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금욕주의적 이상이 인간에게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 안에는 인간 의지의 근본 사실, 즉 인간 의지가 지닌 공허의 공포가 표현되어 있다 :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가 필요하다. 이 의지는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는 것이다.
“한 철학자가 금욕주의적 이상을 신봉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힌트는 그 철학자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철학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 대답은 이렇다 - 이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리라 : 철학자는 최고의 가장 대담한 정신성을 추구할 수 있는 최적 조건을 바라보면서 웃음짓는다. 따라서 그는 ‘생존’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 점에서 오히려 자신의 생존을, 오직 자신의 생존만을 긍정한다. 그는 아마도 이것을 “세계가 망할지언정, 철학은 살고, 철학자도 살고, 나도 살아남으리라!”는 불경스러운 소망이 그에게서 멀리 있지 않을 정도까지 긍정하게 될 것이다……. 이 철학자들은 금욕주의적 이상의 가치에 대한 청렴한 증인이나 재판관도 아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퇴화되어가는 삶의 방어 본능과 구원 본능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한 삶은 모든 수단을 강구해 자신을 보존하려고 하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투쟁한다. 이것은 국부적인 생리적 장애와 피로가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에 대해 삶의 가장 깊은, 제 기능을 발휘하며 남아 있는 본능은 끊임없이 새로운 수단이나 착상으로 투쟁하고 있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그러한 수단이다 : 따라서 사정은 이러한 이상을 찬양하는 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며, 삶은 이 이상 속에서 그러한 이상을 통해 죽음과 싸우며 죽음에 대항하여 싸운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삶을 보존하기 위한 기교인 것이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우리에게 병든 무리의 예정된 구원자, 목자, 변호인으로 생각된다 : 이것으로 우리는 그의 거대한 역사적 사명을 이해하게 된다. 고통 받는 자를 지배하는 것이 그의 왕국이며, 그의 본능은 그에게 이 지배를 지시하고, 이와 같이 지배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가장 특이한 기교, 자신의 대가다운 실력, 자기 나름의 행복을 갖게 된다. 병든 무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과 더불어 이해하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병들어야만 하며, 근본적으로 병자나 실패자와 밀접하게 관계해야만 한다. 성직자적 실존의 가치를 가장 간결한 형식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성직자란 원한의 방향을 변경시킨 자이다.
그러나 이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진정 의사란 말인가? 우리는 그가 아무리 스스로를 ‘구원자’로 느끼고 ‘구원자’로 존경받고자 한다 해도, 그를 의사라고 부르는 것이 어째서 허용되지 않는지를 이미 이해하고 있다. 그가 싸우는 것은 단지 고통 자체일 뿐이며, 고통 받는 자의 불쾌일 뿐이지, 그 원인이나 진정한 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직자적인 치료에 대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항의임이 틀림없다. 기독교는 영민한 위로 수단의 거대한 보물창고라 불릴 수 있다.
그 안에는 많은 청량제, 진정제, 마취제가 쌓여 있는 것이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이웃 사랑’을 처방함으로써, 비록 가장 신중한 조제 분량이지만, 근본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삶을 긍정하는 충동의 자극, 즉 힘에의 의지의 자극을 처방하는 것이다. 선행을 하고, 쓸모 있게 만들고, 도와주고, 대우를 하는 이 모든 것에 수반되는 ‘가장 작은 우월감’이라는 행복은 생리적 장애자들이 좋은 조언을 받을 경우에 사용되곤 하는 가장 흡족한 위로의 수단이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자신이 지배했던 곳에서 영혼의 건강을 망가뜨려놓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또한 예술과 문학의 취미도 망가뜨려 놓았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망가뜨리고 있다.
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해보다 : 그러면 인간은,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금까지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인간의 생존은 아무런 목표도 없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이것은 해답이 없는 물음이었다. 인간과 대지를 위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 위로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류에 하나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일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보다는 낫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그 후로 더 이상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불합리나 ‘무의미’의 놀이공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 - 우선 어디를 향해,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인간이 의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을 얻은 저 의욕 전체가 본래 표현하고자 한 것은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도덕 계보학(Genealogie der Moral)”에서 일부 요약 발췌,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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