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왕룽 일가를 통해 보는 중국인의 삶과 농민들의 순박한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가난한 농사꾼 왕룽은 홍수와 가뭄 등 천재지변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돈을 모아 대지주가 된다. 땅과 흙에 대한 왕룽의 깊은 애정과 남편의 뜻을 따라 땀흘려 일하는 아내 오란, 그리고 아버지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아들들의 모습이 넓은 중국 대륙을 배경으로 펼쳐진다.(요약)
1
왕룽이 결혼하는 날이었다. 아직 어두침침한 새벽이었지만 그는 벌떡 일어나 봉창의 떨어진 종이를 뜯어버렸다. “이젠, 봄이니까 이런 건 소용없어.” 창밖에는 미풍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이제 풍년이 들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어머니 무릎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이후에 그의 벗은 몸을 본 사람이 없었는데, 이날만은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이니 깨끗이 하자는 속셈으로 평소 귀하게 사용하던 항아리의 물을 모두 가마솥에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6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아들은 아버지의 기침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물을 데웠다. 그러나 오늘 아침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여자가 오는 것이다. 왕룽은 내일부터 여름이나 겨울에도 늦도록 누워있을 수 있고, 아버지처럼 침대에서 따뜻한 물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 지난 5, 6년 동안 한 두 번도 없던 일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집안은 텅 빈 것 같았다. “새 사람에게 그따위 본을 보이면 살림을 어떻게 하니? 아침부터 차를 마시고, 목욕한다고 물을 마구 쓰고….” 아버지의 염려다. 왕룽은 아버지의 아침을 준비해 주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은전 여섯 닢과 동전 두어 줌의 돈으로 삼촌과 그의 아들인 사촌과 또 세 사람의 마을 사람을 청하기로 하였으므로 돼지고기와 생선과 과일을 사올 셈이었는데 면도를 하고 나면 돈이 모자랄 것 같았다. ‘어쨌든 면도를 해야지.’ 그가 갑자기 결심했다.
성내로 향하던 왕룽은 이윽고 황씨라는 부잣집 앞을 지났다. 거기에는 그가 아내로 맞이할 색시가 어릴 때부터 종으로 팔려와 살고 있었다. “결혼 비용이 너무나 엄청나게 들어가니 가난한 사람들은 종년밖에 더 얻을 수 있겠니?” 아버지는 황 부잣집에 찾아가 너무 젊지도 않고 또 예쁘지도 않은 계집을 달라고 사정했다. 예쁜 아내를 얻고 싶어한 왕룽의 눈치를 챈 아버지는 농사꾼의 아내로는 못난 계집이 좋다고 고집했다. 이들 부자는 얼마 전 도금한 은반지와 귀고리를 사서 황 부잣집에 약혼 예물로 보냈다. 왕룽은 색시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 색시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는 여자가 자신의 뒤를 따라올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발을 마치고 돈을 치르자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이번뿐이니 괜찮아”라고 위안하며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샀다. 두부와 향을 산 후 황 부잣집으로 걸어갔다. “저어, 이 댁의 색시를….” 문지기는 왕룽을 위협하며 돈을 달라는 눈치를 보냈다. 왕룽은 허리춤에서 장을 보고 남은 은전 한 닢과 동전 열네 푼을 내 보였다. 은전을 소매에 집어넣은 문지기가 “신랑이오, 새신랑 왔소” 하고 외쳤다. 왕룽은 들고 온 광주리에 담긴 고기와 생선을 뒤로 숨겼으나 “야, 이 사람아, 그따위 고기쯤은 이런 부잣집에서는 개도 안 먹어”라고 호통치는 문지기를 따라서 구경조차 한 적이 없는 큰 대청으로 들어갔다. 왕룽이 살고 있는 집이 스무 개나 들어갈 만큼 넓고 천장도 높았다.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이렇게 있는가?” 노부인은 아편에 취하여 왕룽에게 묻는다. “마님, 저는 색시를 데리러 왔습니다.” “오란을 어서 들라고 하거라.” 노부인이 여종에게 분부하자 얼굴이 넓적하고 키도 약간 크며 깨끗한 무명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여인을 데리고 왔다. 왕룽은 여인을 얼핏 보고 눈을 돌렸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여인이 내 아내가 될 사람이구나.’ 노부인은 오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 사람의 말에 순종하고 아들을 많이 낳아 주도록 해라. 그리고 첫 아들은 데리고 와서 나한테 보여줘야 하고.” 왕룽은 오란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거무스레한 얼굴은 곰보도 아니었고 언청이도 아니며 귀에는 그가 보낸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또 손에는 그가 보낸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는 자기도 아내가 있다는 생각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들은 집을 나와 사당이 있는 서쪽 밭길까지 죽 걸었다. 지금 왕룽이 평생을 부치고 있는 바로 그 밭들을 경작했던 그의 할아버지가 두 바퀴 수레로 손수 성내에 가서 기와를 사서 날라다가 그 사당을 지었다. 왕룽은 향을 조심스레 찾았다. 향이 부러졌다면 불길한 징조였으나 향은 부러지지 않았다. 향을 꽂고 부싯돌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두 사람의 결혼이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왕룽은 오란에게 부엌일을 맡기고, 쾌활하고 능청맞으며 언제나 허기져 있는 듯한 삼촌과 열다섯 살짜리 장난꾸러기인 사촌, 그리고 이웃 농부 세 사람을 맞이하였다. 밤이 되어 음식을 다 먹은 손님들을 보낸 후 그녀의 손목을 잡고 오늘 아침에 그가 목욕을 했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 여자는 내 색시다. 이제 일을 치러야지.’ 전신이 떨리고 흥분에 잠긴 채 여자의 몸을 껴안았다.
2
늙은이의 기침 소리는 어두컴컴한 새벽에 카랑거리며 들려왔다. “차를 끓일까요?”라고 오란이 묻자 왕룽은 당황했다. 늙은 아버지는 며느리가 첫날 아침부터 차를 넣어 가져간다면 야단할 것이다. 게다가 차를 마실 만큼 넉넉한 생활이 아니었다. “차는 그만둬. 차를 넣으면 기침이 더 심해지셔.” 그는 아내가 부엌에서 불을 지피고 물을 끓이는 동안 포근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아내가 두 손으로 보시기를 받쳐들고 들어왔다. “아버님에겐 찻잎을 넣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당신에겐….”
왕룽은 전날과 다름없이 줄곧 일을 했다. 더 이상 식사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묵묵히 일을 잘했다. 그러는 동안에 세 개의 방이 놀랄 만큼 깨끗해져서 제법 풍족한 살림 같아졌다. 오란은 말이 없었다. 꼭 해야 할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일했다. 그들의 가정을 형성하고 그들의 몸을 먹여주고 그들의 신을 이루는 이 흙. 그들의 소유인 이 흙이 거듭거듭 햇빛을 받도록 파헤치는 이 완벽한 움직임의 일치감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모든 것들이 이 흙에서 나서 다시 흙으로 변해 버린다. 그들도 지금 나란히 서서 부지런히 일하여 이 대지의 열매를 얻으려고 하지만 마침내는 다시 대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해가 지자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애를 가졌어요.” 그녀에겐 평범한 일로만 생각되는 듯했으나 왕룽에겐 큰 사건이었다 지금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도 이제 아이를 낳을 차례가 온 것이다. 이 몸에서, 나 자신의 몸에서 새 생명이 창조되는 것이다.
