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인 어머니 펠라게야 닐로브나는 평생 남편의 매질과 술주정을 견디며 살았다. 남편이 죽고 공장에 다니기 시작한 아들 파벨이 아버지처럼 일이 끝나면 술이나 먹고 싸움질을 해대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부터 파벨의 생활이 달라졌다. 밤에 나가 노는 횟수도 훨씬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휴일마다 어디론가 외출했지만 술도 안 마시고 멀쩡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즈음 어머니는 아들의 눈매가 훨씬 날카로워지고 심각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들이 다른 공장 청년을 닮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어머니에게 다행한 일이었지만 아들이 무언가에 정신을 집중하고 어딘가 어두운 삶의 급류로부터 헤엄쳐 나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까닭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파벨은 어디선가 책을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을 땐 눈에 안 띄게 읽으려고 애썼고 다 읽은 책은 어딘가에 숨겼다. 책에서 뭔가를 베껴 쓰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감췄다.
아들의 행동거지도 달라졌다. 멋을 부리는 일이 없었고 그저 자연스럽고 편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겉모양이 한결 평범해지고 부드러워지자 어머니는 더욱 불안했다. 더구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예전과는 달랐다. 파벨은 어머니에게 깍듯이 존칭을 썼다. 어머니는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아들에게서 진지하고 강한 무엇을 느끼면서 더욱 불안해졌다. 그렇게 어머니와 아들의 말없는 삶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을 나서며 파벨이 말했다. “토요일에 시내에서 손님이 찾아올 겁니다.” “시내에서?” 되묻고 나서 어머니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어머니? 두려우세요?” “그래, 두렵다. 평생 두려움 속에 살아 내 정신은 온통 두려움에 뒤덮여 있단다.”
토요일까지 어머니는 공포에 벌벌 떨며 지냈다. 어떤 알지도 못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집에 온다니... 어머니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멎는 듯했다. 그들은 아들이 지금 가고 있는 바로 그 길을 가르쳐 준 바로 그 사람들인 것이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되고, 어머니는 두려움 속에서 그들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어머니가 평생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부드럽고 유머가 넘치는 안드레이, 사랑스럽고 마음이 곧은 소녀 나타샤, 그리고 많은 공장 노동자들... 그들은 아무도 어머니를 위협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반신반의하면서 아들과 그의 동지들을 지켜본다.
파벨과 동료들에 대한 경찰의 감시가 조여왔다. 드디어 공장에서 소요가 발생하고 파벨의 집은 경찰의 수색을 받는다. 급박하게 상황이 전개되면서 아들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그리고 경찰에 대한 적개심이 뒤섞인 채 어머니의 새로운 생활이 전개되는데...(요약)
어머니(Мать), 막심 고리키 지음
▣ 어떤사람들? 무슨 이야기?
미하일 블라소프 열쇠공. 닐로브나의 남편이자 파벨의 아버지.
펠라게야 닐로브나 파벨의 어머니. 평생 남편의 매질과 술주정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살다가 아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이해하고 혁명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파벨 블라소프 노동자. 사회주의 사상을 습득하고 공장 내 혁명 조직을 만들 어간다. 불굴의 의지와 실천력을 겸비하고
최후까지 신념을 버 리지 않는다.
안드레이 파벨의 동지. 친절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의지가 굳고 끝까지 파벨과 같은 길을 간다.
나타샤 부유한 가문 출신이지만 집과 부모를 떠나 혁명 활동에 투신한 지식인. 교사. 귀족 출신의
엄격한 여성 혁명가. 파벨에게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연기와 기름냄새, 공장의 새벽, 그들은 그렇게 살아갔다
이른 아침 매캐한 연기와 기름 냄새에 전 노동자 지구의 새벽. 공장의 사이렌 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부시시 일어나 미처 피로가 풀리지 않은 몸을 이끌고 감옥처럼 생긴 거대한 공장을 향해 놀란 바퀴벌레처럼 걸음을 재촉한다. 붉은 햇살이 창가에 걸리는 저녁 무렵 공장은 다 태우고 남은 재인 양 사람들을 토해낸다. 기계는 사람들의 근육에서 생산에 필요한 힘을 남김없이 빼앗았다. 사람들은 또다시 하루를 그렇듯 흔적 없이 지워버리고는 무덤 같은 집으로 돌아간다.
