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년 10월 20일, 프레데릭 랭보와 비딸리 뀌프 사이에 미래의 시인 쟝 니꼴라 아르뛰르 랭보가 태어났다. 랭보의 부모는 1860년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연대가 이동하면서 성격상의 불화로 별거를 시작하였으며, 랭보는 신앙이 깊고 무뚝뚝한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하에 자라게 된다.
모든 면에서 반항적이기만 했던 어린 랭보지만 문학에만큼은 뛰어난 재능과 흥미를 보였다. 「두에 아카데미 공식 회보」에 랭보의 라틴시 숙제가 실리고, 두에 아카데미 콩쿠르에서 라틴시를 지어 수상하며, 이 시 또한 공식회보에 실렸다. 랭보는 책읽기와 시 쓰기, 친구들과 어울려 시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전쟁으로 학교가 문을 닫고 고향을 떠날 생각만 해오던 랭보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진정한 투시자가 되기 위해 우선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때부터 무작정 빠리로 갔다가 다시 붙잡혀 오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그러다 결국 빠리행을 도와줄 사람을 찾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시인 베를렌느였다. 랭보는 베를렌느에게 자신의 시 몇 편을 동봉한 편지를 보내고, 베를렌느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가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의 집에 랭보를 불러들인다. 당시 랭보는 17세, 베를렌느는 28세였다.
추문만을 남긴 채 베를렌느에게는 파국으로 끝난 관계였지만 랭보는 베를렌느를 통해 빠리 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고 문인들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더 넓은 세계로 나갈 꿈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 영국과 독일에 가서 궁핍한 생활 속에서 어학을 공부하고 마침내 꿈꾸던 태양이 타오르는 곳, 아프리카로 떠난다.
아프리카에서 석굴장 감독관 일 등을 하며 사업가로 변모할 꿈을 꾸지만, 당시의 정세는 전혀 그를 도울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었다. 랭보는 한때 긴 사막을 통과하며 물건을 팔아 인정받는 사업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뛰어난 통찰력으로 자신의 탐험에 관한 글을 지리학회에 기고하여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은 결국 고생만 한 채 빈털털이에 병든 몸만 남겨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와 함께 랭보의 생애도 끝난다. 마르세이유의 병원에서 암으로 고생하다 죽은 ‘상인’ 랭보는, 시인 랭보는 57년 후 병원의 정원에 금속판이 세워지면서 다시 그리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옮겨진 랭보의 시신은 어머니의 서두름 속에서 어머니와 이자벨만이 참석한 가운데 조용히 가족묘에 묻혔다. 그는 살아 생전에 시인으로 제대로 살아보지도, 인정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프랑스 시(詩)라는 창공에 가장 큰 별이 되어 끊임없이 빛나고 있다...(요약)
1. 첫 발걸음, 꼴레쥬
1853년 1월 3일, 프레데릭 랭보와 비딸리 뀌프는 결혼하여 프랑스 북부 샤를르빌에 정착한다. 그로부터 1년 후, 1854년 10월 20일,쟝 니꼴라 프레데릭 랭보에 이어 미래의 시인 쟝 니꼴라 아르뛰르 랭보가 태어난다. 랭보의 부모는 1860년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연대가 이동하면서 성격상의 불화로 별거를 시작하였으며, 랭보는 신앙이 깊고 무뚝뚝한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하에 자라게 된다.
7살이 된 랭보는 로사 학원에 입학하고, 라틴어 문법, 라틴어 작문, 역사, 고전 암송 등에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해 많은 상을 받는다. 하지만 무엇으로 유혹해도 산수공부는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하는 말을 안 듣는 일이라면 의기투합이 잘 되던 형과 함께-벌로 마른 빵을 먹고 후식을 거르는 일이 있더라도-하지 말라는 일은 기어이 저지르고야 마는 반항적인 성격으로 자라났다.
복수심에 차 있으면서 생기가 넘치는 시 <일곱 살짜리 시인들>에서 아르뛰르는 비상한 방법으로 부르봉 거리 주변 환경을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이 시에는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 ‘자신만만하고 만족해하는’, ‘거짓말하는 푸른 눈을 가진’ 어머니, 그리고 초라한 이웃들이.
