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심리학
심리학은 ‘악’이라는 단어에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어떤 사람은 이 단어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신에 우리는 ‘질병’, ‘기능장애’, ‘정서장애’ 등과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악한 행동을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악’이라는 단어는 수많은 초자연적인 설명을 만들어내고 인간의 파괴적 행동에 대한 진정한 원인을 찾는 것을 방해한다고 봄으로써 대체로 심리학은 ‘악’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보다는 악의 차원을 무시하는 것으로 일반화한다. 그런가 하면 심리학 일각에서는 ‘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정당할 뿐 아니라, 그것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자 중 가장 잘 알려진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악에 관한 주제를 방대히 연구했으며, 정신분석학적 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 인지치료자 아론 벡, 융, 롤로 메이 등 수많은 학자들이 악을 연구했다.
프로이드와 악
프로이드는 악이 초인간의 영역에 있다는 관점을 거부했다. 그는 ‘신’의 개념을 인간의 불안 때문에 만들어진 창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의 비극과 책임에 직면하는 것이 너무나 두렵기에 있지도 않은 ‘신’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는 악마에 대한 생각의 근원에 관심을 가졌는데, 모든 아이들이 그들의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랑과 증오가 혼합된 양가감정이 신에 대하여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신을 향한 혼합된 감정은 극도로 금지되었기에 우리의 긍정적인 감정은 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은 사탄에게 돌림으로써 신에 대한 대립되는 감정을 해결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악마에 대한 생각은 심리학적으로 신에 대한 우리의 적대적 감정을 바꾸려는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두 가지 중요한 본능이 있다고 말하는데, 삶의 본능 에로스(사랑, Eros)와 다나토스(죽음, Thanatos)의 본능이다. 에로스는 우리 각자를 파괴에 대한 억압과 싸우게 한다. 다나토스는 증오와 공격적인 것으로부터 나온다. 이 공격성은 외부인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고, 자신을 공격하여 자기파괴로 가게도 한다. 프로이드 학파의 주된 논점은 인간의 공격성이 생물학적인 것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이드가 주장한 동기이론의 일부이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 파괴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인간 본성의 한부분이라고 본다.
신프로이드 학파와 악
죽음의 본능에 대한 프로이드의 이해는 대부분의 정신분석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정신분석학자들은 파괴적 공격성이 동기의 문제라기보다는 결핍의 문제라고 본다. 즉, 파괴적 공격성은 반드시 배출되어야하는 생물학적 동기와 관련되기보다는 오히려 기본적 욕구나 인간관계에서의 좌절과 관련된다. 다시 말하면 파괴적 행동이나 공격성은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대신 심리 저변의 원인들, 흔히 문제가 있는 초기 대상관계와 관련한 원인들이 적대적 행동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프롬은 악에 관한 이해를 하려고 ‘파멸증후군’(syndrome of decay)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하여 집중했다. 여기에는 세 가지 근원적 증상이 있다. 그중 하나는 ‘시체애호의 성격’이라고 부르는 ‘생명없음’의 형태다. 시체애호자는 은유적으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죽이려고 애를 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자유, 자발성, 자율을 정복함으로써 생기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인 로봇 같은 사람으로 바꾸려고 한다. 프롬은 죽음 사랑의 경향이 생명 사랑의 경향의 좌절에서 나타난다고 믿었다. 두 번째 증상은 악성 자기애적 성격장애이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자만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남용한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객관적이 되지 않고, 항상 비판적이다.
몇몇 사람들이 서로 결합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서로의 교만과 우월을 강화할 때 그것은 집단자기중심주의나 자민족중심주의가 된다. 파멸증후군의 세 번째 증상은 어머니에 대한 공생 고착증세이다. ‘어머니’는 삶의 불확실성이나 불안정에서 벗어나도록 보장해 주는 이념이나 교회, 정치적 조직, 또는 다른 집단 같은 것들을 대표한다. 이러한 것에 고착된 인간은 그를 통해 삶의 불확실성에서 멀어지길 원한다. 이런 형태의 안전에 대한 갈망은 사람들을 권위주의자나 광신적 지도자에게로 이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성은 자신과 반대되는 자질인 삶을 긍정하고, 다른 사람을 돌보고, 모험으로써 삶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왜곡하고 손상시킨다.
융: 악과 그림자
융은 그림자에 대해서 의식이 거절해버린 수용할 수 없는 정신의 부분이라고 언급했다. 그것은 거절된 감정, 부적당한 생각, 소망, 환상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고물집적소이다. 너무 어두워서 우리의 의식적인 삶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곳에 그림자는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계속 무시하고 억압할 때, 그것은 어둠 안에서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림자는 우리의 공적 이미지 또는 사회적 가면(persona)과 완전히 반대의 것이 된다.
융은 우리가 자신의 그림자를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으로 과민반응을 제시했다. 여기에 그것을 설명하는 사례가 있다. 저녁 파티에 초대된 어떤 여성이 자기 친구와 함께 있는데 그 친구는 가슴이 깊이 파여 속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이 여성은 파티를 돌아다니며 다른 여성들에게 그 친구의 옷차림새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에 대해 얘기한다. 돌아가는 길에도 남편에게 말한다. 심지어 2주가 지나서도 그 옷차림을 화두로 삼으려고 애쓴다. 이 예화가 말해주는 것은 친구의 복장이 파티에 맞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그것을 몇 배로 언급한다는 것이다. 융은 이러한 상황이 도발적인 옷을 입으려는 여자의 욕구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왜 이 단순한 예가 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가? 그 이유는 융이 우리가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다른 누군가에게 투영한다. 그리고 자기회피의 수단으로 그를 공격한다.
악과 인본주의 심리학
20세기 중반에 발생한 인본주의 심리학은 칼 로저스(Carl Rogers)와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에 의해 재해석되었다. 인본주의 심리학에서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게 태어난다고 보며, 자아실현 혹은 자기향상을 추구하는 생물학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이 사회의 억압으로 왜곡되고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악은 우리에게 본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조화로운 존재로 태어났으나, 성장하면서 우리의 감정과 생각들이 거절되고 부인되고 축소되며 억압 받으면서 본래의 조화로운 면을 잃어버리고 내면에 불일치가 일어난다. 이로 인해 자기 소외가 형성되며 파괴적인 행동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존재론적인 불안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파괴적인 행동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제공했다고는 볼 수 없다.
심리학이 악을 제거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 주된 이유는 심리학이 인간의 원래 상태로부터 우리를 인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우리가 존재론적인 불안이라고 부르는 깊은 요소로부터 우리를 빼낼 수 없다. <“기독교 상담에서 본 악”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테리 D. 쿠퍼, 신디 K. 에퍼슨 지음, 역자 전요섭님, C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