틀에 박힌 일상에서 가슴 속에 쌓인 불만을 풀어낼 길이 없는 사람들은 술에 취해 미친 짐승처럼 싸우고 때려 부쉈다. 미하일 블라소프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미하일은 솜씨 좋은 열쇠공이고, 건장한 노동자였지만 평생을 쥐꼬리만한 일당으로 살아왔다. 불평불만으로 가득찬 미하일은 공장의 감독에게 말대꾸하기 일쑤였고, 이제 늙어서 곧 쫓겨날 지경이었다. 미하일은 주위 사람들과 싸움을 밥먹듯이 했고 욕을 입에 달고 다녔다. 아내 펠라게야 닐로브나에게도 욕질은 예사였고 툭하면 주먹이 날렸다. 펠라게야는 말없이 남편을 받들고 어떻게든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옷으로 남편의 화를 달래려 했지만 하루라도 남편에게 얻어맞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아들 파벨 역시 아버지의 화풀이 대상이었다. 하지만 파벨이 열 네 살 되던 해 하루는 아버지가 그의 머리를 움켜쥐고 거칠게 쥐어박으려 하자 파벨은 두 손에 망치를 움켜쥐고 대들었다. “건드리지 마세요.” 아버지는 잠깐동안 아들을 쳐다보고 나서 아내에게 말했다. “좋아... 이젠 나한테 돈벌어 오란 소리 말아. 이제 저 놈이 먹여 살릴 테니까.” 이 일이 있고 난 후 미하일은 전처럼 아들과 아내를 때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술에 취해 고주망태가 되기 일쑤였다.
미하일은 병들어 앓다가 어느 아침 공장의 사이렌 소리가 울릴 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파벨은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고 어머니에게 소리쳤다. “저녁 밥 줘, 빨리! 그리고, 나 담배 피울 거야, 아버지 파이프 이리 내놔요!”
어머니는 아들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 땀이 배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면서 조용히 말했다.“얘야, 네가 그러면 안돼. 난 어떻게 살란 말이냐. 네 에비는 평생 술만 마시고 나를 때려댔다. 이제 너마저 이 에미한테 그러겠다는 말이냐?” 어머니의 두 뺨에서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파벨은 오랜 세월 동안 힘든 노동에 시달리고 아버지에게 얻어터져 망가진 어머니의 몸과 수척한 볼을 따라 흘러내리는 어머니의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날부터 파벨은 점차 변해갔다. 얼굴은 더욱 수척해지고 눈빛은 엄격해졌으며 말수가 줄어들었다. 생활도 완연히 달라졌다. 그는 열심히 일을 했지만 다른 공장 사람들처럼 술을 먹거나 놀러 나다니지 않았다. 일요일이면 단정히 차려입고 어딘가에 다녀오곤 했다. 무슨 책인가 열심히 읽었고 책에서 뭔가를 베껴 쓰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공장 청년을 닮아가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아들이 어딘가로 완강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렇게 2년 여의 세월이 흘러갔다.
어머니, 두려워 마세요
저녁을 먹고 난 후에 파벨이 창문 커튼을 내리고 구석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주저하면서 아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도대체 뭘 읽고 있는 거냐?” 파벨은 가만히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 보더니 책을 밀어놓고 어머니를 앞에 앉히고는 준엄하게 말을 꺼냈다. “제가 읽는 책은 금서예요. 우리 노동자의 삶에 대해 씌어 있다고 금지된 책이예요. 발각되면 전 감옥에 갈 겁니다. 전 진실을 알고 싶어요. 우리의 삶이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왜 아버지는 그렇게 일하고도 비참하게 돌아가셨는지. 왜 어머니는 그렇게 사셔야만 했는지. 나는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건지, 전 진실을 알고 싶어요.”
파벨은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어머니에게 다 말해줬다. 펠라게야는 아들의 말에서 뭔가 새롭고 이해할 수 없는, 서글프면서도 기쁜 감정을 느꼈다. “생각해보세요, 과연 어머니는 어떻게 사셨지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기만 하셨죠. 아버진 비참한 삶에 대한 분풀이를 어머니에게 해댄 거예요. 비참하게 살면서도 아버지는 그게 왜 그렇게 된 것인지 몰랐던 거예요. 아버진 공장이 두 개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삼십 년 동안 일했어요. 그런데 지금 공장이 일곱 개나 됐어요. 어머닌 도대체 살아오면서 조그만 기쁨이라도 있었던가요?”
펠라게야는 침통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 오래 전에 잠들어 버렸던 흐릿한 생각이 떠올랐다. 펠라게야는 젊었을 때 삶에 대해서 친구들과 이야기 해본 적이 있었지만 모두들 불평만 할뿐이었지, 자신들의 삶이 왜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 앞에서 자신의 아들이 삶에 대해서, 자신과 어머니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자부심과 두려움이 겹쳐지면서 어머니의 얼굴에는 미소와 눈물이 번졌다.
“이 세상에는 민중의 행복을 위해서 싸우다가 붙잡혀서 감옥에 가거나 유형을 간 사람들도 많아요. 전 그런 사람들을 보았어요.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예요. 어머니도 이제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어디를 다니는지 아셨어요. 전 어머니께 모든 것을 다 말씀드렸어요. 그러니 어머니, 어머니께서 절 사랑하신다면 제 길을 막지 말아 주세요.” 파벨은 어머니의 손을 꼭 쥐었다. 파벨이 힘줘 말한 ‘어머니’란 말이 펠라게야에게 전율을 일으켰고 아들의 두 손에서 새롭고도 낯선 감정을 느꼈다. “제발 몸조심하거라... 많이 야위었구나...” 펠라게야는 도대체 무얼 조심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사랑스럽고 따스한 눈길로 아들을 바라봤다.
