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홍당무!

[중산] 2012. 2. 21. 08:28

 

빨간 머리에 주근깨투성이인 홍당무는 형과 누나, 그리고 엄마에게서 늘 놀림을 받는다. 홍당무는 유난히 자신만 미워하는 엄마 르삑 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유일하게 홍당무의 편이 되어주는 아버지 르삑 씨는 사업으로 인해 바쁘고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서 홍당무의 힘이 되는 기회가 많지 않다. 식사를 할 때도 형과 누나는 자유롭게 더 먹지만 홍당무는 더 먹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엄마의 기분이 좋은 날은 음식을 더 먹을 수 있지만 평소에는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놀려대는 형 훼릭스와 정은 많지만 형과 함께 동조하며 역시 홍당무를 놀려대는 누나 에르네스띤느. 그들의 중심에서 홍당무를 남처럼 대하는 엄마 르삑 부인…. 그 소용돌이 안에서 천진하고 순수하게 어린 시절을 헤쳐가는 홍당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내용 요약)

 

 

홍당무, 쥘 르나르 지음

 

 

암탉

 

르삑 부인은 닭장 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하고 3남매 중 맏인 훼릭스에게 문을 닫으라고 시켰다. 겁 많고 게으른 훼릭스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자 에르네스띤느에게 시켰다. 누나도 마찬가지로 무서워서 싫다며 독서에 빠져 있다. 그러자 르삑 부인은 빨간 머리카락에 온통 주근깨 투성이인 막내아들홍당무에게 시킨다. 기다렸다는 듯 형과 누나가 홍당무는 힘이 세고 용감하다고 부추긴다. 이런 부추김에 홍당무는 용감해진다.

 

 

칭찬을 듣고도 하지 않는다면 수치가 될 것 같았다. 홍당무는 혼자서 두려움을 참고 어둠 속에서 닭장 문을 닫았다. 팔 다리에 날개라도 달린 듯 마구 달려 따뜻하고 환한 집안으로 들어오자, 진흙과 비를 맞아 더럽혀진 누더기 옷을 벗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듯한 기분이었다. 빙긋 웃으며 장한 듯한 얼굴로 칭찬해 줄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형인 훼릭스도 누나인 에르네스띤느도 조용히 책만 읽고 있었다. 르삑 부인은 늘 하는 말투로 홍당무에게 말했다. 홍당무야, 이젠 밤마다 네가 닭장 문을 닫으러 가거라.

 

 

 

자고새

르삑 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냥 보따리를 쏟아 놓았다. 자고새 두 마리가 있었다. 3남매에게는 저마다 맡은 일이 있다. 훼릭스는 사냥감의 숫자를 석판에 기록하고, 누나는 껍질을 벗기거나 털을 뽑는다. 한편 홍당무는 사냥감의 마지막 숨을 끊어버리는 일을 맡고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아이라는 평판 때문에 이런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홍당무는 형과 누나가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자 르삑 부인이 채근했다. 괜히 하기 싫은 척하지마. 속으론 좋으면서 뭘.

 

 

자고새 두 마리는 몸을 비틀면서 완강히 버티었다. 홍당무는 무릎 사이에 자고새를 꼭 끼워 누르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보려는 듯 위쪽을 쳐다보면서 더욱 힘껏 졸랐다. 이번에는 자고새들의 두 발을 붙잡고 새의 머리를 구두의 콧등으로 냅다 후려친다. 노련한 사냥꾼인 르삑 씨도 가슴이 섬뜩해져서 방에서 나갔다. 홍당무는 죽은 자고새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새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르삑 부인은 꼼꼼하게 뒤져보더니 진작 뺏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형 훼릭스가 말했다. 확실히 딴 때보다 잘 안 됐어.

 

 

 

가족들이 모두 거실에 모여 있다. 홍당무는 바닥에 주저앉아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추억에 잠겨 있었다. 그때 자고 있던 개 삐람므가 으르렁댔다. 개는 계속해서 더욱 세차게 짖어댄다. 르삑 씨네 식구들은 화가 나서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모두들 개를 한번씩 차고 때리건만 개는 엉금엉금 기며 막무가내이다. 한편 홍당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집을 둘러보러 나갔다. 아마도 뜨내기가 얼쩡거리거나 좀 도둑이 담장을 넘으려 기웃거리는지도 모른다. 홍당무는 어두컴컴하고 긴 복도를 걸어갔다. 두 팔을 문 쪽으로 뻗어서 와지끈 소리를 내며 빗장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을 열지는 않았다. 전 같으면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뛰어나가, 휘파람을 불고 노래를 부르며 발까지 꽝꽝 굴러가며 오히려 상대편을 서늘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꾀를 부린다. 부모님은 홍당무가 용감하게 바깥을 구석구석 살피면서 충실한 경비원처럼 집 주위를 돌아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약아빠져서 문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또 한번 가냘픈 손으로 무거운 빗장을 흔들어댄다. 이런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두들 그가 멀리까지 돌아보고 왔으며 자기의 의무를 다한 걸로 생각하겠지! 그는 식구들을 안심시키려고 단숨에 달려갔다. 그런데 홍당무가 없는 동안에 삐람므가 짖기를 그쳤으므로 마음을 놓아 르삑 네 가족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홍당무는 늘 하듯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개가 잠꼬대를 한 거야!