3
몸을 풀 날이 가까워지자 왕룽은 아내에게 말했다. “해산할 때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황 부잣집 사람 중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말하는 왕룽에게 오란은 “그 집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안돼요”라고 말한다. “전 아들을 내 품에 안고서가 아니면 그 집을 찾아가지 않겠어요. 아이에게는 붉은 저고리와 바지를 입히고 머리에는 금부처를 수놓은 모자를 씌우고 발에는 호랑이를 그린 신을 신기고, 나도 새 신발에 까만 공단으로 지은 새 저고리를 입고 내가 일하던 부엌에도 가보고 큰 마나님이 아편을 피우시는 대청에도 가서 우리 모자의 모양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겠어요.” 왕룽은 이제껏 아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은전 세 닢을 내 놓았다. “은전을 가져보긴 평생 처음이에요.” 지금까진 은전을 남에게 줄 때는 마치 자신의 살이 에이는 듯했다. 그러나 오늘만은 이렇게 주면서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해가 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들은 하루 종일 허리가 굽도록 자루가 짧은 낫으로 벼를 베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진땀이 좌르르 흘렀다. “애를 낳으려나 봐요.” “아들인가?” “아들이야?” 그는 연거푸 물었다. “아들이에요.” 그는 허공에 대고 외쳤다. “이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고, 저는 아비가 됐습니다!” 그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의 머리카락은 아직도 땀에 젖어 있고 눈시울이 푹 꺼져 있었으나 그밖에는 평시와 같았다. 그는 갑자기 생각이 나듯 중얼거렸다. “달걀을 한 바구니 사다가 빨갛게 물을 들여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줘야지. 사람들에게 아들 낳은 것을 알려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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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처음에는 기뻐했으나 곧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에는, 특히 가난한 사람에겐 행복을 방해하는 귀신이 많은 것이다. 그는 사당으로 가서 결혼하던 날 아내와 함께 향을 피웠던 것 같이 그 잿더미 위에 향을 꽂아 놓고 그것이 다 타는 것을 지켜본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 작은 사당에 모신 지신은 얼마나 엄청난 힘을 지녔던가. 왕룽과 오란은 열심히 일하여 재산을 모았다. 왕룽은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을 사람들을 대하여도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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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룻날 아침 오란은 새벽 일찍 일어났다. 왕룽과 함께 황 부잣집에 첫 아들을 데리고 갔다. 마님을 만나고 온 오란은 기다리던 왕룽에게 말했다. “그 댁엔 돈이 대단히 궁색한 모양이에요. 영감님이 땅을 팔겠다고 내놓으셨대요.” “땅을 팔아?” “그 땅을 우리가 사지.” “땅을… 그 땅을….” 오란은 말을 더듬었다. “그 땅을 내가 사겠어.” 그 부잣집에서 종노릇을 하던 그의 아내가 그 땅의 일부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시다면 사도록 해요. 작년 이맘 때 나는 그 댁의 종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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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왕룽의 소유가 됐다. “이 손바닥만 한 땅은 황 부잣집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나에게는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가.” ‘이렇게 한 뙈기의 땅은 왕룽을 분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 또 손자가 태어났어요.” 그해도 풍년이었다. 마을에서는 그를 이장으로 떠받들자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7
왕룽의 삼촌은 염려하던 대로 이 무렵부터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 해에는 황 부자의 땅을 살 작정이고 여유만 있다면 해마다 살 생각이었다. 그리고 집을 새로 지을 생각도 하게 되었다. 왕룽은 이렇게 큰 지주로서 성공할 꿈을 꾸고 있는데 게을러빠진 삼촌이 근방에 돌아다니면서 귀찮게 굴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다. 삼촌은 ‘중용’까지 들먹이며 돈을 나누어 쓰자고 닦달이다. 견디다 못한 왕룽은 돈을 가지러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서자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낳긴 낳았어요. 이번엔 계집애예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은전 아홉 닢을 꺼냈다. “빌려준다는 말은 마세요. 거저 주는 거지. 그 집에서 어디 빌려쓰는 일이 있나요.” 오란이 말했다. 가까이 있는 밭을 사려고 했으나 식구는 늘어만 가고 있다. 계획은 다음 추수까지 미루어야 했다.
8
하느님은 한번 사람과 등을 지면 다시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살려주지 않는 모양이다. 몇 달이 지나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들의 고생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인지 오란은 또 아이를 배었다. 왕룽은 해마다 앞마당에서 풍작을 이룬 곡식을 타작했지만 이제는 여러 달째 쓸모 없이 비어있는 앞마당에 멀거니 서 있었다. “다행히 곡식을 팔아서 땅과 바꾸어 두었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돈을 가졌더라면 오늘 저들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땅을 사두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다. 아무튼 땅은 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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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어먹을 하늘아!” 어느 날 굶주려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사당으로 갔다. 그리고 침을 뱉었다. 향을 피워 본 지도 이미 오랜 일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천벌을 받아도 이보다 더하려구!” 칭 서방이 해골 같은 얼굴로 다가서면서 속삭였다. “마을에선 벌써 사람의 고기를 먹고 있어. 자네 삼촌도 숙모도 먹었대. 그 댁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온 마을이 다 아는 터인데 그래도 살아서 다니는 힘이 있는 것을 보면 알 일이지.” 오란은 음식거리도 없는 부엌에 불을 지필 나무조차 없기 때문에 언제나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다. “여보, 우리 남방으로 가야겠소.” “그래요. 죽더라도 걷다가 죽게. 하지만 내일까지만 기다려 보아요. 애를 낳을 것 같아요. 배가 꿈틀거리는 모양이….” 하지만 태어난 애는 계집애였고, 곧 죽고 말았다. 왕룽은 한 줌뿐인 갓난 계집애의 시체를 땅에 두고 달려드는 늑대 같은 개를 쫓아냈다.
그에겐 동전 한 닢도 남아있지 않았다. 배고픈 것이 고통스러운 것은 처음뿐이었다. 그때가 지난 지 이미 오래다. 삼촌은 땅을 팔아 연명을 하라고 부추겼다. “난 땅은 안 팔겠소.” 그러나 왕룽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아이가 셋이나 있고 늙은 아버지도 있지 않은가. “값은 얼마나 주겠소?” 흥정하는 사이 오란의 외침이 들렸다. “땅은 팔지 않아요. 팔아 버리면 남방에서 돌아왔을 때 농사지을 땅이 없어지니까요. 대신 탁자하고 침대 두 개, 이불, 의자 두 개, 부엌에 있는 솥을 팔겠어요. 그렇지만 쇠스랑과 괭이나 호미 같은 농구는 안 팔아요. 아무튼 땅은 안 팔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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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으로 떠날 준비를 한댔자 나무 경첩에 달린 문을 꼭 닫고 쇠고리를 채우는 일말고는 할 일도 없었다. 차디찬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왔다. 아이들은 추위에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왕룽은 아이들을 달래며 말했다. “울지마라. 너희들은 둘 다 큰 어른이고, 이제 남방으로 가면 날씨도 따뜻하고 날마다 먹을 것도 있어. 모두 쌀밥을 먹게 된다. 너희들도 잘 먹을 수 있어.” 그들은 기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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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룽은 기차 안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남방 도회에는 쌀이 흔해서 아침이면 빈민 식당에서 쌀죽을 먹을 수 있다는 것과, 당장은 거적을 사서 거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일자리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으나 모두들 인력거꾼보다는 비렁질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왕룽은 기차에서 내려 거적 여섯 장을 샀다. 잿빛 석벽을 따라 거지 움막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릴 때 만들어 본 적이 있다는 오란이 거들어 쉽게 부잣집 담장을 따라 동그란 움막을 지었다. 안에 들어앉아 있으면 비바람은 넉넉히 피할 수 있었다.
