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기한 역설은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내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칼 로저스

어려움을 직면하고 그 실체에 이름을 붙이기
마음속으로 이름붙이기를 하면 주의가 더욱 깊어지게 된다. 그 결과, 깨어 있는 치유적인 자세로 고통스러운 감정이나 강렬한 느낌을 더 잘 마주할 수 있게 된다.
“편안히 앉아서 눈을 감고 몇 차례 심호흡을 한다. 당신이 고심하고 있는 상황이나 쟁점이 있는가?" 대인관계의 갈등이나 경제적 압박 혹은 일터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에 초점을 둘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나?” 그리고 나서 당신의 몸을 고요히 바라보라. 특히 목과 가슴, 배에 주의를 기울여보라. 그 부분에 긴장이나 압박 혹은 뜨거움이 느껴지는가?
당신의 경험을 한 단어로 표현해보자. 슬픔, 초조함, 불안, 두려움? 무엇이든 좋다. 그저 마음속에 떠오르는 단어를 알아차리고, 그 말을 속으로 부드럽게 반복해보자. 뒤섞인 여러 가지 느낌 가운데 가장 강렬한 느낌에 이름을 붙여라.
경험에 이름을 붙이고 난 뒤,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보자. “이게 옳은가? 이 단어가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나?
잠시 생각에 빠져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다. 그걸 알아차리고 나면 바로 ‘계획, 강박, 공상’ 등등의 이름을 붙이고 나서 다시 당신의 몸에 주의를 기울여라. 그러다가 어떤 강한 감정이나 느낌이 떠오르면 얼른 알아차리고 이름을 붙여라.“
삶을 미소로 감싸 안기
편안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자연스럽게 호흡하면서 몸의 긴장을 푼다. 마음속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보자. 눈가에 생겨나는 감각을 느껴보자. 이마와 눈 주위 근육을 부드럽게 이완시킨다.
마치 따뜻한 물속에 두 눈이 부드럽게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계속해서 모든 부위를 부드럽게 한다. 편안하고 환한 느낌이 느껴지는가? 붓다의 고요한 미소처럼 당신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얼굴의 긴장을 풀어보자.
턱의 긴장을 풀고, 혀끝은 가볍게 입천장에 붙인다. 눈가의 부드러운 미소와 입가의 고요한 미소를 느껴보라. 긴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미소를 가만히 지켜보라. 천천히 미소를 가슴으로 내려 보내라.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온몸으로 미소가 퍼져나가는 모습과 느낌을 상상해보라. 그 안에 어떤 느낌이 있든지 따뜻하게 열린 미소 속에 떠다니게 하라.
계속 긴장을 풀면서, 심장 속의 미소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편안함을 보내는 걸 느껴보라. 어깨를 지나 팔로, 몸통을 지나 다리 아래로 편안한 느낌이 물결치듯 흘러간다.
미소를 그리며 생겨난, 넓고 친절한 의식 안에서 편안하게 쉬어라. 만약 당신의 마음이 산만해지거나 긴장하게 되면, 당신의 마음이나 눈, 입, 가슴에서 다시 한 번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려보라!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티라 브랙 지음, 김선주/김정호님 옮김> * 티라 브랙: 임상심리학 박사이자 미국의 저명한 불교 명상가. 산타바바라 필딩 대학원에서 임상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에 워싱톤 D.C. 통찰명상회를 설립 스피릿 록 명상센터를 비롯 북미 현장에서 활동 중이다.

반항과 혁명
원리들의 혁명은 신의 대리자를 죽임으로써 신을 죽인다. 20세기의 혁명은 그 원리를 자체에 남아 있던 신의 잔영마저 죽여서 역사적 허무주의를 신성화한다.
이 허무주의가 거쳐 간 길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허무주의는 이 세기 동안 일체의 도덕적 규범을 벗어나 창조하고자 하는 그 순간부터, 그것은 카이사르의 사원을 구축한다.
역사를, 오직 역사만을 택한다는 것은 곧 반항 자체의 가르침을 거슬러 허무주의를 택한다는 뜻이다.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외치면서 비합리의 이름으로 역사에 뛰어드는 자들은 예속과 공포 정치를 만나게 되고 강제수용소의 세계에 이른다.
파시즘은 니체의 초인의 도래를 실현하고자 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아마 이런 것일 수도 저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먼저 죽음의 주인일 것이라는 사실을 파시즘은 곧 발견한다.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길 원하니, 그는 타인을 죽이고 살리는 권리를 가로챈다. 수많은 시체들과 하등 인간들의 제조자인 그는 그 자신이 하등 인간이고, 신이 아니라 죽음의 더러운 하수인이다.
한편 합리적 혁명은 마르크스의 전체적 인간을 구현하고자 한다. 역사적 논리는, 그것이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혁명의 가장 드높은 정열을 배반하고 점점 더 인간을 훼손하는 쪽으로 혁명을 이끌어가서 혁명 그 자체를 객관적 범죄로 탈바꿈시킨다.
파시즘의 목적과 러시아 공산주의의 목적을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전자는 사형집행인 자신을 통해서 사형집행인에 대한 열광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후자는 좀 더 연극적이어서, 희생자들을 통해서 사형집행인에 대한 열광을 보여준다. 전자는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은 결코 꿈꿔본 적이 없고, 다만 그중 몇몇을 해방시키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정복하고자 한다.
*후자는 그 가장 심오한 원리에 있어 모든 인간을 잠정적으로 노예화시켰다가 나중에 그들 모두를 해방시킬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에, 전자와 후자는 둘 다 도덕적 허무주의라는 같은 샘에서 정치적 시니시즘을 길어 올렸다는 점에서 수단상의 동일성을 인정하는 것이 옳다.