“마음대로 하거라. 난 말리지 않겠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다. 겁 없이 아무데서나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마라. 사람들을 조심해야 돼, 모두 서로를 미워하거든. 욕심과 질투로 살아간단다. 모두들 나쁜 일을 좋아하고 일러바치기 좋아해.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아마 그 사람들은 널 미워하고 파멸시킬 거야.” 어머니의 말을 듣고 파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사람들은 나빠요. 그런데 이 세상에 진실이 살아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 사람들이 훌륭해 보이지 뭐예요. 나도 어떻게 그런 마음이 들게 됐는지 몰라요. 어렸을 땐 사람들이 무서웠고 조금 커서는 내가 미워했지요. 그냥 미웠어요. 그런데 이젠 모든 게 달라졌어요.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다 진짜 죄가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서는 내 마음이 온화해졌어요...”
어느 날 파벨이 문을 나서며 말했다. “이번 토요일 시내에서 손님이 올 거예요.” 어머니는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 시내에서 온다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아들을 그 위험하고 무서운 길로 인도하는 그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러나 토요일날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어머니의 마음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들은 조금도 무섭거나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안드레이는 어머니를 특히 안심시키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청년이었다. 펠라게야는 그와 다정하고 기분좋게 이야기를 나눴다. 얼굴이 익은 몇몇 노동자가 들어왔고 끝으로 지친 표정의 처녀가 찾아왔다. 부자집에서 태어난 교사 나타샤라고 했다. 모두들 어머니에게 다정하게 대하고 가식없이 말을 건넸다. 그녀는 평생 그렇게 남에게 친절하고 예의를 갖춘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그녀 자신도 어딘지 새 세상에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처녀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했고, 모두들 귀 기울여 들었다. 어머니도 귀를 기울였으나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이 젊은이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여겨볼 뿐이었다. 젊은이들은 열심히 토론했지만 어머니는 도대체 이 젊은이들이 무슨 일을 논의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정이넘어서야 흩어졌다.
젊은이들은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파벨의 집에 모여들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얼굴이 보였다.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모임을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점차 이 젊은이들이 결코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고 안드레이와 나타샤, 사샤에게는 자식과 같은 친근함을 느꼈다.
아들을 위해, 아니 나 자신을 위해
파벨과 동지들은 비밀 인쇄소를 차리고 공장과 그 주변 지역에 열악한 노동현실을 고발하고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알리는 유인물과 소식지를 펴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파벨과 그의 동지들과 가까워지면서 자신도 어느덧 뭔가 많이 변했고 남들과는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불안함과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던 중 공장 주변의 늪지를 메워 새 공장을 만든다며 노동자들의 봉급에서 일정 금액을 공제하겠다는 회사의 방침이 공개됐다. 새 공장이 들어서면 노동자의 일거리가 많아지고 봉급도 오르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기만적인 사장의 방침에 대해 파벨과 동료들은 파업을 통해 항거하려 했다. 그러나 수동적으로만 살아온 노동자들은 파업에 대해 찬반 양론으로 의견이 갈리면서 분열을 일으켰다.
파벨이 파업을 선동하는 연설을 한 저녁, 경찰이 파벨의 집을 덮쳐 체포해갔다. 어머니는 지난번에 있었던 가택 수색 때처럼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 저항하려 했다. 파벨이 체포돼 끌려간 후 어머니는 눈을 감고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억울함과 자신의 무력감에 괴로웠다. “차라리 날 잡아갈 일이지, 이 짐승 같은 놈들...”
그렇게 잠 못 이루던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누군가가 조용히 창문을 두드렸다. 동지 예고르였다. 그는 파벨이 오래 갇혀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공장에 계속해서 유인물을 뿌리는 것이 파벨의 혐의를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기꺼이 그 일을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행상으로 가장해 공장에 유인물을 가지고 들어가 동료 노동자에게 전달했다. 많은 노동자들은 눈빛으로 어머니에게 우정과 동지애를 나타냈지만 이사이라는 사람은 이를 갈면서 악의적으로 위협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도 무엇인가 아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는 것과 공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동지적인 눈빛을 접하면서 새로운 감동을 맛보았다. 어머니는 이제까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어깨를 힘차게 펴고 고개를 똑바로 세우고 다닐 수 있었다.
파벨의 구체적인 혐의를 증명하지 못한 경찰은 파벨과 안드레이, 사샤를 비롯한 동지들을 모두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파벨은 더욱 강해진 모습으로 감옥에서 돌아왔다. 어머니의 활약을 전해들은 파벨은 어머니를 끌어안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저희를 크게 도와주셨어요. 이렇게 어머니와 제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다니 정말 저는 행운아예요!”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복잡하고 파란만장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어머니는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할 만큼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겼다. 스스로 글쓰기를 배우면서 아들이 읽던 책을 읽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들과 동지들과 함께 하는 인간적인 교류가 기뻤다. 더구나 그녀는 점차 그들의 말을 알아듣고 자신의 말도 덧붙일 수 있었다. 자신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젊은이들을 보면 펠라게야는 뜨거운 힘이 가슴에서 넘쳐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우연한 기회에 현관에서 파벨과 사샤가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당신이 깃발을 들 거예요?” 처녀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요.” “조직에서 결정된 건가요?” “그래요, 그건 내 의무예요.” “당신이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면... 생각해보세요. 당신과 안드레이는 중요한 인물이예요. 해야할 일이 많잖아요. 아마 오랫동안 유형을 받게 될 것이 뻔한데...” 어머니는 가슴에 얼음을 끼얹은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이렇게 애원하는 데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돼요. 당신이 그러다니? 그럼 안돼요.” “저도 인간이에요.” 그녀가 나직이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지요, 당신은. 내겐 소중한 사람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런 말을 해선 안돼요...”