“자, 빈민 식당을 찾아가자.” 배가 부르니 온몸이 노곤해지고 잠이 쏟아졌다. 이튿날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야한다고 생각한 왕룽은 오란의 의견을 물었다. “나와 아이들은 구걸을 할 수 있어요. 아버님도 할 수 있어요. 내겐 주지 않더라도 저런 백발 노인에겐 마음이 움직일 거예요.” 아이들은 구걸하는 것이 곧 장난처럼 생각된 모양이었다. “그렇게 웃으면서 굶어 죽겠다는 소리를 하다니! 바보들 같으니라구, 그렇다면 어디 굶어봐라.” 오란은 손이 아프도록 아이들을 때렸다. 왕룽은 저녁에 돈을 치르기로 하고 인력거를 끌고 거리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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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를 끌며 도시에 익숙해진 왕룽은 거리에서 연설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청년은 “우리 국민들은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교육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왕룽은 자기도 중국 국민의 한사람이지만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왕룽은 손님으로 태운 미국 여자를 통하여 청년이 가르쳐주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기가 검은 머리털과 검은 눈을 가진 민족에 속한다는 사실을.
큰놈은 훔치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솜씨가 서툴렀다. 그러나 작은놈은 점점 익숙해져서 구걸보다 훔치기를 훨씬 더 잘했다. 그런 일쯤은 오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둑질이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룽은 달랐다. “우리들은 사거나 구걸해서 얻은 고기는 먹어도 되지만 훔치는 건 안 돼. 우리는 구걸을 할 망정 도둑놈은 아니야!” 그는 작은놈이 훔쳐온 고기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러나 오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고기를 주워서 물에 씻어 다시 국솥에 넣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무튼 고기는 고긴데 왜 그래요?” 아이를 실컷 두들긴 후 움막으로 돌아가며 왕룽은 혼자 중얼거렸다. “우린 대지로 돌아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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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의 풍요함과는 별개의 세상인 가난의 밑바닥에서 왕룽은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왕룽은 아이가 쓰러지고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가 다시 쓰러지고, 노인이 끈의 끝을 잡아당기는 것을 지켜보고 서 있으면서 저녁 바람의 상큼함을 얼굴에서 느꼈다. 그러자 밭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이런 날은 밭을 갈기가 알맞은 날이었다. 듣고 있던 아버지가 말했다. “나도 내 평생에 몇 번이나 이런 고비를 당해서 고향을 떠난 일도 있었다. 나중에 돌아가 뿌릴 씨앗도 구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지.” “아버지는 언제나 고향으로 되돌아가셨어요?” “그럼. 땅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지, 내 아들아.” 아버지는 짧게 말했다. 왕룽은 더욱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무엇이든 팔 게 있다면 난 그걸 팔아서 고향으로 가겠어.” 오란이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이 딸 아이 이외에는 팔 것이 없어요.” 두 집 건너 움막에 살고 있는 사내가 말했다. “당신 저 성벽 안을 구경한 적이 있소? 난 딸을 팔러 갔을 때 본 일이 있소. 얼마나 돈이 흔한지 말해도 당신은 곧이 듣지 않을 거요. 부자가 너무 부자가 되면 반드시 변동이 생기는 법이오.” 왕룽은 되풀이 생각해 보았으나, 알 수 없는 말이었다.
14
봄은 움막촌에도 찾아왔다. “만약에 저 집 양반이 갖고 다니는 금덩이가 내 것이 되고, 허리춤에 든 은전이라든가, 그 많은 첩들이 가진 진주라든가, 그 큰마누라가 가진 보석이 내 것이 된다면….” 모여 앉은 사람들은 언제나 돈타령이었다. 그러나 왕룽은 달랐다. “만일 내가 그 황금과 은과 보석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걸로 비옥한 땅을 살 것이고, 그 땅에서 곡식을 거두겠소”라고 말하는 왕룽을 사람들은 일제히 비웃고 비난했다. 왕룽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그리움이 더해만 갔다.
“어디서 또 난리가 난 모양이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밀고 밀리는 이런 싸움을 계속 벌이는지?” 군인들은 사람들을 붙들어갔다. 왕룽은 새로운 공포로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이제는 나도 어린 딸년을 팔고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껴.” 오란은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무슨 일이 날 것 같아요.”
왕룽은 움막 속에 숨어서 몇 시간이나 군사들이 전쟁터를 향해 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내가 들은 소문대로 일이 벌어지나 봐요. 적군이 성문을 깨고 쳐들어오는 모양이에요.” 언젠가 왕룽과 이야기하던 사나이가 움막 안을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아직도 이렇게 앉아 있는 거요? 마침내 때가 왔소. 우리들을 위해서 부잣집 대문이 열렸소.” 그러자 오란은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번개처럼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부잣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끌어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왕룽 혼자였다. 그는 도망치는 매우 비대한 사나이와 마주쳤다. 겁먹은 사내가 애걸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리지요. 목숨만 살려주세요.” 돈이란 말에 왕룽은 귀가 번쩍했다. 사나이는 손바닥에 누런 금화를 꺼내놓았다. 왕룽은 금화를 가슴에 끌어안으면서 몇 번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고향으로 갈 수 있다. 내일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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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왕룽은 그의 땅에서 전혀 떠나지 않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고향을 떠나 있었다는 것은 꿈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왕룽은 그의 땅에서 혼자 살고 싶었다. “누가 내 사립문을 부수었소? 쇠스랑과 괭이를 훔쳐간 놈이 어떤 놈이요? 또 내 집 지붕을 벗겨낸 놈은 누구요?” 어떤 사람이 말했다. “자네 삼촌이 그랬네. 이 겨우내, 비적들이 자네 집에 틀어 박혀서 이 부근 마을을 노략질했지. 자네 삼촌이 도가 지나치게 그들과 친했지.” 왕룽은 그의 삼촌이 마을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 기뻤다. 왕룽은 열심히 일했다. 그의 집은 다시 새로워졌다. 오란은 임신하여 배가 불룩했다. 추수 때까지 먹고살기에 충분한 돈이 아직 그들에게 남아있었다. 곡식이 자라는 들이나 그 자신이나 모두 햇볕과 비가 알맞아 느긋한 느낌이었다. “사당에 모신 지신님에게도 향을 피워야겠다. 어쨌든 그들에게는 대지를 다스리는 힘이 있으니까.”
16
어느 날 밤 왕룽은 오란의 젖가슴 사이에서 남자의 주먹만한 단단한 덩어리가 손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덩어리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보세요.” 풀어헤치자 손바닥에 숱한 보석이 쏟아졌다. “어디서…. 어디서….” 왕룽은 말을 더듬었다. “그때 남방 부잣집에서요.” 팔아버리기 위하여 왕룽이 집어 담는데 애처로운 음성으로 오란이 말했다. “진주 둘만 줘요. 차고 다니려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갖고만 있을래요.” 그녀는 두 개의 진주를 다른 헝겊으로 싸서 젖가슴에 넣었다. 그녀는 퍽이나 만족한 표정이었다.
