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캐서린의 죽음

[중산] 2011. 11. 11. 13:06

 

몬스터(1533~1547)

 

 

첫 번째 희생자

왕위 계승법과 성직자 복종법: 왕조의 미래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었고 엘리자베스의 탄생은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못했다. 이제 40대가 된 왕은 남자 상속자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주교 총 대리였던 크롬웰의 지시에 따라 왕위 계승법(Act of Succession)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이 법의 승인으로 인해 합법적으로 왕의 첫 번째 결혼을 무효화하고 두 번째 결혼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판결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처벌할 수 있는 방어벽도 갖추게 되었다. 왕을 위해 의회가 승인한 법은 이것뿐만 아니었다. 의회는 성직자 보호법(Act the Submission of the Clergy)을 제정해, 2년 전 헨리가 성직자 협의회로부터 받아낸 모호한 항복을 법적으로 정당하게 만들었다.

 

 

교회의 권위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헨리는 백성들이 자라면서 줄곧 지니고 있던 신앙과 관습과 생각들을 하나둘씩 폐기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가 일으킨 변화들을 옹호하게 하고 그 변화의 정당성을 믿는다고 맹세하도록 강요한 것은, 잉글랜드에서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개인의 진실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백성들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불만을 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러한 불만들은 금방 터져 나오지는 않았다. 반면 왕의 추가적인 계획들은 금방 실현되었다. 이혼을 반대하던 켄트의 수녀와 관련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거의 신과 같은 지위

캐서린의 죽음: 1536년 초, 캐서린은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킴볼턴 성에 유폐된 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딸의 방문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 청을 거절했다. 어쩌면 그는 단지 캐서린의 마지막 소원마저 거절함으로써 한때 왕비였던 그녀를 벌하겠다는 비열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물론 헨리의 현재 부인은 그의 거절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앤 불린은 캐서린과 이제 스무 살이 되어 혼기에 접어든 메리의 존재를 자신의 위치와 딸 엘리자베스의 미래, 그리고 앞으로 낳게 될 자식들의 미래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며칠 후, 나이 들고 지치고 슬픔에 잠긴 캐서린은 50세가 된 지 3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앤 불린의 몰락과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 아이러니컬하게도 캐서린의 죽음으로 앤은 더 취약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로마 교회의 시각에서 앤은 왕의 부인이 아니라 정부였고, 헨리는 부인과 사별했으니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재혼할 수 있었다. 몇 달 전부터 헨리는 앤의 시녀 중 한 명인 제인 시모어에게 공공연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앤이 임신했다는 사실에 비하면 그런 일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캐서린의 장례가 치러진 1월 29일에 앤은 유산했다. 태아는 4개월 된 아들이었다. 헨리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왕위를 위태롭게 할 마음이 없었다. 이제 그의 결혼은 전 세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인정받아야 할 일이 아니라, 골치 아픈 문제이자 위험의 근원, 그의 안전을 가로막는 벽과도 같았다.

 

 

5월이 되자 그는 행동을 개시했다. 앤은 간통 혐의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 그녀와 함께 남자 다섯 명도 기소되었다. 앤의 파멸은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고 어쩌면 그녀를 벌하고 싶어 한 남편, 그리고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해 벌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앤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때때로 발작적인 웃음이나 울음을 터뜨리곤 했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은 왕비다운 침착한 태도로 단호하게 결백을 주장했다. 5월 19일, 참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앤은 이렇게 기도했다. 나의 군주이자 주인인 왕을 구원하소서. 그는 경건하고 고결한 왕입니다.

 

 

헨리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앤이 처형된 다음날 아침, 헨리와 제인은 둘 다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고 따라서 먼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5월 30일에 결혼할 예정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이번에도 헨리는 예비 신부에 푹 빠져 있었다. 20대 후반의 그녀는 지적인 여인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신체적인 면에서 이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한때 멋진 청년이었던 왕은 이제 체중이 심하게 불어나 있었고 만성 두통과 악취 나는 궤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1536년 여름의 잉글랜드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튜더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G. J. 마이어 지음, 역자 채은진님, 말글빛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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