아들이 노동절 시위에 앞장설 계획이고 다시 체포될 것임을 알게 된 어머니의 마음은 무겁고 떨렸다. 그러나 파벨은 그런 어머니에게 도리어 역정을 냈다. 어머니에게까지 공연히 엄격하게 구는 파벨을 보고 안드레이는 파벨을 꾸짖었다. “어머니 앞에서 영웅심이나 발동하고... 너의 그 돼먹지 못한 영웅심은 반푼 어치도 안돼. 어머니의 영혼은 너보다 풍요로우셔...”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차를 내오면서 말했다. “봄 날씨가 왜 이리 추우니? 너무 추워서 얼어죽겠다.” 파벨이 안드레이의 충고를 받고 웃음을 띠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절 용서해주세요, 어머니! 전 참 바보 같아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주님이 함께 하실 거다. 네 인생은 너의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 다오. 제 아들을 아끼지 않는 에미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너희들 모두 내 혈육이나 마찬가지다. 그래, 네가 앞으로 걸어 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네 뒤를 따를 거야. 모든 걸 내던지고 함께 나아가는 거야, 파벨!”
안드레이는 어머니와 파벨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짐짓 파벨을 나무라듯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전 파벨을 좋아해요. 하지만 파벨이 입고 다니는 조끼는 좋아하지 않아요. 저 녀석은 새 조끼를 척하니 입고서는 꽤나 마음에 드는지 배를 쑥 내밀고 사람들을 밀친단 말입니다. 좀 봐달란 듯이 말이지요. 정말 좋은 조끼라는 것은 알지만 도대체 왜 사람들을 미냔 말예요, 그러지 않아도 비좁은 데서.” 파벨과 어머니와 안드레이는 같이 웃었다.
마침내 대파업의 그날
5월 1일 노동절.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어머니도 거리로 나왔다. 길 양옆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길 저편에는 무장한 기마 경찰대와 군대가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동지 여러분!” 파벨의 맑고도 우렁찬 목소리가 터졌다. “우리는 우리가 세계의 주인임을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깃발, 이성과 진실과 해방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하얀 깃대가 허공에 불쑥 솟아올랐고 군중들이 삽시간에 파벨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빨간 새가 비상하듯이 깃발이 나부끼면서 행렬은 대오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만세! 사회민주주의 노동당 만세! 전세계 노동자 만세!” 파벨의 외침을 따라 수백 명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어머니는 멀리 보이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녀의 가슴에 거대하면서도 부드러운 불길이 솟아오르며 지난 과거의 암울한 찌꺼기, 순종의 고통스런 응어리가 녹아 내렸다. 안드레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선창하였다. “일어나세, 깨어나세, 노동자여! 투쟁으로 떨쳐 일어나, 굶주린 민중이여...“
흡사 거대한 트럼펫이 노래하듯이 사람들이 안드레이 뒤를 따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더욱 많은 노동자와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며 대오에 합류했다. 길가의 사람들은 박수를 치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환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저 이단자 놈들”, “황제폐하께, 차르 전하에게 반기를 들다니, 반역도들 같으니!”하고 욕을 해댔다. 군중의 후미에는 무관심한 시선으로 호기심만 가지고 구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녔다.
행렬이 조금씩 전진하다가 어디서부터인지 멈칫거리며 대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불안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노랫소리가 더욱 빨라지고 커졌다. 하지만 이제 화음은 깨지고 여러 외침이 마구 뒤섞이고 있었다. 몇몇은 어떻게든 노랫소리를 이끌어가려고 더욱 크게 불렀다. “일어나세, 깨어나세, 노동자... 적을 향해 나아가세...”
그러나 노랫소리에 흔들리지 않는 확신은 이미 사라지고 어딘가 불안이 스며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파벨이 보였다. 파벨은 계속해서 깃발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군중의 대열은 허물어져 사람들이 길가의 집과 골목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일부 노동자들이 파벨을 에워싸고 더욱 단단하게 뭉쳤다. 파벨의 머리 위에는 깃발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거리 끝에서 군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물샐틈없이 막아선 회색 벽처럼 보였다. 그들 위에 솟은 총칼이 싸늘하면서도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들에게서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어머니의 가슴을 예리하게 베어내고 지나갔다.