보석으로 황 부잣집 땅을 사기 위하여 왕룽은 황 부잣집에 갔다. 그렇게도 많은 노비들이 분주하게 일하던 이 앞뜰에 이제는 한 여인과 영감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볼일이요? 돈 이야기라구요?” 여인은 뾰족한 음성으로 물었다. “난 여자하고는 얘기를 할 수가 없소.” “이 집엔 나하고 영감님뿐이에요. 아무도 없어요.” “청지기들과 종들은요, 문지기는 어떻게 됐나요?” 여인은 귀찮은 듯이 말했다. “그 사람들은 벌써 달아나 버렸어요.” 왕룽은 이 여인과는 흥정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다시 오지요. 다음 날.”
부유한 황 부자가 몰락하였다는 것이 점점 더 괴이하게 여겨졌다. ‘농토를 허술하게 해서 그렇게 된 거야.’ 안타까운 일이었다. 문득 두 아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놀리지 말고 일을 몸에 익히게 하고 언제나 흙 냄새에 정이 붙게 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왕룽은 그간의 사정을 알아보려 찻집에 들러 주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 집엔 아무도 없지요. 남은 사람이라야 영감하고 영감님을 섬기는 척하는 뚜챈이란 종년뿐이죠. 영리한 계집이라 황 영감은 그 계집에게 노상 바보가 되고 마는 걸요.” 왕룽은 다시 되돌아가 물었다. “영감님이 땅 문서에 자기 도장을 찍을까요?” 여인이 대답했다. “찍고 말고요. 내 모가지를 걸어 놓고 맹세하죠.” “당신은 땅값으로 돈을 받겠소? 보석을 받겠소?” “보석으로 받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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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왕룽은 소 한 마리를 가진 사람이 경작하고 추수하기에는 땅이 너무 많았다. 아이들에게는 일을 시켰으나 오란은 들에 내보내지 않았다. 이제 그의 아내는 가난한 집의 아내가 아닌 것이다. “이번엔 노른자가 두 개야.” 사내아이와 계집애가 똑같이 생긴 쌍둥이였다. 왕룽은 얼마나 기쁜지 큰 소리로 한바탕 유쾌하게 웃었다. “옳지. 그래서 보석 두 개를 갖고 싶어했구먼.” 왕룽에겐 아무 근심이 없었다. 구태여 마음이 쓰이는 일이 있다면 처음 난 계집애 걱정뿐이었다. 그 애를 낳던 해 흉년으로 인해 몹시 굶어서 그런지 혹은 다른 까닭인지 왕룽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으나 그 아이는 말이 터지지 않고 천치같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 계집애를 그 때 팔았더라면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알아내고는 죽여 버렸을 거야.’ 왕룽은 딸을 팔려고 했던 일을 생각하고는 잘못을 보상하려는 듯 더욱 귀여워했다.
이 고장엔 5년에 한 번씩 흉년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땅으로부터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왕룽은 기반을 쌓아 어려운 시절이 닥치더라도 버티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 10년 간 풍년이 지속되었다. 그 덕에 새로 집도 지어 가족을 살게 하였다. 왕룽은 밭에서 일하는 대신 농사 관리와 생산물 판매에만 매달려도 바빴다. 그러나 글자를 모르는 그는 적지 않은 수모를 당한 끝에 큰아들 놈을 서당에 보내어 곡물가게에 데리고 가서 대신 쓰고 읽게 하기로 작정했다. 그 사실을 알게된 작은놈이 자기도 서당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작은놈의 고집엔 언제나 이기지 못했다. “그래, 같이 가거라. 언제 어떤 놈이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그땐 어떤 놈이든 쓰일 테니….” 훈장이 그들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형을 능언. 작은놈을 능운이라고 했다. 돌림자인 능자는 흙에서 부유함을 얻는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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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재산을 쌓은 지 7년이 되던 해에 강물이 넘쳐흘렀다. 어느 때보다도 더 심하게 사람들이 굶주렸다. 그러나 왕룽은 걱정이 없었다.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즈음에 성안에는 새로 생긴 찻집이 있었다. 그는 무료하여 찻집으로 발을 옮겼다. 무엇이든 신기로운 것을 보거나 듣거나 해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왕룽은 자주 찻집을 찾았다. “아니 왕 서방 아니오?” 뚜챈은 비웃는 뜻으로 서방이란 말을 길게 뽑았다. “이게 여자들 그림이에요. 어느 것이나 마음대로 고르세요. 제게 은전을 주시면 당장 데려다 드리죠.” “정말?” 왕룽은 깜짝 놀랐다. “돈만 조금 주면 당신 것이 될 수 있는 선녀들이에요.” “꼭 돌배나무 꽃처럼 예쁘구나.” 온 들판에 가득한 물 위에 달빛이 은빛 안개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몸 속에는 뜨거운 피가 남모르게 격렬하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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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로 불어난 물은 언제까지나 한결같이 잔잔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왕룽은 집안에 있을 때면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서 공연히 이리 저리로 왔다갔다했다. “난 누구라구…. 촌 양반이구먼.” 찻집은 휘황찬란했다. “이만하면 되오? 그래도 부족하오?” 뚜챈은 그 손바닥에 가득한 은전을 보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저 조그만 여자, 턱이 뾰족하고, 배꽃처럼 희고, 분홍빛 얼굴이 작고 귀여운 저 여자, 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저 여자가 좋은데.” 그는 그림을 바라보듯 렌화를 바라보았다. “아, 당신은 덩치만 컸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로군요. 밤새도록 여기 앉아 멀거니 쳐다보기만 할 거예요?” “난 아무 것도 모르오. 가르쳐 주오.” 그리하여 렌화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제 왕룽은 인간이 시달리는 어느 병보다도 더 심한 병을 앓게 되었다. 왕룽은 밤마다 렌화의 방에서 지냈다. “남방 사람들은 그런 원숭이 꼬리 같은 걸 달고 다니지 않아요.” 렌화가 비웃자 왕룽은 이발소에 가서 당장 변발을 잘라 버렸다. 오란은 질색하며 말했다. “당신은 목숨 같은 머리를 잘랐군요.” 집에서는 이 모든 변화를 아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주요? 갖고 있어요.” “이리 줘. 내가 쓸 데가 있어.” 오란은 쭈글쭈글한 거친 손을 품에 넣더니 조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그녀의 눈에는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왕룽은 흐뭇한 듯이 소리 죽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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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슈? 그동안 조카나 손자들이랑, 질부랑 모두 무고들 하오?” 마침내 왕룽이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낮이 지나서야 부스스 일어나서 세 번이나 거듭 하품을 하곤 구겨진 옷을 펴면서 침대에서 나온 왕룽에게 삼촌이 찾아와 말했다. “이젠 가서 네 숙모와 사촌을 데려오겠다. 우리 세 식구쯤 네가 사는 이 큰집에 와서 얻어먹고 허름한 옷을 얻어 입는다고 해도 너한테는 전혀 축이 나지 않겠지.”
