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 1588~1603
또 한 번의 새로운 시작
엘리자베스 시대의 개막: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언제나 매우 달랐고, 엘리자베스는 언니와 다른 길을 걷겠다는 굳은 의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집권 후 엘리자베스는 놀라울 정도로 메리와 비슷한 궤도를 따라갔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잉글랜드 국민들은 1553년, 에드워드의 복음주의 정권에 진저리가 났던 것처럼 1558년에는 메리 여왕과 스페인의 관계에 질려 있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둘 다 재위 중반까지는 국민들의 인기를 얻고 성공적인 국정 운영을 했다(메리의 경우 이 기간이 몇 달이었고 엘리자베스의 경우는 몇 십 년이었다). 그리고 집권 말기에는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엘리자베스의 경우 이 암울한 기간이 10년도 넘게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업적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녀는 아버지와 언니가 이루지 못한 두 가지 커다란 일을 해냈다. 먼저 잉글랜드의 국교가 갖춰야 할 모습, 해야 할 일, 믿어야 할 신념에 관한 문제를 정리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잉글랜드에서 볼 수 없었던 어느 정도의 내적 안정을 이뤘다. 1560년대 말부터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을 때까지, 그리고 이후로도 수십 년 동안 잉글랜드나 웨일스에서는 아주 작은 무장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장기간의 평화는 장미전쟁 이후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신하들이 이 평화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역사상 그 누구도 자신의 공적을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후계자 문제
폭풍의 핵, 여왕의 혼인문제: 새 여왕을 압박한 중대한 문제는 종교 문제뿐만 아니었다. 종교 문제만큼이나 골치 아픈 또 다른 문제가 거의 즉위 첫날부터 엘리자베스를 괴롭혔다. 튜더 왕조의 한 왕이 죽고 다음 왕이 즉위할 때마다 다시 떠오르는 문제, 바로 왕위 계승 문제였다.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후 한동안 이 문제의 해결책은 결혼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결혼 문제에 관한 논의를 피할 수 없을 때마다 점점 더 능숙하게 대처했다. 그녀가 왜 결혼에 관심이 없었는지는 심리학자가 아니어도 알 수 있다. 그녀는 참수형을 당한 왕비(캐서린)의 딸이었고, 화난 남편에 의해 처형된 또 다른 왕비(앤)와, 출산하다 죽은 다른 왕비(제인)의 의붓딸이었으며, 결혼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큰 대가를 치러야 했던 여왕(메리)의 동생이기도 했다.
재앙의 연속
비운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엘리자베스는 천연두에 걸렸다. 천연두는 현대 이전까지 세계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질병 중 하나였고 그녀는 병세가 깊어 생존을 기대할 수 없었다. 자문위원회와 궁중 관료들은 그녀가 배우자나 아이, 혹은 지정된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자신들이 얼마나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될지 그 어느 때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게서 병은 지나갔지만 흔적은 남겼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에는 심한 흉터가 생겼다. 늘 매력적이고 허영심 많았던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여인에게는 우울한 변화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문위원회와 의회가 다시 그녀에게 결혼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두 배로 잔인한 일이었다.
결국 의회는 여왕을 결혼시키려 하기보다는 여왕의 후계자를 정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엘리자베스가 훼방을 놓았다. 그녀는 자신이 후계자 선정을 거부하면 자신이 죽고 나서 나라가 혼란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일을 방해했다. 그로 인해 그녀의 사촌 메리 스튜어트의 일생은 잉글랜드 왕족 역사상 가장 극적인 (그리고 가장 비극적인) 삶으로 꼽히게 되었고, 구교의 부활을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열망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매우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메리의 비극은 터무니없게 시작되었다.
그녀에게는 다비드 리치오라는 비서장관이 있었다. 그는 과시하기를 좋아하고 자만심이 강한 작은 이탈리아인으로서, 처음에는 일자리를 찾는 악사로 메리의 스코틀랜드 궁전에 왔다. 리치오는 에든버러 귀족들과 여왕의 접촉을 제한하여 그들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메리가 난쟁이 같은 리치오와 바람이 났다고 속였다. 음모를 꾸민 사람들은 리치오를 밖으로 끌고 나와 수십 번 칼로 찌른 후 계단 아래로 내던졌다. 메리는 임신 6개월이었다. 그들도 그녀가 충격으로 조산해서 아이도 죽고 그녀도 따라 죽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해 초여름 그녀는 건강한 남자아이를 출산하고 왕가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사용한 제임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메리의 불행은 계속되었다. 메리는 보스웰 백작인 제임스 햅번(James Hepburn)과 사랑에 빠져 함께 달아났다. 몇 달 후 그녀는 신교도 귀족들의 포로가 되었다. 어린 아들을 위해 퇴위하지 않으면 처형될 것이라는 말에 그녀는 왕위를 포기했다. 그 후 메리는 쌍둥이를 유산하고, 신경쇠약에 걸렸으며, 감옥에서 탈출하고, 전투에서 패한 후, 잉글랜드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결국 그녀는 엘리자베스의 포로가 되어 그녀는 말도 안 되게 불공정한 취조를 받았다. 당시 그녀는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다.
<“튜더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G. J. 마이어 지음, 역자 채은진님, 말글빛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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