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의 삶은 평생 갈고 닦아야 할 예술 작품과 비슷하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삶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피아노를 배우고 요리를 배우고 조각을 배우듯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현대 교육은 실용적인 관점으로 성공하는 방법에 몰두할 뿐 정작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찾는 데는 소홀하다. 외적인 도전에 대한 말은 분분하지만 ‘올바른 삶’을 위한 내적 도전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행복한 삶은 향상된 외적 조건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보다 내면을 아름답게 가꿔야 하며, 삶의 본질에 대해 과감하게 묻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수천 년 동안 종교는 내면의 삶을 위한 가르침을 이어왔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외형의 규범에 치우친 나머지, 본질적인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내면의 삶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종교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 못하므로, 지나치게 경직된 이념 아래 다른 가치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로 일관함으로써 정신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점차 미약해졌다. 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를 갈구하고 있음에도 종교는 여전히 소수 신봉자나 관심을 기울일 법한 규범과 교리를 제시하기 급급했으며, 아픈 영혼을 어루만지기 위한 노력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강압적 교리에 휘둘리는 종교의 틈새를 비집고 인성을 중시하는 철학과 지혜가 눈길을 사로잡기 시작했을 때, 공자, 스피노자, 에피쿠로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면서 역사 속의 현인들은 내면의 양식과 참된 가치를 깨우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을 통찰하고 있는 현실, 즉 ‘지금 여기서 존재하는 삶’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다스리고 가치 있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며, 내면의 침묵을 통해 자신과 남을 용서한다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책은 동·서양을 망라한 철학의 사조로부터 시작해 규범의 외피를 과감하게 벗어던진 그리스도의 실존적 영성과 심층적 심리학을 바탕으로 다듬어진 개인적 성찰의 열매이다. 고통의 수렁에 갇혀 있던 나에게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준 소중한 가치들을 독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요약)
마음 비우기
카르페디엠
사람들은 과거 공간에 들어가 지난 기억을 뒤지기도 하고 미래 세계에서 자신이 꿈꾸는 상상에 잠기기도 한다. 과거는 현재를 기점으로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현재를 기점으로 다가올 시간이며, 현재만이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다면 현재는 늘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겪은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든 기록되어 삶의 역사를 구성해 놓는다. 노화 현상이나 알츠하이머처럼 치매를 일으키는 병이 아니라면 과거는 기억에 남아 현재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억압된 감정’은 자기실현과 심리적 균형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따라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혼란스러운 과거를 완화하기 위해 현재와 새로운 관점에서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해야 한다.
과거 때문에 현재의 삶이 지배당한다면 그것은 기억이 주는 추상적 이미지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사건은 피할 수 없지만 기억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피할 수 있고, 바꿀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지나치게 얽매이면 의식이 과거에 종속되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능동적일 수 없다. 또한 지나친 후회도 경계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크든 작든, 중요하든 사소하든 많은 잘못과 오류를 범했고, 또 범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일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잘못을 돌이킨다는 명목으로 과거에 얽매이거나 끌려가기보다 사실로 인정함으로써 반복하지 않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하나의 시점, 즉 현재에서 실현된다. 그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혼하고 다시 재결합한 부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유가 무엇이든 상대의 잘못 때문에 서로 이혼했을 것이다. 따라서 재결합의 경우 과거의 사건을 두 번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무너지면 결코 건강하고 조화로운 부부로 거듭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면의 트라우마나 부당한 희생양이 되었던 억울함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형식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그런 경험들이 있게 마련이고, 때로는 그 경험들이 쉽게 치유되지 않는 심각한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더욱더 시간과 더불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미련 없이 과거를 떨쳐내고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과감한 시도를 해야 한다.
현재 살아 있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때때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야 하고 후회와 불안, 몽상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던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금언을 남겼다. “네 인생의 모든 사건을 부여잡고 너 자신을 요동시키게 그대로 내버려두지 마라.(『명상록』)” ‘프로소케Prosoche’는 그리스어로 ‘현 순간에 대한 집중’이다. 이 말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헛된 집착에서 벗어나 현재를 중요시하는 삶의 자세를 의미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현재를 살아 있는 가치로 강조했으며,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유일한 영역으로 프로소케의 개념을 중시했다. ‘카르페디엠Carpe Diem’은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의 『송시Odes』에서 발췌한 것으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질투하며 사라질지니 오늘을 즐겨라, 내일을 믿지 말고….”
