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2/중산 담론

열정과 기질 편------간디!

[중산] 2009. 9. 3. 18:07

 

 

간디는 13살 때 결혼하여 훗날 ‘조혼의 잔인한 풍습’이라고 부를 만큼 못마땅해 하였다.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간신히 합격한 그는 규모가 적고 학비가 싼 대학에 진학했다. 오랜 친척이며 친구인 다베 조언으로 아내와 첫 사내아이를 인도에 두고 종교와 문화가 완전히 다른 영국으로 건너가서 법률공부를 하기로 한 것이 그의 인생역전이 되었다.

 

영국행은 당시에는 금기시하였는데, 힌두교 종단 수장의 단호한 반대와 벌금을 받고서도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은 여러모로 심리적인 대가를 치르게 하였지만 유럽에 정착한 엘리엇이나 파리로 간 피카소처럼 간디역시 먼 타향에서 고국을 바라보는 안목을 얻는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 처음에는 새로운 세상의 피상적인 측면에 매혹당해 멋쟁이처럼 차려입고 사교클럽에 들어갈 생각으로 프랑스어도 배웠고 댄스와 웅변술 그리고 바이올린교습도 받았다. 멋쟁이의 삶에 매혹된 시기는 비교적 짧게 끝났지만 힌두교경전뿐만 아니라 기독교서적도 풍부하게 읽고 신지학이나 평화주의 이념에 대한 지식도 쌓아갔다.

 

식사나 식이요법, 운동 등으로 건강을 유지하며 자신이 한일과 쓴 돈을 모두 기록하는 검소함이 몸에 밴 간디는 해외에 거주하는 동안 엄청난 독서와 풍부한 산 체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아주 다양한 견해에 접하고 세계각지에서 온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온갖 군상의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배웠고 그가 협상할 영국의 지도자들을 직관적으로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서유럽에서 살았던 적이 있던 주은래, 등소평, 레닌과 닮은 면이 있는 반면 조국을 한번도 떠난적이 없었고 다른 사회에 대한 직접 경험이 부족했던 모택동이나 스탈린과는 중요한 부분에서 서로 달랐다. 젊고 미숙한 변호사가 된 그는 또 가족을 떠나 남아프리카에서 소송건을 처리하면서 “타협과 중재가 상대의 약점을 끝까지 파고드는 것 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터득했으며 그곳에서 20년 동안이나 정치적 투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기차여행에서 유색인이라고 백인남자의 동석거부로 쫓겨나 추운 대합실에서 밤샘을 것이 훗날 정치운동이라는 사명의 기원이 되었다.

 

도덕심이 강한 그는 영국에서 인권과 교양을 몸에 익혔고 법률자격까지 갖추었던 터라 이에 용기를 얻어 몸소 행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서 평화적이고 법률적출구와 수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려고 노력하였지만 때로는 의식불명이 될 때까지 두들겨 맞기도 하였다. 그럴수록 더욱 원숙해지고 투쟁결의를 더욱 굳건하게 다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많은 조직을 결성하고 이끌면서 지도력을 갈고 닦았다. 간디는 스스로 도덕적인 삶을 모범적으로 실천해서 도덕적 권위를 얻지 않으면 인도인을 이끌 자격이 없다고 느꼈기에,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남들을 감화시키는 영혼의 순수성을 얻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할수 있는 도덕적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금욕적인 삶으로 살았고 반인도인의 법령에 항의하고 불복종하였을 뿐 만 아니라 폭력을 자제하고 체포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부당한 법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비폭력저항을 주장하였다.


훗날 간디는 요하네스버그의 분주한 가정생활과 변호사 생활을 버리고 단순한 삶을 살려고 더반의 교외의 피닉스 농장으로 가족을 데리고 이주하여 생활을 하였다.


우리는 어렵사리 묘산에서 탈 시골화한 세대지만, 오늘날 아이들에게는 해외에서 견문을 넓히는 많은 기회들을 주고 있으니 장차 그 속에서 훌륭한 인재가 나올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힘들지만...자식들이 풍부한 인생관을 갖는 기회라고 여기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다들 읽어보았겠지만, 하워드 가드너 책을 보면서 요약해 보았음. 중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