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사회의 진화

[중산] 2011. 12. 19. 18:28

 

사회의 진화_ 팀 잉골드 : 영국의 사회인류학자. 현재 애버딘 대학교 사회인류학과 학과장이다.

 

 

사회: 시민 사회라는 개념은 18세기 들어 국가 권력에 대한 대항에서 그 의미를 끌어냈다. 즉 엄격하게 불평등한 국가 체제의 반대편에서 각자가 언제든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다른 개인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할 권리를 부여받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연합이었다. 이런 자유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사회는 시장을 따라 형성되었고, 사회관계는 시장 거래를 통해 형성되었다. 깊고 영속적인 대인 관계라기보다 외적인 계약하고만 관련이 있는 일시적이고 이기적인 의미로 말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사회는 그저 개인 간의 계약 집단에 불과하다.

 

 

18세기와 19세기의 많은 논평가들은 시민 사회의 질서를 확립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이른바 공동체 개념의 상실을 한탄했다. 전통적인 농업과 농민 공동체의 트레이드마크로 간주되었던 신뢰와 교제와 친밀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르주아 사회의 복잡하고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이권이 들어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윈의 저 유명한 비유인 생존 투쟁과 스펜서의 적자생존의 원천이었다.

 

 

과학과 수렵·채집인: 현대의 인간 진화 이론가들에게 수렵·채집인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 굉장히 특별해서 만약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억지로라도 만들어냈을 게 틀림없다. 진화론은 수렵·채집인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인간을 동물 왕국의 나머지 동물들과 갈라놓을 만한 근본적인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된 사상이며, 이는 생명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부터 가장 높은 단계까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는 자연의 유일한 사다리 위에, 즉 거대한 존재의 사슬 위에 모든 생물을 배열할 수 있다는 고전적 학술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슬을 따라가는 모든 단계는 점차적인 단계로, 즉 흔히 말하듯이 자연은 결코 비약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현대의 어떤 교재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우리 종의 진화에 관한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조상은 무한한 세대에 걸쳐 차츰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끊임없는 형태의 연속은 인간과 침팬지 모두의 조상인 5000만 년 전쯤의 원숭이를 2000만 년 전에 나타난 가장 초기의 호미니드(hominid, 사람과 생물)를 통해 여러분과 나 같은 사람들(해부학적으로 현대적인 변종으로 확인된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과 이어준다.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에 대한 설명으로는 아마도 그것만으로 충분하겠지만, 인간의 역사는 어떨까?

 

 

계몽 철학을 고수하는 18세기의 이론가들은 역사를 인간성이 원시적인 미개 상태에서 현대의 과학과 문명으로 진보한 이야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모든 인간이 장소와 시대를 불문하고 공통된 기본적 지적 능력을 공유하며, 그런 의미에서 동등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학설에 전념했다. 문명 수준의 차이는 이러한 공통된 능력이 불균등하게 발달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원시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인류 전체에 공통된 중요한 이수 과정을 추구하는 초기 단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요컨대 이 18세기의 사상가들에게 인간은 해부학적 형태에서는 다른 동물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일정한 신체 형태의 구조로 그 자신의 역사적 발달을 감내할 수 있는 정신이 부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물 왕국의 다른 동물과는 종류가 달랐다. 심지어 인간을 호모(Homo)라는 명칭으로 자신의 분류 체계 안에 포함시키는 대담한 행동을 한 카를린네(Karl Limme)조차도 인간과 원숭이를 해부학적으로 구분할 명확한 기준을 찾아내는 데 대단히 큰 어려움을 겪었다.