숙모가 첩으로 렌화를 주선하려고 분주히 쫓아다니는 동안 왕룽은 가운뎃방 뒤에 뜰을 만들고 그 안뜰 주위에 큰 방 한 개와 작은 방 두 개를 만들게 하였다. 여름도 끝나가는 8월 햇볕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더운 어느 날 렌화는 왕룽의 집으로 왔다. 뚜챈과 렌화는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왕룽이 만든 새 안채에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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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지붕 밑에 여자 둘이 있으면 집안이 편할 날이 없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왕룽은 그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다. 오란과 뚜챈 사이에 말다툼이 생겼다. 렌화에 대한 그녀의 분노가 뚜챈에게서 분출구를 찾게 되었다. 뚜챈은 전날 당당한 황 영감의 몸종이었고, 오란은 부엌일이나 하는 종이었던 것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왕룽의 깊은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소리가 있었다. 애욕보다 더 깊은 땅에 대한 심각한 외침 소리, 그것은 그의 생활의 어떤 부분보다 가장 높은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은 그는, 입었던 두루마기를 벗어버리고 우단 신과 버선 따위도 벗어 던지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기운차게 일어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괭이는 어디 있나. 쟁기는? 보리씨를 뿌려야지. 여보게, 칭 서방! 여보게 모두들 불러 주게. 들로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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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룽이 남방에서 돌아왔을 때 그가 도시에서 받은 모든 마음의 상처를 대지가 풀어 주었듯이 이번에도 그의 비옥한 논밭은 그를 열병과 같은 애욕의 구렁에서 건져내 주었다. 흙 속에서 피어오르는 대지의 입김이 그의 몸에 배어들어 애욕의 상처를 아물게 했다. 그의 애욕의 병은 이렇게 씻어졌다. 왕룽은 오랫동안 집을 비워 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여러 가지 할 일이 한꺼번에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땅이 밭갈이를 하고 씨를 뿌려 달라고 아우성이어서 그는 매일 들로 나갔다. 이렇게 되자 한 집안에 두 여자가 있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는 사라지고 다시 자리가 잡혔다.
왕룽은 며느릿감을 구하기 시작했다. 평민의 딸을 데려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봄은 더욱 짙어가고 해는 길어지고 날씨도 더욱 따뜻해졌다. 왕룽의 장남은 갑자기 어른이 되어갔다. “나는 네 아버지야. 무슨 말이든 얘기해 봐.” 그러나 아들은 더욱 흐느끼며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그는 화가 나서 대나무 회초리로 아들을 마구 때렸다. 장남은 조그마한 잔소리에도 곧잘 울면서 이렇게 매맞을 때는 이상하게도 새파랗게 되어 상을 찡그리면서도 결코 소리를 내지 않고 매를 맞는 것이었다. 그 까닭을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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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상을 하는 유씨와 뚜챈은 서로 잘 아는 사이니까 일이 쉽게 될 거예요. 중매료를 뚜챈에게 주기로 하면 되잖아요.” 뚜챈은 돈에 탐이 나고 렌화는 새로운 사건이라서 재미를 느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조급하게 왕룽을 설득했지만 그는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였다. 큰아들이 술에 취해 쓰러지자 왕룽은 둘째 아들을 찾았다. “어제 밤에 형은 너와 같이 안 잤니?” “형이 저더러 아버지한테 이르면 안 된다고 했어요.” “말해. 말 안 하면 죽인다!” “당숙하고 같이 다닌다는 것 이외엔 몰라요.”
숙부의 아들은 장남보다 나이가 많고 또 술에 익숙해 있어서 말짱한 얼굴이었다. “그 애가 지금껏 어디에 있었단 말이냐?” “전의 황 부잣집 소유였던 안뜰에 살고 있는 여자 집에 갔었어요.” 왕룽은 황 부잣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어마어마하던 문은 열린 채였다. “양이란 여자는 어느 방에 있소?” “제발 부탁이니까, 이제부터 그 애가 오거들랑 내쫓아 줘요. 그 대신 그렇게만 해주면 내가 갑절씩 낼 테니.” “좋구말구요. 일하지 않고 돈 준다는 데야 누가 싫대요.”
삼촌은 아침을 먹는 중이었다. 그는 언제나 할 일이 없는지라 한낮까지 방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지?” 삼촌이 물었다. 왕룽은 삼촌에게 숨을 헐떡이며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는 걸 막을 수야 있나? 암내를 맡은 수캐를 암캐로부터 떼어놓을 수는 없는 거야.” 왕룽은 이 삼촌에게 온갖 괴로움을 당해 온 지난 일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흉년 들던 때에 얼마나 그에게 땅을 팔라고 졸라댔던가.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들 세 식구가 아무것도 하는 일없이 그의 집에서 잘 지내고 있지 않은가? 또 숙모는 매일매일 뚜챈이 렌화를 위해서 장만하는 비싼 음식을 같이 먹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의 아들을 유혹까지 한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밥을 먹여줄 쌀이 없어요. 더구나 게으름만 피우면서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느니 차라리 집을 불질러 태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오. 작은아버지하고 식구들, 모두들 내 집에서 나가요.” “내쫓을 수만 있다면 내쫓아 보지 그래.” 삼촌은 조용히 저고리 안섶을 내보이며 거기 붙어 있는 것을 슬그머니 보여 주었다. 왕룽은 몸이 굳은 채 장승처럼 우뚝 섰다. 왕룽은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그 붉은 수염과 천 조각은 그때 중국 서북부 일대를 약탈하고 다니던 비적단의 표적이었다. 삼촌이 다시 젓가락을 들며 킥킥거렸다. 왕룽은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 삼촌이 무슨 앙갚음을 할지 뒷일이 무서웠다. 그 동안 비적이 들지 않았던 것도 삼촌네 식구를 부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진땀이 흘렀다.
그 후 왕룽은 여러 날 동안 계속해서 들에 나갔다.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작은 구름 한 조각이 흘러왔다. 하늘을 보던 마을 사람들은 수군대며 공포에 휩싸였다. 남쪽 하늘에서 무서운 메뚜기 떼가 날아들어 농작물을 바닥낼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메뚜기 떼는 온 천하에 가득 퍼지면서 들판을 덮었다. 그래도 왕룽에겐 싸운 보람이 있어서 피해를 모면했다. 메뚜기 떼는 왕룽의 번거롭던 마음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걱정거리가 있는 거야. 나는 걱정거리를 지닌 내 삶에 힘 자라는 대로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거야. 삼촌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먼저 죽겠지. 큰놈도 어떻게 한 3년만 지나면 장가를 들게고. 아무튼 걱정 때문에 자살할 정도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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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학자가 되기 위해서 남부에 있는 도시로 가서 큰 학교에 들어가 배워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왕룽은 큰아들에게 난폭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럼 우선 밭에 가서 몸에 흙칠을 하고 오너라.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 손으로 벌어 봐.” “큰아드님은 매우 고민하는 모양이에요. 어디로 멀리 가고 싶어하는 모양입니다.” 왕룽이 격하게 렌화에게 말했다. “그 애는 여기에 못 오게 했는데 임자가 어떻게 알아?” 렌화는 당황했다.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뚜챈에게서 들었어요.”
왕룽의 생활은 다시 평온해졌다. 맏아들이 마음을 잡고 있기 때문에 만족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요.” 오란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큰아이가 자꾸 안채에 들어가요. 당신이 나가고 없으면 바로 가요.” 그날 밤 렌화의 방에 갔다. “당신한테서 땀 냄새가 나요.” 렌화는 투정을 하며 밀어붙였다. 그는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분연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옳지, 내 눈으로 봐야지.”