잠시 잠잠해졌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깃발이 높이 솟구치더니 병사의 벽을 향해 움직였다. 어머니는 몸이 부들부들 떨려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어머니는 비명을 질렀다. 파벨과 안드레이, 사모일로프, 페쟈 네 명이 군중과 떨어져 서서히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거리를 빽빽이 메우고 있던 군중들이 주저하면서 옆으로, 뒤로 흩어져 갔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파벨의 뒤를 조금씩 따라가고 있었으나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길바닥이 뜨겁기라도 한 듯 옆으로 비켜서고 있었다. “앞에 총!” 앞쪽에서 날카로운 명령이 들렸다. 머리 위의 총검이 일제히 흔들리더니 앞으로 내밀어졌다.
"온다!” 누군가가 외쳤다. 회색의 병사들이 거리가 꽉 차게 무리를 지어 흩어져 은빛으로 일렁이는 파도처럼, 오싹하도록 일사불란하게 앞으로 전진해왔다. 쇠사슬 같은 회색 군복과 붉은 깃발 사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번뜩이며 주위를 살피는 병사들의 눈, 잔인하게 빛나는 가늘고 날카로운 총검들... "해산하라!” 장교의 명령이 울렸다. “저 깃발을 빼앗아라!” 병사들이 질주하듯 파벨을 덮쳤다. 개머리판과 총검이 난무하듯이 흔들렸다. 외침과 비명소리, 깃발이 몇 번 다시 일어서다가 땅바닥에 팽개쳐졌다. 이미 파벨과 안드레이와 몇몇 동지들은 회색 군복에 가려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체포와 재판
노동절 대시위 때 파벨과 안드레이가 체포되는 광경을 목격한 어머니는 오랫동안 그 기억과 분노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경찰이 들이닥쳐 집안을 온통 뒤집어 놓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도 하고 뭔가 염탐하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예고르와 사샤가 찾아왔다. 파벨이 체포되면 어머니를 시내로 이사시키기로 이미 약속돼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살아왔던 노동자 지구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파벨과 친구들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시내로 이사한 후 어머니는 정말 바쁜 나날을 보냈다. 편지를 전달하고 유인물을 뿌리고 인쇄를 도와주는 등 어머니는 힘껏 젊은이들을 도왔다. 그녀는 기꺼이 그들 모두의 어머니가 되고자 했다.
얼마 후 법원에서 재판이 열리게 됐다. 어머니는 피고의 가족으로 방청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법정에 들어섰다. 마음을 굳게 먹으려 해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꾸만 두려운 생각이 피어올랐다. 무죄로 석방되지 않을까... 유형을 가게 되겠지...
파벨과 함께 잡힌 어린 페자의 숙부인 시조프 노인 역시 법정에 왔다. 그는 어머니를 자기 옆에 앉히고는 파벨과 페자가 얼마나 훌륭하냐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설사 유형을 간다 해도 그들은 노동자의 자랑이 되면 됐지 집안에 먹칠하는 일은 전혀 한 것이 아니라고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러나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한 여인은 어머니를 바라보고 독기 어린 목소리로 쏘아 부쳤다. “당신 아들이 우리 애를 망쳤어!”
시조프가 화를 내며 그 여인을 나무랐지만 어머니는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알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피고인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안드레이와 파벨, 페자, 사모일로프 등 십여 명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침울했던 법원은 오히려 갑자기 밝고 활기가 돌았다. 검사는 먼저 안드레이에게 죄를 인정하느냐고 물었다. 안드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살인을 한 것도 아니고 도둑질한 적도 없소. 나는 다만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도둑질하고 서로 죽이는 사회제도에 찬성하지 않았을 뿐이오. 이것도 죄가 된단 말입니까?”
재판관이 당황하여 손을 내저으며 안드레이의 말을 가로막았다. 파벨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법정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어머니는 몸을 잔뜩 앞으로 당겼다. “나는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의 혁명 당원입니다. 우리 사회주의자는 사유제를 철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인간을 한낱 부의 축적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회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거대한 기계에서 아이들 장난감까지 어느 하나 우리의 노동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모든 생산수단을 민중에게로! 모든 권력은 민중에게로! 모든 사람에게 노동의 의무를!”
판사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파벨을 지켜보았다. 파벨은 건강하고 신선한 목소리로 확신에 차서 전제정치를 비판하고 민중의 현실을 폭로하면서 사회주의가 새로운 러시아를 건설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려 애썼다. 안드레이와 동지들도 눈을 빛내며 파벨의 말을 경청했고 감동의 미소를 지었다.
파벨과 안드레이와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모두 시베리아 유형이 선고되었다. 어머니는 정작 선고가 내려지자 매우 담담했다. 법정 밖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재판 결과를 기다렸다. 어머니가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재판에 대해 물어보면서 악수를 청하고 재판부를 비난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커다란 소요를 일으켰다.
펠라게야는 사샤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사샤는 이미 파벨을 따라 시베리아로 따라가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파벨을 향한 사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사랑스럽게 사샤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아, 어머니, 어머니!