이사 후, 랭보는 학교를 샤를르빌의 꼴레쥬로 옮기고 이 곳에서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교장선생님의 후원을 받지만, 그의 불성실하고 반항적인 태도로 인해 실질적인 이득은 얻지 못한다. 첫 영성체를 받은 랭보는 이 시기에는 열광적인 신앙의 소유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영성체를 받은 황태자에게 라틴시를 바치기도 하였다.
「두에 아카데미 공식 회보」에 랭보의 라틴시 숙제가 실리고, 두에 아카데미 콩쿠르에서 라틴시를 지어 수상하며, 이 시 또한 공식회보에 실렸다. <고아들의 새해 선물>을 「모두를 위한 잡지」에 기고, 실리게 되었다. 랭보는 책읽기와 시 쓰기, 친구들과 어울려 시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신학학교의 신부들이나 모든 어른들에게 반항적인 랭보였지만, 수사학 선생 이장바르만은 믿고 따르려 했다. 그 당시, 이장바르가 많이 격려를 한 덕택에 시에 대한 이 어린 학생의 관심은 더욱 고양되었고, 그것은 랭보에게 허락된 유일한 도피처였다. 이장바르는 이후 전쟁과 함께 학교가 문을 닫는 동안 랭보가 감행한 여러 번의 가출에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유일하게 의지했던 사람이었다.
2. 빠리 그리고 환멸, 샤를르빌에서의 유배생활, 대출발 전에 빠리로 귀환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랭보는 무작정 빠리로 갔다가 다시 붙잡혀 오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하지만 집에 있는 동안에도 한 순간도 빠리에 가겠다는 결심은 변함이 없었고, 어머니의 통제가 계속되는 가운데 그 결심은 더욱 굳어갔다. 그러다 결국 빠리행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시인 베를렌느였다. 랭보는 베를렌느에게 자신의 시 몇 편을 동봉한 편지를 보내고, 베를렌느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가 함께 살고 있던 자신의 집에 랭보를 불러들였다. 당시 랭보는 17세, 베를렌느는 28세였다.
베를렌느 가족은 투시자가 되기 위해 빠리에 왔다는 이 청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랭보가 일부러 씻지도 않고 제멋대로 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를렌느가 랭보에게 빠져 임신한 아내를 돌보지 않고 술만 마시고 다니는 날들이 계속되자 부인과 베를렌느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간다. 베를렌느는 자신의 문학 친구들에게 랭보를 소개하고 그들은 이 방탕아 같은 젊은 시인에게 흥미를 느끼면서도, 랭보의 괴팍한 성미 때문에 좀처럼 가까워지지는 못한다.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랭보는 빠리에 대해 가졌던 환상을 버리고 점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 시기에 랭보가 쓴 새 작품에는 내용이 명석해졌다는 것과 시의 형태가 바뀌었다는 변화가 뚜렷이 나타난다. 놀라운 산문가 랭보가 태어난 것도 바로 이때이다. 랭보는 아르덴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며 인생을 재발견하듯 글을 써나갔다.
말썽꾸러기
아이, 너무 바보 같아.
잠시도 쉬지 않고 속임수를 쓰고 배반하네.
바위산의 고양이처럼
어디에나 고약한 냄새를 풍기네!
랭보는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베를렌느의 편지를 받고 다시 빠리로 돌아간다. 랭보는 진정한 투시자가 되기 위해 베를렌느에게 그를 얽매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라고 하지만 베를렌느는 아내와 랭보 모두를 붙잡으려 애쓴다. 빠리에는 베를렌느와 랭보의 관계에 관한 수상스러운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3. 벨기에에서의 자유 그리고 영국에서의 타향살이
랭보의 갑작스런 제안에 베를렌느는 빠리꼬뮌의 처벌에 대한 도피를 핑계삼아 함께 빠리를 떠나기로 한다. 아내 마띨드와 어머니가 끈질기게 베르렌느를 붙잡았지만 그는 랭보를 선택하고, 둘만의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출발할 때만 해도 너무나 행복했다.
오! 계절이여! 오! 성이여!
어느 영혼이 결점이 없단 말인가?
나는 어느 누구도 피하지 않는 행복에 대한 마술적 연구를 했다네.
골족의 수탉이 노래한다
행복 만세!