다음 날. “논을 보고 오겠어. 좀 늦어질 거야.” 온 식구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하고 나갔다가 얼마 후 다시 집에 들어와 안뜰로 들어가는 휘장 뒤에 숨어서 귀를 기울였다. 중얼거리는 큰아들 목소리가 들렸다. 렌화는 간드러지게 웃으면서 연방 고개를 갸웃거리며 곁눈질로 청년을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왕룽은 아들에게 덤벼들어 후려치기 시작했는데 렌화가 비명을 올리며 팔에 매달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또 다시 그녀가 악을 쓰며 달라붙자 이번에는 렌화도 사정없이 때려서 쓰러뜨려 놓고는 다시 아들을 때렸다. “좋아, 이제는 네 물건들을 모두 궤짝에 꾸려 넣고 내일 남방으로 가서 무슨 짓이든 마음대로 해라.” 가운데 방에서 오란은 옷을 꿰매고 있었다. 왕룽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뜰에서 야단법석이 났는데도 오란은 아무런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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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들은 형과는 매우 달랐다. ‘이 놈은 상인을 만들어 보자.’ 왕룽은 사돈될 유씨의 집에 갔다.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댁의 가게에 점원을 쓰실 일이 있으면 내 둘째 놈을 써 주십사 하구요.” 그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는 둘째 아들을 성내로 보내고 막내딸의 약혼서를 주고받은 뒤 지참금도 정하고 혼수와 패물 등에 대한 의논도 마쳤다. 여러 해 동안 오란과 같이 살아 온 왕룽은 이제야 처음으로 그의 아내를 생각했다. 오란에 대한 죄책감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음식을 나르거나 다른 일을 할 때도 그녀의 일거일동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전부터 배가 자주 아팠는데 또 그런 거예요.”
“이거, 참 어려운 병이오. 완쾌의 보증이 없으면 은전 열 닢, 보증이 필요하다면 은전 5백 닢을 받아야겠소.” 의원의 말을 들은 오란이 힘없이 말했다. “내 목숨에 그만한 가치는 없어요. 그런 돈이 있다면 땅을 사세요.” “난 당신이 죽는 걸 볼 수는 없소. 은전 5백을 드릴 테니 병을 고쳐주시오.” 의원은 유감스러운 듯이 말했다. “글쎄. 병자의 눈이 흰 것을 보니 내가 잘못 봤는지도 모르겠소. 완쾌를 보증하는데 은전 5천 닢이 아니고는 어렵겠소.” 왕룽은 아내를 구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고 묵묵히 의원을 쳐다보았다. 땅을 팔지 않곤 은전 5천 닢을 마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의원과 함께 밖에 나가 은전 열 닢을 주어보낸 후 어둠침침한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세월을 보낸 이 부엌, 지금은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그들은 벽을 쳐다보며 한참 동안 실컷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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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 동안 오란이 병상에 눕고 보니 왕룽과 아이들은 처음으로 그녀가 가정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았다. 왕룽은 춥고 어두운 겨울 동안 화로에 숯을 달게 지펴서 아내 침상에 놓아주었다. “미안해요. 공연히 숯을 많이 피우게 해서요.” “그런 말 말아. 당신 병을 고칠 수 있다면 땅이든 무엇이든 다 팔아도 아깝지 않아.” “그건 안 돼요. 저는 죽어야 할 몸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가고 난 다음에도 땅은 그대로 남아요.” 오란은 자신을 위하여 관을 맞추었다는 말을 듣고 안심한 듯 기뻐했다. 왕룽은 더 한층 아내에게 정성을 다했다. 간호하는 온갖 괴로움을 잊어버리려고 렌화의 방에 갔으나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렌화를 껴안고 있다가도 아내의 생각이 되살아나면 그만 팔이 풀어지는 것이었다.
어쩌다 정신이 맑아진 날 오란은 뚜챈을 불렀다. “이봐, 자네는 황 영감님 몸종으로 있을 때 예쁘다고 세도가 대단했지. 이제 나는 남의 아내가 되고 아들을 낳았지만 자네는 지금껏 종노릇을 못 면했구먼.” 발끈한 뚜챈을 돌려보내고 오니 오란이 왕룽에게 말했다.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저 여자나 저 여자의 주인을 이 방에 못 오게 해요. 내가 가졌던 옷이나 물건에 손을 대게 해서도 안 돼요. 내 말대로 안 하시면 나는 귀신이 되어 원수를 갚겠어요.” 오란은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었다. “내가 죽기 전에 큰아이를 불러서 혼사를 치르게 하세요. 당신에게는 손자, 할아버지에겐 증손자를 보게 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죽겠어요.”
왕룽은 잔치 준비를 시작했다. “황 부잣집에서 하던 것처럼 한번 잘 차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혼례로구나, 아, 혼례라. 아이들이 또 생기고 손주들이 생기고, 하하하하.” 늙은이가 좋아라 웃음을 터트리자 여러 사람들도 따라서 기뻐했다. 이윽고 잔치가 끝나고 밤이 되었다. 오란은 아들과 며느리를 곁에 불러 말했다. “이제 나는 죽어도 한이 없다. 너는 부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잘 섬기도록 해라. 그리고 며느리, 너는 네 남편과 시아버지와 시할아버지를 잘 섬겨야 한다. 또 천치 시누이도 잘 돌봐 주어야 한다. 그밖에 네가 섬길 사람은 이 집안에 아무도 없다.” “나는 못생겼어. 그래도 아들을 낳았어. 나…는 남의 종이었어. 그러나 지금 내 집에는 훌륭한 자식들이 있어. 그 인간이 어떻게 나처럼 그이를 먹여주고 보살펴 줄 수 있겠어? 예쁘다는 것만으로는 아이를 낳지 못해.” 오란은 말을 마치자 몸을 부르르 떨더니 숨을 거두었다.
그것이 오란의 임종이었다. 한번 죽음이 집안에 찾아들면 쉽사리 물러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왕룽의 아버지도 며칠 후 침대 위에 반듯이 누운 채 죽어 있었던 것이다. ‘오란과 같은 날에 매장하기로 하자. 묘터는 내 땅의 언덕진 좋은 장소를 골라 나도 죽으면 그곳에 함께 묻어 달래야지.’ 장례 행렬은 애도하고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장지로 향했다. 그 와중에 이상하게도 뚜렷한 하나의 생각이 떠올라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것은 오란이 가졌던 진주 두 개를 억지로 빼앗은 일이었다. 그건 빼앗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진주는 렌화의 귀고리가 되고 말았으니 그 귀고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나는 그 무덤에 내 삶에서 훌륭했던 처음의 절반 이상인 그 무엇을 묻었다. 나의 절반도 그 속에 묻힌 것이다. 앞으로 내 인생도 달라질 것이다….’ 왕룽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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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물이 넘치는 봇도랑을 바라보면서 왕룽은 하늘을 저주하며 말했다. “하늘도 무심하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고 굶어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건가….” 마을들은 차례로 섬이 되었다. 대지가 가뭄에 시달린 끝이기라도 하듯 맹렬한 기세로 비가 퍼부었다. 매일매일 비가 왔다. 이 해에는 수확이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굶주리고 배를 곯으며 또 다시 닥친 재난을 저주했다. 어떤 사람은 남방으로 떠나고 대담한 자들은 시골 어디에서나 창궐하는 비적단에 들어갔다. 그는 대문을 닫아걸고 낯선 사람을 집에 못 들어오게 했다. 아무리 조심한대도 이런 기근에 비적이나 무법자를 방어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렇게 지내는 것은 삼촌의 덕분이란 것을 잘 알았다. 그들은 왕룽의 신세를 지면서도 세도를 부렸다.