허무주의자들은 오늘날 왕좌에 올라 앉아 있다. 혁명의 이름으로 우리의 세계를 영도하려고 했던 사상가들은 실제에 있어 반항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동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우리 시대가 사적, 공적인 파괴 절멸 기술의 시대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혁명은 허무주의에 복종함으로써 사실 그 반항적 초심에 등을 돌린 셈이다.
죽음과 죽음의 신을 증오했으며 개인으로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없음에 절망한 인간은 인류 전체의 불멸 속에서 해방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집단이 세계를 지배하지 못하는 한, 인간이라는 종(種)이 세계 속에서 군림하지 못하는 한, 여전히 죽음의 숙명은 피할 수 없다.
이리하여 시간은 촉박해지는데, 설득에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며 우정은 끝없이 쌓아가는 노력을 요구한다. 이리하여 불멸성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로 남은 것이 공포 정치다.
인간은 혁명을 통해 군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의미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무엇 하러 군림하려 하는 것일까? 삶의 얼굴이 끔찍한 것이라면 무엇 하러 불멸을 원하는 것일까?
절대적인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혹시 자살 속에서라면 몰라도, 절대적으로 허무주의적인 사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 또한 인간을 긍정하는 행위다. 공포 정치와 강제수용소는 고독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인간이 이용하는 극단적 수단들이다.
그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필멸이라는 인간 조건을 거부하고 만인을 위한 불멸성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어느 면에서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인간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우정에 대한 무서운 굶주림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 인간이 즐거움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 그에게는 다른 인간이 필요하다.”
존재의 고통과 죽음의 고통을 거부하는 자들은 그리하여 지배하기를 원한다. “고독은 권력이다.”라고 사드는 말한다. 오늘날 수많은 고독한 자들에게 있어서 권력이란, 그것이 타인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의 필요성을 고백하는 것이다.
공포정치란 바로 증오에 찬 고독자들이 마침내 인간의 우애에 바치는 경의인 것이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 한다”라고 노예는 말했다.
그러자 형이상학적 반항이 거기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외롭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 여전히 이 외로움을 안고 산다.
형이상학적 반항은 겉모양을 가지고 존재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고 나자 순전히 역사적인 사상들이 나타나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곧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수단을 다해 존재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시대의 혁명은 일체의 도덕적 법칙 밖에서, 행동을 통해 새로운 존재를 획득하려는 하나의 시도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은 오직 역사를 위해서, 그리고 공포 정치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 혁명에 따르건대, 만약 인간이 자의든 타의든 역사 속에서 만장일치의 동의를 이룩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한계를 넘은 것이다.
반항은 우선 배반당했고 그다음에는 논리적으로 살해당했다. 반항이 그 가장 순수한 운동에 있어 변함없이 강조했던 것이 바로 그 한계의 존재, 그리고 우리 자신인 이 분열된 존재라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반항은 본래 모든 존재의 전적인 부정이 아니다. 반항은 그것이 찬양하는 존재의 다른 부분의 이름으로, 존재의 한 부분을 거부한다. 그 찬양이 절실할수록 거부 또한 더욱 가차 없다.
그다음에 현기증과 광란 속에서 반항이 ‘전체 아니면 무’로, 그리고 모든 존재, 모든 인간의 본성의 부정으로 넘어가면 이 지점에서 그것은 자기 부정에 이른다.
오직 전체적 부정만이 스스로 획득하고자 하는 어떤 전체성의 기획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공유하는 한계, 존엄성, 미의 긍정은 이 가치를 모든 사람과 사물에까지 확장할 필요성을, 출발점들을 부정하지 않은 채 통일성을 향해 나아갈 필요성을 촉발시킬 따름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항은, 그 최초의 진정성으로 볼 때, 순전히 역사적인 그 어떤 사상도 옹호할 수가 없다. 반항이 요구하는 것은 통일성이고, 역사적 혁명이 요구하는 것은 전체성이다.
전자는 더욱더 많이 존재하기 위해 창조할 수밖에 없고, 후자는 더욱더 효과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생산을 강요당한다.
역사적 혁명은 끊임없이 속으면서 언젠가 존재하게 되리라는 희망 속에서 항상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만인의 동의조차 존재의 창조에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복종하라”라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신민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죽음에 임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짐은 노예들 위에 군림하기에 지쳤노라.”
이 같은 부조리한 운명에 처하지 않으려면 혁명은 그 자체의 원리와 허무주의, 그리고 순전히 역사적인 가치를 포기하고 반항의 창조적 원천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혁명이 창조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의 광란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도덕적 혹은 형이상학적 규범을 도외시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부르주아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식적이고 기만적인 도덕에 대해 혁명은 오직 경멸을 느낄 뿐일 것이다.
그 경멸은 정당하다. 그러나 일체의 도덕적 요구로까지 이 경멸을 연장시켰다는 데서 혁명의 광적인 면이 드러난다. 그런데 바로 혁명의 기원 그 자체에, 혁명의 충동 저 깊숙한 곳에 어떤 규범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닌, 혁명의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는 규범이다.
반항은 과연 혁명을 향하여 점점 더 소리 높여 말하고 있고 또 앞으로 말할 것이다. 이 규범은 형식적인 것도 역사에 종속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가 예술적 창조 행위 속에서 그 순수한 상태 그대로의 모습으로 찾아냄으로써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이전에 다음과 같은 것을, 즉 바야흐로 역사와 씨름하고 있는 반항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 한다’와 ‘그리고 우리는 외롭다’에 추가해,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죽이고 죽일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들도 살게 해야 한다고 덧붙여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반항하는 인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알베르 카뮈지음, 옮김, 책세상>
* 카뮈는 그 이 책을 집필할 당시의 판단으로는, 러시아 공산당의 목적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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