동지들은 파벨의 법정 연설을 인쇄해 배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심한 감시 속에서 비밀 인쇄소는 시시각각 노출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펠라게야는 감시의 눈을 피해 인쇄를 도왔다. 각 지역에서는 파벨의 유인물을 배포함과 동시에 여러 곳에서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유인물이 모두 준비되었을 때 이를 운반하기로 했던 니콜라이와 동지들이 하나씩 체포되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거리에 나서자 몹시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어머니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저쪽에 털모자를 덮어쓴 마부 한 사람이 있었고, 맞은 편에는 병사 한 사람이 귀를 움켜쥐고 종종 걸음으로 걸어갔다. 어머니는 발 밑에 밟히는 사각거리는 눈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생각보다 일찍 역에 도착했다. 기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승객은 물론이요, 농부들, 상인들, 어린아이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떠들썩하게 웃어댔다.
어머니는 한쪽 구석 빈자리에 앉았다. 그때 어떤 젊은 사내가 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야!’ 가방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제 붙잡힐 때가 됐단 말인가? 가방을 버리고 달아날까?’
젊은 사내가 경찰을 불러 무어라고 속삭이며 눈으로 펠라게야를 가리켰다. 그들 중 한 명은 어딘가 다시 연락을 취하러 갔고 나머지는 어머니에게 다가왔다. 어머니는 가방을 전달하려는 일이 이제 틀렸다고 판단했다. 경찰이 잡아 일으키자마자 어머니는 가방 속에서 유인물 다발을 꺼내 머리 위로 집어던졌다. “파벨 블라소프의 법정 연설문입니다. 노동자의 진실을 말했다고 유형에 처해진 파벨의 연설문입니다. 여러분!”
경찰과 헌병들이 몰려들었다. 어머니는 그들의 제지를 뿌리치면서 가방을 뒤집어 유인물을 마구 던졌다. 사람들이 제각기 유인물을 낚아채 품 속이며 주머니에 감추는 것이 보였다. 경찰의 주먹이 날아왔다. 정신이 아득했다. 그러나 혼신의 힘을 다해 목청껏 외쳤다. 발길질이 날아왔다. 가슴을 한 대 맞은 어머니는 비틀거리면서 긴 의자에 주저앉았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많은 헌병들이 몰려왔고 어머니는 헌병들에 둘러싸여 목이며 등이며 어깨, 머리 할 것 없이 마구 구타를 당하면서 피범벅이 되었다. 귀가 먹먹해지고 목이 아팠고 숨이 막혔다. 바닥이 발아래 내려앉으며 흔들렸다. 그러나 눈만은 감기지 않고 수많은 다른 눈들이 날카로운 불꽃으로 타오르며 그녀를 지켜보고 있음을 보았다.
<“어머니(Мать)”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막심 고리키 지음, 글쓴이 이강은교수>
▣ 저 자 막심 고리키 Максим Горький(1968∼1936)
차르체제가 무너진 혁명적 시기에 인간의 대한 강한 믿음을 작품 속에 구현했다. 러시아 하층민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프롤레타리아 작가.
새벽녘 러시아 들판을 걸어가는 빈털털이
어린 페쉬코프는 끈적이는 진흙더미 위에 서서 아버지의 관이 내려진 구덩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덩이의 밑바닥에는 물이 차 있고, 개구리들도 있었다. 두 마리는 벌써 누런 관 뚜껑 위에 기어올라와 있었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수건에 머리를 파묻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이 무덤 속으로 흙을 퍼 넣기 시작했다. 개구리들이 관 위에서 튀어 올라 구덩이 벽 쪽으로 도망쳤지만, 흙덩어리가 개구리들을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만 가자.” 외할머니가 말했지만 페쉬코프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페쉬코프의 손을 잡고 공동묘지를 빠져 나오면서 물었다. “넌 왜 울지 않니? 울었어야 했는데.” 페쉬코프와 할머니는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마차 속에서 페쉬코프가 물었다. “개구리들이 기어 나올 수 있을까?” 외할머니가 대답했다. “아니, 나오지 못할 거다. 주여 저들을 도우소서!”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Пешков)는 어릴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외할머니 손에 양육된다.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2년을 겨우 구경했을 따름이다. 어려서부터 넝마주이나 신발가게 점원, 제도사 견습공, 식당 접시닦이, 성상화가의 견습공 등으로 생계를 꾸리며 ‘세상 속으로’ 나왔다. 어린 페쉬코프가 세상에 나와 지방 소도시 니즈니 노브고로드와 볼가강 연안의 도시와 농촌에서 체험한 러시아는 출구 없는 암울한 세계였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묻힌 무덤 속에서 기어 나오려고 몸부림치던 개구리들, 그러나 현실의 가혹한 힘에 의해 다시 무덤 속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개구리들이 처한 현실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린 페쉬코프는 그 개구리들을 지켜보았고, 그렇게 러시아 현실을 체험했다.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면서 페쉬코프가 보고 느낀 것은 19세기 말 봉건적 차르 체제가 해체되면서 새로 등장한 자본주의하의 러시아였다. 봉건적 신분의 질곡에서 풀려났으나 자본주의 경제질서 속에서 ‘돈’이라는 더욱 가혹한 족쇄를 차게 된 빈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황폐해가는 인간성과 무의미한 일상을 체험하면서 페쉬코프는 무기력과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건강하고 낙천적인 인간애를 확신하면서 왜 그들의 삶이 그럴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졌고, 점차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인식해갔다.