삼촌은 나이가 들어서 내버려두면 괜찮을 터인데 숙모와 사촌이 삼촌을 들볶았다. 왕룽은 거의 담배 맛을 보지 못하는데 삼촌은 줄곧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저것들을 여기에 그냥 두고 우리들을 괴롭게 굴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뭐 없을까?” 아들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 치들에게 아편을 먹여요. 저는 그 아들을 꾀어 성내 찻집에 데리고 가서 아편을 피우게 하겠어요. 그리고 늙은 것들에게도 아편을 사다줍시다. 그리고 그 아들놈은 제 안사람을 노리고 있어요. 그냥 두면 안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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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달콤한 연기 냄새가 가득했다. 숙부와 숙모와 그의 아들이 피우는 아편 냄새였다. 그는 아편 값에 쓰이는 은전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집안에 평화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홍수 때문에 멀리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장남은 사촌과의 갈등을 견디지 못했다. “이 집엔 숙부네 식구들이나 살게 하고 우리들은 성내에 가서 사는 것이 좋을 거예요.” “이건 내 집이야.” “성내 황 부잣집이 비어 있어요. 그 집을 빌려서 살아요. 저는 미친 개 같은 아저씨가 정말 싫어요. 저는 결코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지 않겠어요. 노름판에도 안 가고 아편도 안 피우고 아버지가 정해 주신 여자 외에는 나쁜 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어요. 제발 소원이니 이것만은 들어주세요.”
왕룽에게 번개처럼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노부인이 나를 종처럼 내려다보던 그 높은 의자에 내가 앉아서 다른 사람을 호령할 수 있다. 그럴 마음만 있으면 나도 그럴 수 있어.’ 그는 황 부잣집에 갔다. “이 안채를 전부 빌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열지 말라는 분부인데요.” “암, 이곳이 마음에 들기만 하면 내가 통째로 세를 들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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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들은 성내로 옮겨갔다. “내 거처할 방이나 마련해둬라. 맘이 내키는 날 가지. 손자 놈이 나기 전에 가지. 갔다가 또 생각나면 이리로 오고….” 왕룽이 이렇게 말한 것은 며느리가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천치 시누이를 근처에도 못 오게 했기 때문이었다. 집에 남게 된 식구는 왕룽과 막내아들과 천치 아이와 그리고 삼촌네와 칭 서방과 머슴들뿐이었다. 둘째 아들의 혼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는 동안 왕룽에게는 다시 무거운 짐을 벗을 날이 왔다. “전쟁이 벌어졌대요. 군대에 나가 볼 생각이에요. 군복과 어깨에 맬 외국제 총을 사게 돈을 주세요.” 왕룽은 사촌에게 얼른 돈을 주었다. 그 이후의 집안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숙부 내외는 밤낮 누워만 있고 성내 집에선 왕룽의 손자가 태어날 날이 가까워졌다. 이날이 가까워오자 왕룽은 성내 집에서 거처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호세를 자랑하던 황 부잣집에서 그의 처자와 며느리를 거느리게 되고, 삼대째인 손자까지 낳는다고 생각하니 감개 무량했다. 가까운 절에 다녀와 부처님과 지신님께 정성껏 축원을 하고 피로한 몸을 뉘었다.
렌화가 뚜챈에게 몸을 기댄 채 몸이 불어 뒤뚱거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손자가 태어났대요.” 왕룽도 웃음이 터졌다. 왕룽은 지나간 옛 꿈을 회상하듯, 오란이 밭에서 일하는 틈틈이 가슴을 헤치고 젖을 빨리던 정경을…. 하얗고 풍요한 젖이 넘쳐 흘러 땅에까지 흘러내리던 일들을 생각했다. 큰아들의 요청대로 대청에다 사당을 모시고 위패를 세웠다. 왕룽의 조부의 것, 그의 아버지의 것, 그리고 왕룽 자신과 장남의 이름도 사후엔 그렇게 적을 수 있도록 여유를 남겨 두었다. 칭 서방이 죽자 약간의 토지만 남겨놓고 소작을 붙였다. 그러나 그는 한 조각의 땅도 팔지 않았다. 왕룽은 셋째 아들과 천치 딸애를 데리고 성내 집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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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룽의 장남이 집을 치장하는 데 많은 돈을 들이는 것이 성내 사람들의 큰 화제가 되었다. 왕룽은 왕 서방이라고 불리지 않고 왕 대인이라든가 왕 영감으로 불려졌다. 그는 아들의 요구대로 많은 돈을 내어 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저희들이 나누어 가질 재산이 형의 자존심 하나를 살리기 위해 쓸데없이 낭비되고 있어요.” 둘째가 따졌다. 앞으로 이런 문제로 형제간에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셋째를 공부시키자는 맏아들의 의견에 왕룽은 물었다. “너는 글을 배워야한다고 네 형이 말하는데….” “예.” ‘자식들이라고 해도 내 맘대로 안 되는군. 셋째는 농사꾼으로 키우고자 했는데.’
이 집 여러 처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왕룽의 손자말고는 불만이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왕룽은 그의 아버지가 했던 대로 손자에게만 위안을 얻고 있었다. 5년 동안에 사내애, 계집애 셋을 가지게 되었다. 뜰에는 아이들의 웃는 소리와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30년만의 강추위가 찾아왔다. 바람이 온 누리에 눈을 구름처럼 흩날리게 하던 몹시도 추운 날 왕룽은 숙부의 관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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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룽은 지금껏 긴 생애를 살아오며 이곳 저곳의 전쟁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젊었을 때 남쪽 도시에서 겨울을 보내던 때말고는 직접 전쟁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북방에서 갑자기 벌떼처럼 수많은 군대가 몰려왔다. 손자와 함께 군대를 구경하던 왕룽을 군인 가운데서 누군가가 불렀다. 숙부의 아들이었다. 그도 똑같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자, 전우들, 여기서 묵게. 이 집은 부자고 내 친척이야.” 수많은 군인이 물밀 듯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둘째가 헐떡이며 말했다. “집집마다 군인이 꽉 찼어요. 어떤 사람은 아내가 누워있는 방에까지 군인이 있기에 몇 마디 했더니 그 사람을 산적꼬치를 꿰듯 칼로 찔러 버렸대요. 놈들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주는 것이 좋겠어요.” 세 사람은 침울한 얼굴로 서로 바라보았다.