랭보는 런던에서 베를렌느 친구들의 도움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다시 글을 쓰기도 하지만, 현실은 곧 닥쳐왔다. 베를렌느의 부인이 이혼소송 제기를 하고 그 탓을 랭보에게로 돌린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다. 겨울이 다가오고 돈까지 떨어져 가는 데다 이런 충돌까지 빚어지자 처음의 즐겁던 도약은 느슨해졌고 그런 분위기는 문학 창작을 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했다. 랭보는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갈지 모르는 이 소송에 대해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선수치기로 결정했다. 랭보 부인은 그 소식을 가문의 명예에 대한 타격으로 받아들이고 랭보를 샤를르빌로 불러들인다.
4. 막간을 보낸 샤를르빌과 드라마가 벌어지기 전에 다시 들른 로슈, 7월 10일의 드라마
고향집에서 감옥에서와 같은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랭보는 베를렌느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유배지 같은 고향, 미래에는 농부의 생활만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을 떠나기 위해 랭보는 자신의 정신적인 모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어머니한테 부탁하거나 베를렌느에게 구걸하지 않더라도 그곳을 뜰 여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쓰던 책의 제목은 당시에는 ‘이교도의 책‘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었다.
아내의 이혼소송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베를렌느와 랭보는 몰래 영국으로 다시 떠난다. 하지만 이미 그들에 대한 소문은 런던의 꼬뮈나르들의 좁은 사회에 퍼져 있었고, 둘의 ‘수상한 성격의 관계’는 빠리 경찰국에까지 보고되었다. 베를렌느와 랭보의 분노는 엄청났다. 런던에서 얻은 평판이 어디서나 그를 따라다닐 것이고, 문학가로서의 생명도 끝나고 말 것이다. 그들은 서로 자기 신세를 망쳤다고 상대의 면전에 대고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우정에 메워질 수 없는 금이 갔다.
“며칠 밤, 그의 악마가 나를 사로잡았어. 우린 틀렸네. 나는 그와 다투었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7월 초 베를렌느는 랭보와 끝장 낼 결심을 하고, 평소처럼 랭보가 비아냥거리는 것을 보자마자 기회라는 듯 재빨리 가방을 싸고 배를 타고 떠나 버린다. 당황한 랭보는 그를 쫓아가고 배를 타고 멀어져 가는 베를렌느를 향해 돌아오라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배는 사라지고 이제 끝났다. 랭보는 돈 한푼 없이 그 거대한 도시에 남겨진 것이다.
베를렌느는 무작정 아내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페인군에 지원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는 지금까지처럼 우유부단하게 하지 않고 자기의 태도를 확실히 하면 아내도 돌아올 것이고 더 이상 불행을 없을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른다. 더불어 랭보를 자기의 욕심 때문에 그냥 버려 두고 왔다는 죄책감에 랭보를 만나기로 하고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랭보의 태도에 둘의 귀머거리들의 대화 같은 싸움은 다시 시작된다. 베를렌느는 대낮에 술에 취한 채 호텔방에 들어갔을 때 급기야 떠나겠다는 랭보를 향해 총을 겨눈다. 그는 함께 있던 베를렌느의 어머니와 함께 손목을 부상당한 랭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베를렌느는 랭보를 따라 가기로 한다.
하지만 떠나기 전 베를렌느는 랭보를 쏜 것 때문에 붙잡혔다. 이 사건을 판사에게 설명하면서 마띨드의 소송관계, 랭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사실 등 베를렌느의 죄는 남색과 관련하여 발전하고 결국 수갑을 찬 채 형무소로 인도되었다. 자, 이제 랭보는 홀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브뤼셀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랭보는 로슈행 열차를 탔다.
5. 영국에서 제르맹 누보와 함께
베를렌느를 떠나 고향에 다시 돌아온 랭보는 그 동안 계획했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다. 그는 가족의 집단생활과 노동에서 도피하기 위해 어느 때보다도 더 펜에 의지했다. 그는 모든 노동을 증오했으며 '인생이 노동으로 꽃핀다는 말은 낡은 진리'라고 했다. 혼자 글을 쓰면서 때로 울기도 하고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에 대한 당시의 비평이 대부분 그로 하여금 앙심을 품게 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떨쳐 버리려는 몸부림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 작품의 결론은 다음 세 마디로 끝난다. '내 인생은 허송세월이었다.' 번뜩이는 기지와 불꽃이 튀는 이 놀라운 텍스트는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완벽한 작품으로 꼽히는 구절들을 지니고 있다.
