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죄
만약 종교인들이 죄를 심리학에서 말하는 신경증, 기능장애, 질병, 정신병리와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다른 점인가? 죄는 심리적 장애보다는 훨씬 더 광범위한 개념이다. 정신병리는 개인의 삶의 특정한 맥락과 구체적으로 관련된 반면 죄는 좀 더 일반적으로 공유된 인간의 경향성과 관련된다. 심리치료사이자 신학자 드보라 헌싱거는 죄와 질병의 차이점을 몇 가지로 제시한다.
첫 번째 차이점은 학대의 희생자나 정신병리를 가진 사람은 전체 인구의 특정 비율만 차지하지만 죄의 개념은 우리 모두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정신병리는 우리 삶에서 발생한 우연한 사고나 불행한 심리적 상황에 의한 문제이고 죄는 좀 더 일반적인 인간 조건에 의한 문제이다. 헌싱거는 죄는 믿음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신학적 범주의 개념이지만 정신병리는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인간 삶에서 죄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죄의 결과와 파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헌싱거는 오직 하나님만이 인류를 죄의 문제에서 구할 수 있으나 정신병리에 관해서는 심리치료가 꽤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심리학이 치료할 수 있는 것과 심리학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심리학은 신경증적 불안을 매우 잘 다룰 수 있는데 이러한 불안은 왜곡된 인간관계나 불안한 사회적 환경, 또는 생물학적 문제로 인해 생긴다. 그러나 심리학은 존재론적 불안을 다루는 법을 모르는데 이러한 불안은 ‘자신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을 아는 인간의 자기반영의 자연스런 결과다. 틸리히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인간의 고통이 완벽히 치료될 수 없다고 믿었다.
죄와 중독
어거스틴처럼 명상적 정신과의인 게랄드 메이는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이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사랑의 원천으로 더 가까이 가길 바라고 사랑받고 사랑하기 바라는 깊은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정말 원치 않는 것들에게 ‘우리 자신을 준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무한한 것들에 애착되는 과정과 그들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숭배하는 것을 바로 중독이라고 부른다. 중독은 특정한 것에 우리의 에너지를 묶고 노예로 만들어 욕망에 매이게 한다. 모든 형태의 중독은 인간으로서 갖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한 시도이다. 특정한 중독은 어거스틴이 특정한 죄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중독의 역학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죄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키고 풍요롭게 할 것이다.
유대-기독교 전통 속에서의 죄
유대교에서 죄는 모세가 받은 십계명 중 하나를 어기면서 생긴다. 따라서 죄의 근본적인 동기는 불순종이다. 유대교에서 죄를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기독교에서는 불순종의 특정한 행위와 마찬가지인 상태로 본다. 죄의 기독교적 이해는 네 가지의 핵심으로 나누어 질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 우리의 창조된 이미지는 왜곡되었다: 유대교 신앙과 함께 기독교는 인류가 하나님 형상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왜곡된 것이다.
2) ‘죄’와 ‘죄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죄는 단지 행위가 아닌 상태로 인식되어 왔다. 죄는 주로 깨진 관계와 관련이 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그 다음은 우리의 이웃들과, 그리고 우리 자신과의 관계이다. ‘죄들’(행동이나 태도)은 죄(깨진 관계)에서 뻗어 나왔다.
3) 죄는 전인류적이다: 모든 사람은 우리 각각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왜곡되어 있는 한 죄인이다.
4)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는다: 여기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다르다. 유대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 자신을 희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구원은 복종 안에 있고 인간은 이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거나 복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인간의 능력을 변화시켜 영적으로 성장하게 한다.
극적인 타락으로 인한 죄와 미성숙에 따른 죄
기독교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는데, 하나는 어거스틴에 근거한 것으로 처음부터 완벽한 상태에서의 극적인 타락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레니우스에 근거한 것으로, 그는 2세기 매우 중요한 신학자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인간은 미성숙한 상태였고 그 미성숙한 상태로부터 죄가 초래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과 닮은 사람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인간이나 자연 모두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이전에는 완벽한 상태였다고 믿었다. 불순종이 재앙을 몰고 온 것이다. 그러나 이레니우스에 있어서 타락은 미성숙의 결과물로 본 것이었으며 고통은 영적으로 진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했다.
많은 현대신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이레니우스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레니우스의 이론이 인간의 진화를 발견한 과학과 더 잘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레니우스가 좀 더 대중화된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을 보는 그의 관점이 어거스틴의 관점보다 더 연민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견해는 아담의 불순종에 따른 극단적 과잉반응처럼 보인다. 그의 견해는 인간은 가능한 한 사악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하나님은 가능한 한 가혹한 것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이레니우스가 믿은 것처럼 고통의 목적이 단순히 영적 발달을 위한 것이라면 일부 고통은 지나친 고통이다.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에이즈가 아프리카에서 유행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것도 우리의 영적 발달의 일부분인가? 양쪽 관점에는 여러 가지 통찰과 문제점이 있다. 우리는 어거스틴과 이레니우스의 주장 모두를 죄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원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파괴적 종교의 특성
파괴적 종교는 자신들의 것만이 옳다는 생각에 독점적으로 집착하게 만들어 자기중심주의적 기준으로 판단하게 하고 ‘친구 아니면 원수’라는 이분법적 구조의 정신 상태를 조장한다. 이러한 종교집단의 추종자들은 다른 사람을 경쟁적인 적으로 인식하지만 인생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 결과 다른 사람과의 건전한 관계를 좌절시키거나 금지시키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집단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독재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신념을 통해서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하며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대화가 불가능하다. 파괴적 종교는 지도자의 모든 ‘불확실함’까지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일에 있어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정신 상태를 만든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근본주의자들의 융통성 없는 생각들을 지적해 온 것은 정당한 것이다, 다른 시각을 독단적인 것이라고 치부하는 고정관념을 가질 때 ‘자유로운 생각의 승리자’ 또한 똑같이 독단적이 될 수도 있다. 융통성 없고 권위주의적인 생각과 연결된 공격은 인생을 위협하고 지배해서 걱정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제임스 홀리스(James Hollis)는 이것을 ‘근본주의는 불안을 위한 치료방식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류에게는 없는 절대적 안전의 원천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의 유한성과 관련된 갈등의 끝을 약속하기에 이 절대적인 것을 계속해서 찾는다.