왕룽의 사촌은 집안 아무 곳이나 돌아다녔다. 왕룽의 가족들이 군인들보다 무서워하는 사람은 사촌이었다. 그는 계집종들을 못살게 굴었다. 뚜챈이 의견을 말했다. “별 도리 없어요. 그 사람 마음에 드는 종을 한 사람 안겨 주는 것이 좋겠어요. 그렇지 않고는 엉뚱한 사람이 피해를 입을지 모르니….” 사촌은 렌화의 종인 리화를 원했다. “마님, 살려줘요. 저는 그 사람이 무서워요.” 왕룽은 계집애가 불쌍했다. 대신 다른 종을 보내고 난 후 조용히 리화를 끌어 일으켰다. “그 녀석의 눈에 안 뜨이도록 숨어 있어. 언제 그 녀석이 들어와 너를 달라고 할지 모르니까.” 사촌의 여종은 아이를 배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병사들은 겨가 바람에 흩날리듯 갑자기 떠나갔다. 뒤에 남은 것은 오물과 그들이 저지른 파괴의 흔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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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룽은 집안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난 후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사촌의 아이는 다행히 계집애였다. 여종이 여종을 낳았으니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시집을 보내달라고 애원했고, 왕룽은 약속했다. 칭의 밑에서 일하던 젊은이를 불러 아내로 맞도록 했다. 두 사람이 물러간 뒤 의자에서 내려온 왕룽은 이것으로써 그의 생애가 한바퀴 돈 듯했다. 양지쪽에서 낮잠이나 자고 지내고 싶었다. 벌써 예순다섯 살이다. 손자들은 콩나물처럼 자라났다. 장남에겐 열살 난 손자를 맏이로 셋이 있고, 둘째에게도 손자가 둘이나 된다. 머지 않아 셋째도 장가를 들여야 할 것이고, 그것만 끝나면 그는 그의 삶에 있어서도 더 이상 걱정거리가 남지 않아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으리라.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그렇게 생각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며느리들의 반목이 드세졌다. 그리고 안사람들의 싸움은 곧 형제간의 싸움으로 발전하기 일쑤였다. 두 가족이 기거하는 집안에는 온통 분노가 가득해서 평화가 사라졌다. 사촌으로부터 리화를 구해준 이후로 렌화와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렌화는 리화를 질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렌화가 우겨대는 대로 관심을 갖고 보니 과연 리화는 아름다운 계집이었다. 10여 년 동안 고요히 늙어가던 피가 새삼스럽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셋째가 문제를 일으켰다. 말이 없던 그는 『삼국지』, 『수호지』만 구해 읽고 모험적인 꿈에만 쏠렸다. “전 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가겠습니다.” “장가를 보내주마. 아니면 네가 좋아하는 계집종이라도 있다면….” “저는 이상이 있어요. 게다가 우리집 종은 하나같이 못생겼어요. 안채에서 시중드는 계집종만 피부가 하얗고 어린 종 이외에는.” 왕룽은 그 말이 리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이상한 질투를 느꼈다. “종년들에게 눈을 팔면 못써. 집안에서의 방탕한 행동은 용서 못한다.” 왕룽은 하염없는 슬픔과 고독을 느꼈다. 가장 분한 생각이 치받치는 일은 그의 셋째가 리화에게 눈독을 들인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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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의 어느 날 밤이었다. 무척 지루한 날이었다. 허전한 생각이 들어 뜨거운 피가 혈관 속에서 꿈틀거렸다. 셋째가 잊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리화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얘야.” 그의 말은 여기서 멈췄다. 그는 자신이 늙었고 이 아이가 손녀 뻘 같은 것을 생각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얘야. 나는 노인이다. 너무 늙었어.” “저는 노인이 좋아요…. 친절하니까.” 그는 조용히 리화를 일으켜 안아 방으로 데리고 갔다. 셋째가 알게 될까 걱정되었다.
둘째가 새 첩이 있는 것인가 살피는 눈치였다. 아들은 소문을 믿지 않았으므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리화를 바라볼 뿐이었다. 비로소 왕룽은 안심했다. 큰아들의 눈에는 노골적으로 감탄하는 표정이 담겨있었다. 셋째가 왔을 때는 벌써 밤이었다. 맞은 편에 리화가 앉아 있었다. 그는 눈알을 번득이는 표범의 자세로 웅크리고 있었다. 이윽고 힘차게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군인이 되겠습니다.” 아들은 갑자기 리화를 돌아봤다. 리화는 얼핏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두컴컴한 바깥을 보았다. 아들은 보이질 않고 사방은 정적에 싸여 어둡기만 했다. “리화야. 나는 너무 늙었다. 그건 나도 알지. 난 굉장히 나이를 먹었어.” 리화는 가렸던 손을 내리고 왕룽이 이제껏 들은 적이 없는 듯한 열정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젊은 사람은 야속해요. 저는 노인이 더 좋아요.” 이튿날 아침 왕룽의 셋째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것인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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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룽과 리화의 관계는 차차 아버지와 딸 같은 사이로 변해 갔다. 그녀는 왕룽을 위하여 천치 딸에게도 친절히 했다. 이것이 그를 대단히 기쁘게 했다. “내가 없으면 그 애는 거리에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래, 부탁이니 내가 죽거든 이 봉지의 약을 그 애에게 먹여다오. 그러면 그 애도 나를 따라오게 될 테니까.” “저한테 친절한 유일한 분이셨으니 그 불쌍한 천치를 제 아이처럼 맡아서 돌보겠어요.” 왕룽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였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는 동안 그는 늙었고 지난날 그의 아버지가 양지쪽에서 졸기만 하듯이 그도 졸고만 있었다. “내 손자가 몇이나 되지?” “사내애가 열 하나, 계집애가 여덟.” 그는 손자들에게 말했다. “학교에서 사서를 배웠겠구나.” 손자들은 경멸하듯 웃고 나서 말했다. “혁명이 일어나곤 그따위 예전 글은 안 배워요.” “아, 그래 혁명. 나는 바빠서 그런 걸 몰랐다. 농사일 하느라고 말이야.” 아이들은 킥킥 웃었다. 왕룽은 뚜챈을 통하여 장남과 차남의 소식을 들었다. 이 집안에서 뚜챈은 모르는 일이 없었다. “셋째는 혁명인가 뭔가에 대단한 장교가 됐대요. 혁명이 뭔지 난 몰라요. 무슨 장사겠지요.” 왕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듯 봄이 가고 또 갔으며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봄이 오고가는 것을 점점 희미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쇠해도 그에게 남아있는 오직 한 가지는 땅에 대한 애정이었다. 그는 묘지 안에 들어서서 그의 아버지보다는 밑에, 칭 서방보다는 위에, 아내의 묘와는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자신이 묻힐 것을 생각하니 흙 속에서 자라나서 다시 그 흙 속으로 영원히 돌아갈 자기 자신이 뚜렷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관을 마련해야겠구나.”
그는 천치인 딸과 리화와 몇 사람의 몸종을 데리고 그의 옛집인 토옥으로 돌아가 그곳에다 거처를 정했으며 성내의 집은 가족에게 물려주었다. 어느 날 장남과 차남이 찾아와 공손하게 인사하고 부근의 땅을 둘러보았다. 왕룽은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왕룽은 둘째가 조심스러운 투로 말하는 것을 엿들었다. “이 땅을 팔아서 둘이 공평히 가릅시다. 형의 몫은 제가 고리로 빌리지요. 철도가 개통되면 쌀을 해안 지방으로 보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안 된다, 못한다. 이 한심한 녀석들아, 땅을 팔다니?” 왕룽은 울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땅은 팔지 않겠습니다.” “집안이 망하는 게야. 땅을 팔기 시작하면…. 우리들은 땅을 파먹고 살아왔어. 그리고 또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야 해. 너희들도 땅만 가지면 살 수 있어. 누구라도 땅만은 빼앗을 수 없지….” 노인은 몸을 굽혀 흙을 한줌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쥔 채 중얼거렸다. “만일 땅을 파는 날에는 그것이 마지막이다.” “안심하세요, 아버지 안심하세요. 땅은 팔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노인의 머리 너머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대지”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펄 벅 지음, 소담출판사, 장왕록교수님, 장영희교수님 번역>
▣ 저자 펄 벅(1892~1973)
미국의 여류 소설가. 소녀 시절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중국 대륙에서 보내면서 중국인의 생활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3부작인 『대지』, 『아들들』, 『분열된 일가』는 중국 농민들의 생활을 간결하고 쉬운 문장으로 그려내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은 작품이다. 펄 벅은 『대지』로 퓰리처 상을 받았으며 3부작을 완성한 뒤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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