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성의 미래: 공정한 사회
내가 볼 때 인간과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미래를 위해 유일하게 지속 가능한 대안이 될 수 있는 방법은) 공정한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모델이다. 제한 없는 자기 이익 추구나 인류 평등적인 이타주의에만 의존해서는 안정된 사회를 이룰 수 없다. 쉽사리 뒤집어지는 인간의 공정성 감각에 기댈 수도 없다. 그 대신 자기 실행이 가능한 생물사회적 계약을 지향해야 한다. 생물사회적 계약은 공정성의 세 가지 계율 (불가피한 기본 욕구와 관련한 평등성, 공로에 대한 완전하고도 공정한 인정, 비례적인 상호주의)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한 사회 유형의 첫 번째 요소는 인간의 최고 명령에 대한 완전무결한 약속이다. 이것은 내가 기본 욕구 보장이라고 일컫는 약속을 요구한다. 생물사회주의는 단순히 하이픈을 친 사회주의도 아니고 모델을 변경한 사회주의도 아니다. 생물사회주의는 전통적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로부터 좀더 생물학적인 명령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주요 이데올로기적 변화를 내포한 개념으로, 더욱 현실적이고 공정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즉, 공정성은 인간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필요한 기본 욕구에 대해 집단적인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기본 욕구 보장이란 단순히 사회 안전망을 개선해 재난 극복 능력을 향상시키자는 요구가 아니다. 이런 능력의 향상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훨씬 광범위한 의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생물사회주의의 목표는 인류가 공동으로 갖고 있는 기본 욕구의 지속적인 충족을 전반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며, 특히 다음 세대의 욕구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일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모두 고용하는 것은 미국인의 여러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가장 공정하고 품위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정한 사회 유형의 두 번째 요소에는 민간 부문의 개혁이 포함된다. 이것은 집단적 생존 조직의 기본 목표와 더욱 깊은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는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역동성과 사회적 이익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민간 부문을 규제할 권리가 있다. 무엇보다 사회 속에 뿌리내린 시장과 민간 부문의 행위는 공공 이익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가치를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기업이 벌어들이는 수익도 사실상 공로, 즉 그들이 우리 사회에 기여한 것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더욱이 이익은 “모두가 평등하게 태어난” 인간과 달리 평등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담배 회사의 수익은 명백한 부정적 사례라 할 수 있고, 투자 은행의 고위 임원들이 받은 터무니없는 보너스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소득 피라미드 구조의 최상위층을 차지하는 소수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주고 다수의 최대 행복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 오늘날 너무도 확연해졌다. 따라서 문제는 어떻게 좀더 공공 이익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재정립하느냐는 것이다.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오래된 경고를 인용하면, “대공황이 교훈을 잊을 때 우리는 다시 대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민간 부문을 늘리고 보완하고 감시하는 정부가 필요하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한 대로 공공 이익과 보편적 복지의 편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정부가 필요하다.”
공정한 사회 유형의 세 번째 요소는 상호주의의 계율과 연관된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회적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가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요청에 부응해 하원은 2009년 초 ‘에드워드 케네디 봉사단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교육과 의료, 에너지 자립, 퇴역 군인에 대한 지원 분야에 4개 봉사단을 설립하기 위해 5년 이상 기간 동안 609억 달러를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중고등학생을 위한 ‘여름 봉사’ 프로그램도 들어 있다.
이런 조치는 이제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왜 이와 같은 선례를 확대하고 평생 공익 봉사 의무제 같은 정책을 실시하지 못하는가? 이를테면 능력 있는 모든 사람에게 1년간 국가에 봉사하도록 하거나 대학학자금 지원 같은 특별한 혜택을 받은 사람이 2년간 봉사를 하게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부유한 지원자를 중심으로 봉사재단을 설립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미 수많은 교회와 시민 단체가 하고 있는 자발적인 봉사 활동을 크게 확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곳곳에서 활동하는 자율 소방대나 병원 지원 단체를 볼 때 각 지역에서 무보수로 봉사 활동을 지원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가 모두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규칙적으로 봉사 활동할 때 우리의 지역 사회가 얼마나 풍요로워질 것인지 상상해보라. 14세기의 위대한 이슬람 철학자이자 다방면에 두루 박식했던 이븐 칼둔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사회에 아무 것도 돌려주지 않고 사회에서 가져가기만 하는 사람은 도둑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지금 주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미국에서 인기 높은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던 요기 베라의 표현을 인용하면 “갈림길에 다다르면 둘 다 취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설사 실패한다 해도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여지는 있다. 남은 것은 공정한 사회로 가는 오르막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어둠이 짙게 깔리고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컴컴한 길로 계속 내려갈 것인가 하는 선택뿐이다. 이런 책임을 포기한다면 우리와 목표를 공유하지 않는 세력에게 선택권을 넘겨주는 결과가 올 것이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유명한 어록 중 하나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도덕 세계의 반원은 길지만 그것은 정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도덕이 자체의 힘으로는 기울어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사실 어떤 정치 지도자도 이것을 혼자의 힘으로 구부릴 수 없다. 공정성을 지향하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공정성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나머지 30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집단적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들려주려 했던 말은 결국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공정한 사회라는 것이다. 공정성이야말로 인간이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오래된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전쟁 상황에 빠져들 것이 확실하다.<“공정 사회란 무엇인가”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피터 코닝 지음, 역자 박병화박사님, 에코리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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