때로 나는 해변이 기쁨에 찬 나라들로 끝없이 덮인 채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본다. 커다란 금빛 배가 내 위에서 아침의 미풍 아래 정자들을 뒤흔든다. 나는 온갖 파티와 승리, 그리고 모든 드라마를 창조했다. 나는 새로운 꽃들, 새로운 별들, 새로운 육체들, 새로운 언어들을 발명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초자연적 능력을 획득했다고 믿었다. 음 그래, 난 내 상상과 기억들을 묻어 버려야만 한다! 예술가와 이야기꾼의 찬란한 영광은 끝난 거다! 나! 모든 윤리를 벗어난 마술사나 천사라고 자부하던 나는 추구해야 할 의무와 포옹해야 할 껄끄러운 현실을 지닌 채 흙으로 돌아왔다! 농부!
몇 번이고 고친 끝에 원고가 완성되었다. 1872년 4월부터 8월까지에 걸쳐, 그도 이제 수확을 마친 것이다. 랭보는 책을 출판해 줄 인쇄업자를 찾았고 책은 1프랑 가격으로 500부가 팔렸다. 랭보는 감옥에 있는 베를렌느에게 책을 보냈고 그는 그 책을 소중히 간직하여 아들에게까지 물려주었다. 랭보는 잠시 의기양양하여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곧 베를렌느와의 추문 때문에 예전의 인간관계들은 깨지고 사람들은 그가 책보다 그 추문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고 말하고 있었다. 랭보는 계속되는 불운에 진이 빠졌고 한동안 문학이나 문학가들과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랭보는 제르맹 누보라는 젊은 시인과 조우하게 되고 베를렌느와의 소문에 대해 운명에 맞서 도전하는 용기를 보았다고 말하는 그와 함께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랭보는 다시 문학과 가까워지고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한 것 같다. 하지만 곧 누보마저 랭보를 떠나게 되는데 이는 그 주변 사람들이 랭보와 함께 있으면 문학인으로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그에게 돌아올 것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출감한 베를렌느가 빠르나스에 시 몇 편을 보내려 했지만 ‘작가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혼자 남겨진 랭보는 용기를 내서 역경과 싸우려 했으며, 신문에 광고를 내어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함께 세계 여행할 가족을 찾아 여행도 한 것으로 추정된다.
6. 여행, 베를렌느와의 절교
20살이 된 랭보에게 징집 영장이 나와 그는 고향 샤를르빌로 돌아왔다. 하지만 형이 5년간 지원하고 군복무를 했기 때문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을 찾아내 청원하여 군대를 가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영어도 웬만큼 익혔고, 영국에서의 기억이 좋지 않은 랭보는 이번엔 상업이나 산업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독일어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그가 원했던 것은 삶에 대해 단단히 무장하고, 외국어에 통달함으로써 대학시절에 했어야 하는 의무의 결손을 보상하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랭보는 미친 듯이 독일어 공부에 전념했다. 그 사이 베를렌느는 완전히 석방되고, 감옥 생활을 겪고 가족도 돈도 명예도 잃게 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쓴 신의 은총을 통해서 랭보의 ‘타락한’ 영혼이 구제되기만을 바라는 내용의 편지는 들라에에 따르면, ‘예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합시다.’로 요약할 수 있다.
얼마 후 베를렌느가 랭보를 찾아오고 구원이니, 은총이니 하는 말만 하는 베를렌느와 이를 비웃는 랭보 사이에 심한 말다툼이 벌어진다. 그 후,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선 랭보는 용기를 내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도움을 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베를렌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베를렌느는 답장에서 돈 요청에 발끈하며 거절한다. 얼마 안 있어 랭보는 다시 베를렌느가 술에 취해 쓴 독설로 가득한 편지를 받는데, 바로 완전한 절교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 후 들라에나 다른 친구들을 통해 서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여전히 끊이지 않는 인연을 맺는다.