프롤레타리아 작가 고리키의 외침
프랑스의 전기작가인 로맹 롤랑은 막심 고리키를 일러 “양 세기를 잇는 다리와도 같은 작가”라고 했다. 실제로 고리키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살았다. 하지만 이 말은 고리키가 단순히 양 세기에 걸쳐 살았다는 뜻이 아니다. 고리키는 구 러시아(전제주의 정권과 봉건적 러시아)와 신 러시아(러시아 혁명에 의해 사회주의 소련으로 변모한)의 역사적 격변을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 결코 물러나지 않고 맞서 싸웠던 작가다. 따라서 그의 문학 속에는 러시아 사람들의 현실과 더불어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 러시아 혁명과정이 깊게 배어 있다. 고리키의 문학이 19세기와 20세기, 봉건사회와 근대사회, 현대사회의 문제와 그 속에서의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 바로 그것이 그를 양 세기를 잇는 다리와도 같은 작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고리키는 1892년 단편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재탄생한다. 기존 문학에서 다루지 않았던 민중의 생활상을 애정을 담아 사실적으로 그린 고리키의 단편들은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문학을 기다리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와 세계 문학에 신선한 목소리였다. 여러 단편에서 자신이 체험한 러시아 현실과 삶의 모습을 그리면서 일약 러시아 대표작가가 된 고리키는 중편 「첼카쉬」, 희곡 『밑바닥』을 통해 대가 반열에 올랐고, 장편 『어머니』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고리키는 평생 깊은 우정을 나눈 레닌을 비롯해 혁명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러시아 혁명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지켜보면서 그것은 자신이 꿈꿨던 혁명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러시아의 전제주의에 맞서 싸웠던 고리키는 이번에는 혁명 과정에 나타난 볼셰비키의 잔혹함을 가차없이 비판했고 이 때문에 소비에트 정권과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이탈리아로 망명했지만 사회주의 정권과 서유럽 파시즘 정권의 갈등 속에서 불가피하게 다시 소련으로 귀국했다. 스탈린의 초청으로 귀국한 고리키는 ‘소련 작가 동맹’의 초대 의장으로 추대됐고 소련 문학의 아버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 시기 고리키의 복잡한 내면과 문학세계, 정치적 태도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쟁이 존재한다. 그러나 고리키가 평생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새로운 삶을 꿈꿨다는 점, 그리고 그의 작품에는 그와 같은 열망이 살아 숨쉰다는 점, 러시아 현대사의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싸워왔다는 점, 현실의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고자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처럼 고리키 문학은 역사적 사회적 진실과 인간적 진실의 탐구이며 그 투쟁의 기록이다. 동시에 그 투쟁의 한가운데서 성장한 작가의 풍부하고 복잡한 고뇌와 문제의식이 함께 담겨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더재미있게읽기위하여
고리키의 『어머니』는 최초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으로 평가받는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현실에서 한 노동자의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가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20세기 인류 문화의 가장 논쟁적 현상 중의 하나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자본의 권력 사이에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모순, 그리고 그 속에서 노동자가 변혁의 주체로 성장해가는 필연적인 과정을 잘 보여줬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 대립, 자본가와 권력의 결탁, 노동자 사이의 분열과 조직화,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정의 성격,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의 대립과 일치, 일반 도시민의 다양한 삶과 의식이 역동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파벨과 안드레이, 나타샤, 사샤의 우정과 사랑 등도 변혁운동에 임하는 개인의 의식과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이 모든 내용은 무의식적 시선으로부터 점차 의식적이고 확신에 찬 시선으로 바뀌는 어머니 펠라게야의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진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혈연적 사랑이 동지적 관계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아들의 법정 최후 진술문을 동지들에게 전하기 위해 길을 나선 펠라게야는 역 광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되며 쓰러지지만 이 광경을 바라보는 수많은 민중의 불타는 눈길이 펠라게야와 파벨, 그리고 그 동지들의 투쟁이 전민중에게 확산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만든다.
『어머니』에서 제시하는 혁명 이념, 그리고 그 이념을 수용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인간적 갈등과 인간의 성장과정, 개인의 운명들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것이다. 자본주의의 성장 과정에서 모순의 축적은 단기간에 무의식 노동자를 의식적 혁명적 노동자로 성장시킨다. 특히 조직화된 당으로부터 체계적 이념이 제공되는 경우에는 의식의 고양이 폭발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1905년 러시아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빠른 발전과 더불어 대도시와 인근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 파업이 잇따랐고,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혁명 이념이 급속히 전파됐으며, 러ㆍ일 전쟁 패배로 인해 차르 전제 정권은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여기에 가퐁 신부가 이끄는 권리 청원 운동이 무자비하게 진압(‘피의 일요일’ 사건)되면서 러시아는 혁명적 정세로 접어들었고, 결국 러시아 1차 혁명이 일어난다. 이 혁명 과정에 고리키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고리키는 1차 혁명 이후 외국으로 망명해 미국에 잠시 체류할 때 『어머니』를 구상하고 곧바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어머니』는 작가가 적극적으로 차리즘과 맞서 싸우고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지도 노선을 수용했던 시기의 매우 고양된 파토스를 담고 있다.