오직 현재의 순간이 창조적인 시간이다. 우리가 인생을 즐기고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뿐이다. 행복은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와 미래는 아름다운 감동의 근원이 될 수는 있지만 현재의 생생한 기쁨을 주지는 못한다. 여기서 현재란 지극히 짧은 단편적인 의미가 아니라 연속된 선線을 표현하는 것으로 영원을 뜻한다. 이로써 마침내 우리는 위대한 현인들이 말하는 영원한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평정과 조화, 평화가 바로 불교 선사 틱낫한이 ‘순간의 충만’이라고 부르는 행복 개념이다. 이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우리도 모르게 온몸으로 누리는 은총이다. 틱낫한은 말한다. “한 잔의 차를 마실 때도, 현재의 순간을 음미하며 과거나 미래를 잊으십시오. 찻잔에 미소를 지으며, ‘나는 지금 차를 마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조용히 잔을 기울이며 육신과 생각을 모두 내려놓은 최상의 순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움
미덕의 심층적 가치로 ‘아름다움’을 빼놓을 수 없다. 동서고금의 사상가들과 현인들은 아름다움이 내면의 삶에 부여하는 효과에 주목했다. 철학적으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나는 플라톤의 말을 자주 인용해왔다. 플라톤에게 ‘절대’ 가치는 진리, 선의, 아름다움, 즉 진선미의 세 유형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상 세계’로 자신의 영혼을 이끌기 위해 이 세 가치를 깊이 성찰하고 열망한다. 진선미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원형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관조하고 경이로운 감정을 느끼면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연에는 추함이 없다. 추함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속할 뿐이다. 더욱이 자연의 아름다움은 무상으로 주어진다. 반면,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예술 작품들은 인간의 탐욕과 만나면서 때때로 추한 모습으로 변화된다. 주변에 펼쳐진 아름다움을 보려면 무엇보다 마음을 열어야 한다.
종교에서는 ‘아름다움’을 거룩한 신성에 이르는 영적인 길로 생각했다. 고고 인류학자 에마뉘엘 아나티Emmanuel Anati는 『종교사 소론』을 저술하며 대략 45,000년 전 구석기 시대에 종교가 미적 대상에서 어떻게 발현했고 어떻게 일치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등의 동굴에 남겨진 벽화를 가리켜 ‘진정한 대성당’이라고 경외감을 담아 칭송했다. 종교는 미적 감각과 더불어 형성되었다. 완벽한 조화를 이룬 사원들은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형형색색의 꽃과 조각과 그림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서양의 예술은 종교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성장할 수 없었다. 가톨릭교회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에게 아름다운 성당 건축을 주문했다. 불교, 힌두교, 유대교, 이슬람교처럼 지리적·문화적 배경이 다른 종교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철학자인 베르그송은 예술가를 이렇게 정의했다. “예술가는 보통 사람보다 ‘잘 보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베일로 가려진 진실을 원형대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생활의 편리나 실용에 연연하지 않고, 무엇보다 현실을 굴절 없이 직시하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저주 받은’ 시인 보들레르는 종교적인 아름다움을 증오했다. 그리고 새로운 신을 경배하듯 자연을 찬양했다. 그는 자연을 ‘영원을 담아 노래하는 아름다운 사원’에 비유했다. 랭보는 이런 보들레르의 뛰어난 예술성에 감탄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하는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들레르를 손꼽았으며 ‘최초의 견자見者’라고 불렀다. 도스토예스키는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며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역자 강만원님, 창해>
▣ 저자 프레데릭 르누아르
철학자이자, 작가이자, 종교사학자로서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지성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165센티미터의 작은 키 때문에 어려서부터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렸고, 청소년기에는 갖은 몽상에 사로잡혀 가고 싶은 대학을 가지 못했으며, 직장생활에서 번번이 좌절만을 맛보며 방황했고, 오래도록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줄곧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던 그가 어떻게 삶의 대전환을 이룰 수 있었는가?
그는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에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행복은 바로 내면의 삶에서 비롯되며,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자기를 만나야 함을 힘써 말한다. 그것이 바로 ‘무지에서 벗어남’이며, 젊은 날의 아픔을 철학하는 참 이유이다. 그가 내는 작품들은 어김없이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는다. 한국에도 소개된 『이중설계』 후에 2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된 종교역사소설 『루나의 예언』은 세계적인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철학자 예수』, 『예수, 소크라테스, 붓다』, 『서양과 불교의 만남』, 『신이 된 예수』 등 철학과 종교를 아우르는 그의 저작물들은 수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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