7. 긴 여행 동방의 발견
1876년, 랭보는 오랫동안 갖고 싶어하던 피아노를 갖게 된다. 아르뛰르를 집에 붙잡아 놓기 위한 수단으로 어머니가 마침내 동의하게 된 것이다. 랭보는 동생을 병으로 떠나보내고 집안에서 피아노를 치거나 옷장에 들어가 공부나 글쓰기에 열중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4월 초 랭보는 외국어 사전을 내팽개치고 중부 유럽으로 날아간다. 랭보가 관심을 갖고 있던 근동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마부에게 도둑을 맞는 등 한 차례 우여곡절을 겪고 프랑스로 송환된 랭보는 곧바로 다시 떠난다. 모험을 위해서라면 군대라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식민지 징병군에 자원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회만 모색하다가 마침내 파당(수마트라)의 정박지 근처에 다다랐을 때 탈영에 성공하게 된다. 다시 붙잡혔을 때 랭보는 교수형은 모면하고 1년 구류형만 선고받았다.
1876년 12월 9일까지도 랭보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동생 이자벨의 말 등을 근거로 짐작해 보면 자바의 밀림을 통과해 선원 등으로 생활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돌아온 랭보는 살아 있는 언어 연구에 골몰한 채 1876~77년의 겨울을 집에서 얌전히 보내다가 다시 떠났다. 그 뒤 함부르크에서 순회 곡마단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유랑했으며, 스톡홀름과 코펜하겐 등에서도 랭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장티푸스 등의 사정으로 인해 고향에 다시 돌아오는 일이 있었지만 랭보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라르타카의 채석장에서 인부들을 감독하는 일도 하고 험악한 산악지대를 넘기도 한 여정을 랭보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친구 들라에가 아직도 문학에 생각이 있는지 용기를 내어 물어보면 약간 성가시다는 듯이 ‘그런 건 집어치웠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키프로스에서 더더욱 미지의 세계인 아프리카를 향해 발을 딛는다.
아프리카 대륙행 배에 몸을 실었을 때 그에게는 아껴 모은 돈 400프랑이 있었는데, 그는 그 돈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앞에는 희망으로 가득 찬 새로운 삶이 펼쳐져 있었다. 아라비아, 아비시니아, 수단, 잰지바르... 이 전설적인 지역들이 지도 위에서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아덴과 지부티, 제일라와 하라 사이에 자신이 쳐 놓은 거미줄에 빠져 버린 랭보가 죽음을 만나고서야 그 지옥을 떠나는 것을 우리는 이제 곧 보게 될 것이다.
8. 아프리카와의 첫 접촉
홍해를 따라 수아킨(이집트), 제다(아라비아), 마사우아(에티오피아), 그리고 호데이아(예멘) 등의 기항지들을 거쳐가는 동안 랭보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마침내 아덴에 도착하여 커피 선별 및 검량 작업장인 ‘하림’의 감독관직을 맡았다. 이곳은 바닷물을 증류해 마실 정도로 물 부족이 심했고, 대우가 나빴기 때문에 얼마 후 푸른 지역이며 현저히 개선된 급료가 약속된 하라에 지사 발령을 받았을 때 랭보는 매우 기뻐했다. 더불어 랭보는 자신을 일류 엔지니어로 착각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엄청난 공사 계획을 나름대로 준비해 보기도 했는데, 이런 터무니없는 그의 기대는 꺾이고 만다. 소말리아 사막을 통과하며 하라가 있는 서부로 가는 여행길, 대모험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듯 보였고, 랭보도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곳의 비위생적이고 처참할 만큼 빈곤한 실상이 드러났다. 랭보는 이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시 유행하던 매독에 걸리게 되는 등 고난만 겪는 일상이 반복되자, 그는 인생을 포기하며 진정한 휴식을 갈구하는 편지를 집에 보낸다. 현 지사장 바르디의 형이 후임 지사장으로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랭보는 자신은 지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떠날 궁리만 하게 된다.
12월 15일 그는 다른 일자리를 찾든지, 아니면 아주 떠나 버리든지 간에 다시는 그 재수 없는 하라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겠다고 단단히 다짐했다. 바르디 형제는 랭보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양심적인 사람이기는 하지만 성격이 구제불능이라고. 랭보는 그들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노랭이고 사기꾼이고 직원들을 부려먹을 때만 친절해.”