고리키 자신도 이 작품을 서둘러 썼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이 서두름에 대해 블라지미르 레닌은 “이 책은 아주 시의에 적절한 필요한 책입니다. 당연히 서둘러야지요. 지금 많은 노동자들이 무의식적이고 자연발생적으로 혁명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데, 이제 그들이 『어머니』를 읽음으로써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레닌의 말이 혁명 운동가로서의 목적의식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문학작품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문제에 대한 지적인 것 또한 사실이다.
노동계급이 양적으로 늘어나고 또 이들이 감당하는 자본주의 모순이 질적으로 심화돼 갈 때, 노동계급은 개인으로서나 집단으로서 전위적인 혁명 활동 조직으로부터 이념적 지도를 받아들일 수 있고, 이 이념은 때로 개인의 발전단계나 자연스러운 집단의 성장과정을 앞서는 것일 수 있으며 일종의 신념 형태로 주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어머니』에는 문학작품에서 외부로부터 주어진 이념과 생생한 주인공의 삶이 결합하는 문제, 그리고 거기서 나타나는 이념과 삶의 차이와 갈등의 문제, 보편적 역사과정의 필연성과 이 필연성을 인식해가는 구체적 개인과 집단들의 불균등한 발전의 형상화 문제 등 현대 문학이 안은 예술적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문학 작품은 우리가 익혀서 배워야 하는 객관적 지식의 창고가 아니다. 또한 학자의 냉정한 연구대상만도 아니다. 게다가 특정한 시대, 특정한 독자들에게 특정한 의미로만 읽혀지는 것도 아니다. 문학 작품의 진정한 창조성은 무엇보다 책을 읽는 과정에 독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면서 스스로 의미를 확산시켜갈 때 살아난다. 『어머니』는 오늘날 우리 현실과 우리의 삶의 본질을 성찰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풍부하고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어머니 펠라게야의 시선이 점점 우리 자신의 시선과 일치하고, 또 우리의 시선이 펠라게야의 운명을 통과하면서 스스로의 새로운 시선으로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여전히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적이면서 예술적이요, 예술적이면서 이데올로기적인 새롭고도 문제적인 오늘의 작품이 아닐 수 없다.
▣ 고리키의생애와작품
1868 러시아의 공업도시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탄생 목수인 아버지와 염색공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의 장남
1871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 외할아버지 집에서 성장. 외할머니의 종교적이고 민중적이며 자연친화적인 성품에 큰 영향을 받음.
1878 외할아버지가 파산하면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온갖 생업에 종사.
1879 어머니 사망. 러시아 문학과 세계문학 등 문학작품을 읽기 시작.
1884 카잔대학에 입학하고자 하였으나 거부됨. 대학생, 지식인과 어울리며 인민주의 운동에 가 담.
1887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느껴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폐를 다치고 살아남.
1888-91 인민주의 활동, 노동자 조직과 연관된 혐의로 체포 후 석방. 코롤렌코의 지도로 문학 수업. 러시아 전역을 떠돌며 여행.
1892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통해 작가로 등단
1895 「첼카쉬」로 큰 성공을 거두고 필명을 고리키로 사용. 낭만적이며 현실적인 수많 은 단편 집필.
1998 단편집이 큰 성공을 거두어 러시아 전역에 필명을 떨침.
1899-1901톨스토이, 체홉과의 만남. 장편 『포마 고르제예프』, 『세사람』발표. 강력한 정부비판으로 감시와 체포의 위험 속에 생활.
1902 러시아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선임되나 황제에 의해 취소됨. 이에 대한 항의로 코
롤렌코와 체홉이 명예회원직 사임. 희곡 「소시민」, 「밑바닥」 발표와 공연. 큰 반응을 얻음. 이후 공연금지 처분됨.
1905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한 정부 비판과 혁명적 활동 혐의로 체포
1906 망명. 러시아의 억압적 상황을 구제하기 위한 기금 모금을 위해 미국 방문 후 이탈리아 카 프리 섬에 정착.
1906-13 이탈리아 머물며 활발한 창작생활, 러시아 사민당과 교류.『어머니』, 『고백』,
『이탈리아 이야기』, 『오쿠로프 도시』 연작, 자전적 삼부작 「어린시절」, 「세상속으로」등 안정적인 작품활동으로 많은 작품 발표
1917-18 볼셰비키와의 갈등. 『러시아 순례』 등 발표. 러시아 문화와 문학 진흥 활동에 큰 기여
1922 출국하여 유럽 여행 뒤에 이탈리아 소렌토에 정착.『1922-1924년 단편들』, 『아르타모노프 가의 사람들』, 『나의 대학』(1924), 최후의 장편 『클림 삼킨의 생애』등 집필
1928 소비에트 여행
1932 영구 귀국, 소비에트 작가동맹 의장으로 피선
1936 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