건전한 종교와 파괴적 종교를 구분하기 위한 제안
하워드 클라인벨(howard Clinebell)은 심리적으로 건전한 종교적 서약과 건전하지 않은 종교적 서약을 구분하는데 매우 유용한 지침을 개발했다. 그는 한사람의 종교적 신앙과 실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을 제시했다:
첫 번째 질문: “종교적 생각과 실천의 특정한 형태가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가, 아니면 방벽을 치는가?” 이 질문은 우리의 종교적 신앙이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공통된 인간애를 보게 도와주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두 번째 질문: “종교적 생각과 실천의 특정한 형태가 신뢰의 기본적인 인식과 천지만물의 관계성을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인생은 분명 실망과 상처 그리고 통상 비극들로 가득하지만 건전한 종교적 서약은 이런 것들로부터 궁극적으로는 잘될 것이라고 확신시켜준다. 우리 안에 이러한 믿음이 없이는, 그리고 정의와 사랑이 이길 것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인생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적대적이며 또 한편으로는 적어도 무관심하다는 시각을 갖게 될 수 있다.
세 번째 질문: “종교적 생각과 행동의 특정한 형태가 내면의 자유와 개인의 책임감의 성장을 격려하는가, 혹은 방해하는가? 이것이 건전하거나 건전하지 않은 의존적 관계(권위자와의 성숙하거나 아니면 성숙하지 못한 관계)를 장려하는가? 이것이 성숙한 혹은 미성숙한 양심의 성장을 장려하는가?” 이 질문은 특히 권위주의적 형태의 종교를 평가할 때 중요하다. 어떤 종교적 전통은 엄격한 규칙들에 대한 지속적 순응을 요구함으로써 인간을 아이 취급한다. 이러한 종교는 질문을 허락하고, 개인적인 성장을 장려하고, 자율권을 강화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독재적인 종교이다.
네 번째 질문: “종교적 생각과 실천의 특정 형태가 사람이 죄책감에서 용서의 기분으로 넘어가도록 돕는 건전한 방법들을 제공하는가, 아니면 부적절한 방법들을 제공하는가? 이런 정의가 명확하고 중요한 윤리적인 지침을 제공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윤리적인 사소한 일을 강조하는가? 이것의 첫째 관심이 겉치레적인 행동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인격의 근원적인 건강을 위한 것인가?” 파괴적 종교의 특징 중 하나는 윤리에 관해서 큰 그림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이것은 표면에 있는 사소한 일들에 초점을 두거나, 이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상처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큰 논쟁점을 놓친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질문: “종교적 생각이나 관습이 삶의 즐거움을 증가시키는가, 혹은 감소시키는가? 종교적 생각이나 관습이 사람의 진가를 발휘하게 하는가, 아니면 삶의 특성을 파괴해 버리는가?”
여섯 번째 질문: “종교적 생각과 관습이 성이나 공격적인 중요한 에너지를 건설적인 방법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부정적인 방법으로 다루는가?”
일곱 번째 질문: “특정한 종교적인 생각과 관습이 현실을 수용하게 하는가, 거부하게 하는가? 또 그것들이 강화시키는 것은 종교적으로 불가사의한 믿음인가, 성숙한 믿음인가? 그것은 의심을 존중하는 지적인 정직함을 장려하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상황을 지나치게 간소화하는가, 아니면 그것의 뒤얽힌 복잡성을 직면하게 하는가?” 건전한 믿음은 이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건전한 믿음은 의심, 애매함, 양가감정에 대해 정직하다. 이것은 신비로운 생각을 비판하고 좀 더 쉽게 교리를 믿기 위해 인간의 곤경에 대한 양상을 무시하고 축소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현실에 정면으로 직면한다.
여덟 번째 질문: “종교적인 생각이나 관습이 사랑을 강화시키는가, 아니면 두려움을 강화시키는가?” 권위주의적인 종교는 사랑이 없고 단지 두려움의 존재인 신만 이야기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신비감, 무한함을 깨닫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은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 질문: “특정한 종교적 생각과 관습이 방향의 구조와 형식의 목적, 즉 존재적 불안을 건설적으로 다루게 하는 적절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열 번째 질문: “종교적 생각이나 실천의 특별한 형태가 개인의 삶에 대한 특징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주는가?”
열한 번째 질문: “특정한 형태의 종교적 믿음과 관습이 사회의 신경증적 유형을 그것 자체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그것들을 변화시키려고 하는가?” 건전한 종교는 항상 파괴적일지 모르는 사회의 흐름에 대해 비판하고 도전할 준비가 되어있다. 표준이라는 것이 반드시 좋고 옳으며 또한 건전한 것은 아니다. 건전한 종교적 시각은 표준이라는 것에 그리고 인류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기업 윤리, 의료 행위, 사회봉사, 인종 차별, 성 불평등, 그리고 다른 많은 문제들의 중심은 인류 결속이라는 더 큰 목표를 향해야 한다.<“기독교 상담에서 본 악”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테리 D. 쿠퍼, 신디 K. 에퍼슨 지음, 역자 전요섭님, C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