼다.
1889 홀츠와 슐라프 등과 사귀게 되어 그 영향으로 『해뜨기전 Vor Sonnenaufgang』 작성 10월 20일 베를린의 자유극장에서 상연되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892 『직조공 Die Weber』 발표했는데, 1년 이상 당국으로부터 상연금지를 당했다.
1894 『직조공 Die Weber』다시 상연
1896 『침종 Der versunkene Glocke』이 발표. 오스트리아로부터 그릴팔사 상을 받았다.
1902 『가련한 하인리히 Der arme Heinrich』
1903 『로오제 베른트 Rose Bernt』 발표. 리젠게비르게 지방에 새 집을 신축하여 이사
1904 아내 마리에와 합의 이혼. 마가레테와 결혼
1905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6 『그리고 피파는 춤춘다 Und Pippa tanzt』발표
1912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아트란티스 Atlantis』발표
1913 독립백년기념제에 고향인 브레스라우시를 위하여 축하극을 썼지만 시적 비판을 잘못하여 비군국주의 주창자로 오인 받아 예정된 상연이 취소됐다.
1924 평화상 수상
1928 학사원 회원에 임명
1932 『해지기 전 Vor Sonnenuntergang』 발표.
1933-38 라팔로에서 강의
1946 6월 6일 나치시대에도 자신의 고향을 너무 사랑한 탓에 독일을 떠나지 못하고 아그네텐도르프의 저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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