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전도서에서 자주 인용되는 “책을 많이 쓰는 것도 끝없는 일이고”라는 구절은 두 방향에서 해석된다. 하나는 뒤에 이어지는 “공부를 많이 하는 것도 몸을 피곤하게 한다.”는 구절을 같은 말의 되풀이로 보아, 도서관의 끝에 이르려는 불가능한 일 앞에서는 위축되기 마련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환희, 즉 하느님의 자비심에 대한 감사의 기도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이런 해석에서는 연결어미 ‘이고(and)'를 ‘이지만(but)’으로 바꾸어 “책을 많이 쓰는 것도 끝없는 일이지만 공부를 많이 하는 것도 몸을 피곤하게 한다.”라고 전체를 읽는다.
로빈슨 크루소는 첫 번째 방법을 선택한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를 필두로 노스럽프라이까지 그의 추종자들은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메소포타미아의 독서가부터 시작해 무수한 독서가들이 ‘육신의 피곤’에도 불구하고 ‘많은 책’을 통해 끈질기게 길을 찾아 걸었다. 또한 모든 독서가가 과거에 누구에게도 읽혀지지 않은 것처럼 신기하고 참신하며 순수하게 여겨지는 글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다.
물론, 이런 두 종류의 독서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크루소 - 경전처럼 떠받드는 책 한 권과 거들떠보지도 않는 책들로 채워진 서가를 지닌 사람 - 의 반대편 끝에는 서가에 꽂힌 모든 책을 비난하는 독서가, 즉 어떤 해석에나 반드시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는 독서가가 있다. 이런 독서가는 독서에서 책을 읽는 즐거움보다 트집거리를 먼저 찾으며, 주로 학계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기질 면에서 세관 공무원과 비슷하다. 책은 우리에게 무수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변화의 가능성, 깨달음의 가능성… 잘 쓰인 책이라도 이라크나 르완다의 비극을 덜어줄 수 없지만, 엉터리로 쓰인 책이라도 운명적으로 맞는 독자에게는 통찰의 순간을 허락할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말했다. “내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직접 겪은 경험으로 잘 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애썼던 끔찍한 불행이 막상 겪어보면 바로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었던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런 상황만으로도 스스로 빠져 있던 고통에서 다시 소생할 수 있을 때도 많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유일한 사도였지만, 그가 만난 사람들, 특히 성서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증거를 찾으시는 겁니까?”라고 대담하게 말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읽었기 때문에, 예수를 만난 적은 없었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 안에 자리 잡았다는 걸 알았다. 요컨대 글을 읽는 능력이 글에 담긴 비밀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허락하는 작은 신성(神性)을 통해, 바울은 자신이 성서, 즉 육신화된 말씀이 되었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경건한 삶을 살았던 에세네파도 똑같이 생각했다.
그들은 오래전에 남긴 사해 두루마리에서 “우리는 몸이 영원하지 않는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썩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하며 결코 소멸되지 않는 것도 안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두루마리에서 ‘영혼’이란 단어 뒤에 ‘책’이란 단어를 덧붙이고 싶다.
<“밤의 도서관”에서 극히 일부요약 발췌,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박사 번역, 세종서적>
<닭의 장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