9. 아덴에서의 랭보 그 후 하라의 지사장이 되다
랭보는 아프리카의 은행들을 믿지 못하여 월급을 고향의 어머니에게 송금하는데 어머니가 그 돈으로 농지를 사자 매우 화를 냈다. 하지만 싸움 끝에 랭보가 어머니에게 필요하면 얼마든지 돈을 쓰라고 덧붙인 것을 보면 실제로는 착한 심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식민지를 사이에 둔 국제 정세 때문에 회사가 기울어 가는 와중에 하라의 지사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무엇보다 랭보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삽화까지 곁들인 훌륭한 과학서적을 만드는 일이었다. 실제로 랭보의 탐험에 관한 글이 지역 학회 논문지에 실리기도 하였고 사람들은 이 방면에서 그를 인정해주고 있었다.
랭보는 하라의 지사장으로 임명된 후 연봉 5000프랑 계약을 하는 등 희망적인 날들이 올 것이라 믿고 있었지만 점점 악화되어 가는 주변 상황은 급기야 회사를 문닫게 만들고 만다. 과학서적 집필을 위해 카메라를 산 뒤 사진 찍는 즐거움으로 그나마 견뎌내다가 다시 떠날 결심을 한다. 하지만 랭보는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그에게 보낸 찬사가 가득한 인정서를 받고는 매우 만족해했다고 한다.
랭보가 아프리카에서 고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이, 베를렌느는 랭보와 몇몇 ‘저주받은 시인들’의 작품을 소규모 신문사와 출판사에서 출판할 요량으로 랭보의 시들을 모았다. 베를렌느는 분명 랭보에게 그의 시를 출판할 수 있도록 허가 요청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시기 랭보의 행동이나 처지로 볼 때, 자신에 관련된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만류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때문에 베를렌느는 『저주받은 시인들』에서 랭보의 시를 출판하는 것에 대해 랭보와 직접 의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은근슬쩍 변명해 놓고 있는 것이다.
형 프레데릭의 결혼 때문에 랭보는 하라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당시 그는 젊은 아비시니아 여자와 함께였는데. 사진 한 장과 시중들던 여인의 증언 외에는 아무 자료도 없지만, 그가 아덴에서 이미 그녀와 함께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녀는 하는 행동이나 옷차림 외에 생김새마저도 유럽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10. 코아로 광란의 출정
1895년 9월, 삐에르 라바뛰라는 프랑스인이 랭보에게 아비시니아의 코아로 무기를 수입하는 엄청난 계획을 제안했다. 랭보는 라바뛰가 제안한 프로그램에 매혹되어 리에즈나 프랑스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쓰지 않는 낡은 피스톤식 권총을 1자루당 7~8프랑에 사서 그 무기들을 다급하게 필요로 하는 메네릭에게 넘기는 사업을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물론 비용과 위험도 있겠지만 대가로 받는 물건들은 자루당 40프랑 정도 되므로 해볼 만한 일이었다.
일을 위해 코아로 긴 여행을 떠나야 하므로 랭보는 아비시나아 여자를 돌려보내고, 바르디 일과와의 예속관계도 정리했다. 랭보는 라바뛰와 계약을 맺고 잔인하고 탐욕스런 도적떼가 우글거리는 사막으로 접어드는 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은 사소한 것부터 하나씩 지연되거나 꼬였고 급기야 라바뛰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때까지도 랭보는 예정보다 늦춰질 뿐 결국엔 계획대로 될 것이라 믿으려 애쓰며 가족들에게 쓴 편지에서도 격려를 요청했다. 그러나 라바뛰의 사망사건은 그 동안의 기다림과 학수고대 대신 도피를 위한 여정만을 남겨놓았다. 동업자였던 랭보에게 라바뛰의 모든 빚이 떠넘겨질 것이었다.
어쨌든 랭보는 인수받은 소총을 메네릭에게 팔기 위해 전쟁터를 지나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 시기에 유쾌한 일이란 탐험가 쥘 보렐리를 만난 것뿐이었다. 그는 랭보에게 큰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일기에서 랭보를 진정한 탐험가라고 썼다. 랭보도 오랜만에 똑똑한 사람을 만났다고 기뻐했다. 보렐리는 랭보에게 청해 여행길을 함께 갔으며, 「이집트의 보스포르스」라는 일간신문에 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랭보를 도왔다.
그 당시, 랭보의 발표는 여러 전문 학회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영구, 이탈리아 등의 지리학회들이 랭보의 발표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랭보는 자신의 명성을 알지 못했을 것 같다. 그의 운명은 영광을 누려보지 못한 채 그 옆을 스쳐갈 뿐이었다.