 

 

1871년의 저서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에서 시작된 다윈의 인간 진화 이론이 던진 충격은 이러한 구별을 뒤엎는 것이었다. 정신 능력의 차이는 신체의 장기인 뇌의 발달 정도가 다른 데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원시인들이 원숭이보다 더 크고 더 잘 조직된 뇌를 가진 것처럼 문명인이 원시인들보다 더 크고 더 잘 조직된 뇌를 가진 적으로 여겨졌다. 인간의 역사는 생존투쟁에서 정복당하는 역할을 맡게 된 불운한 미개인이 조만간 멸종하게끔 되어 있는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뇌의 진화와 발을 맞춰 발달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윌리스(Wallace, Alfred)가 1870년에 펴낸 저서 『자연선택 이론에 기여한 것들(Contributions to the Theory of Natural Selection)』에서 원시적 미개인들의 뇌는 유럽 철학자들의 뇌만큼 좋으며, 따라서 그들의 뇌가 실제로 단순한 생활환경 하에서 요구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했을 때, 그는 유심론적 괴짜로 치부되었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이 이 미개인에게 오직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지능만 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다윈은 틀렸고 윌리스가 옳았다. 하지만 그는 그 공로를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유럽의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토착 원주민보다 본질적으로 정신적 우월성을 갖는다는 인종 차별적 생각은 생물학적 인류학에서 대단히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잔학한 만행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과학계에서 사라졌다.

 

 

인간의 진화에 대한 현대의 논평가 대다수는 그 모든 본질적인 것들에서 부지불식간에 18세기의 견해를 왕성하게 재생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숭이를 닮은 조상들에서 생물학적으로, 혹은 해부학적으로 현대적인 형태의 인간으로 이어지는 어떤 과정(진화)이 있었고, 생물학적으로는 우리를 전혀 변화시키지 않은 채 인간의 원시적 과거에서 현대의 과학과 문명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심리학자 데이비드 프리맨(David Premack)과 앤 제임스 프리맥(Ann James Premack) 부부가 최근에 단언했듯이 어떤 종이 생물학적으로 안정되게 남아 있는 동안 거치는 연속적인 변화이며, 세상의 모든 종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그것을 갖고 있다.

 

 

진화부터 역사까지: 진화는 생명체들이 특수한 형태와 능력을 갖춘 존재로 되어가는 과정이자, 또한 환경에 대처하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그 후손들이 발전할 수 있는 터전과 조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간이라는 생물은 이 과정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종들의 생물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인간의 아이들은 많은 다른 종의 새끼처럼 이전 세대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환경에서 성장하며, 그러는 동안 그들이 머물 수 있는 신체의 형태(특수한 기능과 감수성과 기질)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을 유전자 속에 갖추고 있지도 않으며, 인간 사회의 다양한 구조를 설명할 정보를(유전 정보라기보다 문화 정보를) 세대에서 세대로 전하기 위해 어떤 다른 종류의 매개물을 불러낼 필요도 없다. 여기서 잘못된 것은 바로 형태는 발달 환경에서 나온다는 정보의 개념이다.

 

제도적 형태(사회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형태를 포함해서)는 바로 사회생활이라는 활동 안에서, 인간이 서로와 그리고 인간이 아닌 환경과 실제로 관련을 맺는 상황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런 활동이 바로 역사의 과정이다. 나의 요지는 사회 형태는 진공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들이 계속되는 세대를 위한 발달의 조건을 만들 때 하는 일을 배경으로 그리고 과거에 해왔던 일을 배경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생물 형태의 진화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다윈주의 패러다임이 모순투성이라고 믿으며, 이러한 모순 중 일부를 지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다윈이 만약 지금 우리와 함께 있다면 나의 노력을 기꺼이 살펴봤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왜냐하면 다윈은 신다윈주의자는 고사하고 다윈주의자도 아니었으며, 오늘날 그의 이름을 자기주장에 끼워 맞추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생물과 환경의 상호주의에 훨씬 더 민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윈은 논리와 증거와 지적 정직성을 요구했던 동시대의 정설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던 진정한 과학자였다. 다윈의 이론이 오늘날 어떤 경우 거의 신앙이라고 말할 만큼 새로운 정설이 된 것은 기묘한 일이며 적잖이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모든 것은 진화한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앤드루 C. 페이비언 엮음, 역자 김혜원님, 에코리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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