성에 도착한 랭보는 드디어 메네릭을 만나 소총을 팔게 되었지만 라바뛰의 빚을 제한 값만을 받았으며, 그가 메네릭에게 라바뛰의 빚을 갚았다는 소문이 돌자 여기저기서 랭보에게 빚을 갚아달라는 청구가 들어왔다. 결국 랭보는 고생만 하고 손해만 보게 되었다.
11. 하라의 자영업자 랭보
랭보는 다시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아덴에 머무르며 프랑스와 영국 간 식민지 조약에 의해 무기 사업을 금지 당하자 아무 일거리도 없이 별 만족을 느끼지 못한 채 지내고 있었다. 한가해지자 펜의 악마가 다시 그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유럽인들의 비웃음 속에서 랭보의 신문기고가 실제로 성사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정치적인 무정부 상태의 결과로 경제적인 침체가 계속되고 식량부족과 전쟁불안 등 상황은 계속 악화되기만 했다. 그때, 상당한 규모의 무기와 상품 운반 건수가 생겨 지루한 여행을 한 후 다시 아덴으로 돌아온 랭보는 더 이상 소극적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하라에서 세자르 띠앙이라는 거래상이 되기로 한 것이다.
랭보는 3년 동안 하라에서 해안과 코아 사이에 있는 전경인 전차대를 맡아 일하게 된다. 그는 아덴과 제일라에서 온 상품들을 수납하고 부기로 표시하든지 그것들을 다시 팔기도 했다. 당시 랭보는 매우 활발하고 결속력이 강한 유럽인들의 동아리에 속해 있었지만, 항상 고독하다는 하소연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던 ‘일그’라는 친구와 있을 때만 생기가 돌며 솔직하게 대했다.
초반에는 사업도 잘 되어갔고 사업관계도 잘 유지해 나갔다. 주변으로부터도 사업가적 기질이 있으며 성격이 곧고 관대하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모두가 인정하듯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안정된 성격의 소유자가 못 되었던 것이다.
알프레디가 베리숑에게 한 편지에는 ‘신랄하게 쏘아붙이는 그의 기질은 그에게 많은 적을 만들어 주었죠. 그는 그 가엾고도 고약한 풍자적인 가면을 벗어버릴 줄을 몰랐는데 그 가면 때문에 그의 심성의 훌륭한 점들이 가려지고 있었어요. 그는 사람들 마음을 많이 할퀴기는 했지만 한번도 크게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었어요. 짓궂게 놀려대는 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코아와 하라의 여행객들은 그에 대해 기분 나쁜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1897년 7월 7일)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랭보는 시를 기고해 달라는 편지를 받았으며, 사람들은 랭보와 그의 시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 상황의 악화로 장사는 더 이상 이윤을 남기지 않았고 그곳에서의 미래는 비관적이었다. 프랑스로 돌아가서 결혼이나 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여행지마다 쫓아다닐 용기가 있는 여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늙어가고 있었다. 파멸의 입구에서 위기가 고조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나락으로 떨어질 날이 가까웠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12. 절단수술 - 로슈의 골고다 언덕
1891년 2월, 랭보는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던 병세가 더욱 진전되었음을 가족에게 알렸다. 처음에 랭보는 병의 원인을 풍토와 과로, 그리고 건강에 소홀한 탓으로 돌렸다. 무릎 안쪽의 심한 부종과 관절 경화로 다리와 허벅지는 가늘어지고 통증은 어떤 방법을 써도 줄지 않았다. 실제로 랭보가의 자손들은 유전적으로 모두 관절 내에 장액 축적에서 오는 병인 관절수종에 쉽게 걸렸다. 비딸리는 활액막염에 결핵 합병증으로 죽고 후에 이자벨도 그와 비슷한 병으로 죽었다. 3월 말 그는 모든 사업에서 손해만 보고 병만 얻은 채 아덴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랭보는 그곳 빠리 국립할인은행에서 37프랑 45상팀짜리 일람불 어음을 받는다.
초라한 결말이었다! 그토록 피곤하게, 그토록 고생하면서, 그렇게 주리면서 살아온 것이 당장 현찰로 받을 수도 없는 이 어음 한 장을 위해서였단 말인가! 인생을 이 종이 한 장을 위해 소진했다니!
의사는 랭보에게 프랑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고, 랭보는 마르세이유로 가서 병원에 입원한다. 혼자이고, 불구이고, 파멸한 그에게 자살 충동이 스쳐갔다. 랭보는 5월 21일 다리 절단 수술을 받기 전에 어머니에게 연락해 자기에게 와 줄 것을 부탁한다. 요지부동의 신앙과 강인한 태도로 그녀는 자기의 아들로 하여금 최악의 절망 상태에 빠지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이 혹독한 시련을 견디어 나가게 했을 것이다.
로슈에 있던 이자벨은 돌아온 어머니로부터 랭보의 상태를 듣고 충격에 빠진 나머지 평소에 대단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던 오빠를 위해 헌신해야겠다는 사명을 느낀다. 랭보는 수술 후 다시 걸을 수 없다는 공포에 휩싸인 데다가 병적과에서 랭보를 병무 회피로 고소한다며 조사를 벌이자 쫓기는 불안에 떨며 시간을 보낸다. 결국 다리 절단 수술이 확인되자 제외 대상으로 확실시되었지만 랭보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이자벨과 아프리카의 친구들 등이 그를 격려하는 편지를 많이 보내와도 랭보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나아질 것이 없는 상황을 깨달은 그는 결국 이자벨의 간청대로 그녀가 있는 로슈로 가서 보살핌을 받는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더 이상 외출도 하지 않으며 방안에서 헛소리만 하고 보냈다. 하지만 태양, 마르세이유에 대한 생각은 그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외과의사가 진찰을 해 줄 것이고, 조금만 회복의 기미가 보이면 아덴으로 가는 배를 탈수도 있을 텐데.
13. 돌아오다 그리고 마르세이유에서 죽다
8월 23일, 랭보는 이자벨과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르세이유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동행한 이자벨은 여행 내내 오빠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간호한다. 마르세이유 도착 후 랭보는 아덴으로 가고싶어 하지만 이자벨이 자신을 떠날까 봐 마르세이유의 병원에 머물렀다. 의사들은 한결같이 랭보에게 남은 시간이 며칠, 아니면 몇 주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 이상 음식에 손도 대지 않는 랭보는 밤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고 이자벨은 오빠를 최대한 편하게 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이자벨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랭보가 죽기 전에 신앙을 가졌다고 썼다. 랭보는 죽음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르며 기도했던 것이다. 그가 매달릴 수 있는 최종적인 희망이었으리라. 11월 9일, 그는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다해, 배를 보내 달라고 해운회사의 사장에게 부탁할 편지를 이자벨에게 받아쓰게 했다. 아덴으로 가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그토록 강했다. 하지만 그 이튿날 11월 10일 오전 10시, 바르세이유에서 그는 천천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서른 일곱이 되던 해에 내세의 평화 속으로 평온하게 들어갔다. 병원 명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었다.
“랭보, 쟝 니꼴라, 상인, 샤를르빌 출생, 마르세이유에 일시 체류, 1891년 11월 10일 오전10시에사망. 진단: 전신 암종증”
(쟝이라는 가명은 군대에서 자기를 찾을까 봐 신분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상인’랭보는 12일 병원을 떠났고, 시인 랭보는 57년 후 병원의 정원에 금속판이 세워지면서 다시 그리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옮겨진 랭보의 시신은 어머니의 서두름 속에서 어머니와 이자벨만이 참석한 가운데 조용히 가족묘에 묻혔다.
<“랭보 지옥으로부터의 자유”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삐에르 쁘띠피스 지음/장정애박사옮김, 홍익출판사>
▣ 저 자 삐에르 쁘띠피스
소설가, 문학평론가, 프랑스 문단 최고의 랭보 연구자로 <랑보 학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는 『아르뛰르 랭보의 작품과 얼굴』 『아르뛰르 랭보의 삶』 『랭보 앨범』 그 외에도 『베를렌느』 『베를렌느 앨범』 등이 있다.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셉 앤드류스(Joseph Andrews) (0) | 2011.12.16 |
---|---|
모히칸족의 최후 (0) | 2011.12.16 |
80일간의 세계일주 (0) | 2011.12.16 |
1년에 365권 읽었더니…! (0) | 2011.12.15 |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0) | 2011.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