 

 

 

무서운 꿈

낮에도 내내 나쁜 점 투성이인 홍당무였지만, 밤엔 밤대로 코를 고는 나쁜 버릇이 있다. 심술을 부리려고 일부러 코를 고는 것인지도 모른다. 큰 방에는 2개의 침대가 놓여 있다. 하나는 르삑 씨의 것이고, 또 하나는 홍당무가 어머니와 나란히 벽 쪽에 누워 자게 된다. 자기 전에 코를 골지 않기 위하여 숨쉬기 연습을 해본다. 그런데도 잠이 들자마자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곤다. 습관이란 어쩔 수 없다. 그러자 당장 르삑 부인은 엉덩이의 가장 살이 많은 부분을 피가 맺힐 만큼 손톱을 세워 꼬집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수단을 쓰고 있다. 홍당무의 비명에 르삑 씨가 놀라 잠에서 깬다. 르삑 부인은 홍당무가 무서운 꿈을 꾸어서 그렇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녀는 유모처럼 낮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흥얼거린다. 인도의 자장가 같다. 홍당무는 덮쳐올 어머니의 손톱을 피하려고,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가리고는 큰 침대 속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어머니 옆의 벽 쪽에 누워서.

 

 

 

좀 지저분한 이야기라 죄송합니다만

다른 아이들 같으면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벌써 영세를 받았을 나이인데도, 홍당무는 아직도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르삑 부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뿐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침대로 수프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아주 야릇한 수프로, 르삑 부인은 수프에다 그것을 약간 풀어 넣었던 것이다. 뭐, 아주 약간 뿐이다. 베갯머리에는 형과 누나가 얄궂은 얼굴로 홍당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호만 하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릴 기세다. 르삑 부인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서 아들의 입에 수프를 넣어준다. 천천히 마지막 수저를 들어서 입을 벌리고 있는 홍당무의 목구멍까지 수프를 집어넣었다. 자꾸 강제로 먹여 놓고 나서 홍당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에이! 너는 똥을 먹었어. 그것도 간밤에 싼 제 것을. 그럴 줄 알고 있었어. 홍당무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얼굴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건 예사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예사롭게 대하게 되면, 우스운 것도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토끼

이젠 네 몫의 메론은 없다. 게다가 날 닮아서 메론을 싫어하지? 좋고 싫은 것도, 이런 식으로 강제적이다. 주로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섣불리 먹기라도 하는 때에는 호되게 당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홍당무는 잘 참는다. 자기만이 알고 있는 곳에서 괴상한 일로 자신을 흐뭇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디저트로 나온 메론이 남자 르삑 부인은 홍당무에게 찌꺼기를 토끼에게 갖다 주라고 시켰다. 토끼장으로 들어서자 토끼들이 홍당무를 둘러싸고 모여들었다. , 좀 기다려. 사이좋게 나눠 먹자구나.

 

 

풀과 양배추들이 뒤범벅이 되어 쌓여져 있는 그 위에 홍당무는 털썩 주저앉았다. 토끼들에게는 메론 씨를 털어주고, 자기는 국물을 쭉쭉 빨았다. 발효하기 전의 포도 물 못지 않았다. 그런 다음 가족들이 먹다가 남긴 껍질에 붙은 살을, 말하자면 아직 입 안에서 녹일 수 있는 것은 조금도 남기지 않고 먹었다. 그리고 파란 껍질은 쪼그리고 앉은 토끼들에게 주었다. 토끼장의 문은 닫혀 있다. 모두 낮잠 잘 시간에 햇빛이 토끼장 지붕 틈으로 새어 들어와 그 밑을 시원한 그늘로 만들고 있다.

 

 

 

곡괭이

형 훼릭스와 홍당무가 곡괭이로 밭을 일구고 있다. 형의 것은 대장간에서 주문한 쇠로 된 것이지만, 홍당무의 것은 손수 만든 나무 곡괭이다. 그러다가 돌연 홍당무가 이마 한가운데를 곡괭이로 얻어맞았다. 그런데도 형을 침대로 옮겨 살며시 눕혀야만 했다. 형이 동생의 피를 보고 까무러쳤기 때문이다. 온 식구가 그리로 몰려와서, 걱정스러운 듯 한숨짓고 있다. 홍당무는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다. 홍당무의 이마에 헝겊을 감고 있는데, 벌써 빨갛게 피가 물들어 있었다. 누나는 버터에 구멍을 뚫어 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아팠지만 홍당무는 울지 않았다. 왜냐면 그래 봤자 별수 없다고 모두가 말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형이 눈을 떴다. 형은 단지 무서웠을 뿐이지 아무 일도 없었다. 얼굴에 차차 핏기가 돌아오자, 걱정과 불안이 모두의 마음에서 사라져갔다. 밤낮 이렇다니까. 르삑 부인이 홍당무에게 말했다. 왜 조심하지 않았니, 이 바보야?

 

 

 

엽총

르삑 씨가 사냥을 떠나는 두 아들에게 말했다. 엽총은 두 사람에 한 자루만 있으면 돼. 사이좋은 형제는 뭐든지 같이 쓰는 거다. 형은 번갈아 쓰겠다고 다짐했다. 홍당무는 믿지 않았다. 르삑 씨가 자루에서 총을 꺼내 누가 가지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형은 홍당무에게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르삑 씨는 엽총을 홍당무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형이 홍당무에게 빈손으로 돌아올 일은 없겠느냐고 물었다. 홍당무는 자신 있다고 대답했다.

 

새떼를 발견하고 홍당무가 살그머니 다가가자 형은 거리가 멀다고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홍당무가 믿으려하지 않자 형은 자기 말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느닷없이 얼굴을 내밀었다. 새들은 깜짝 놀라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작은 나뭇가지 끝에 앉아 있었다. 나뭇가지는 휘어져서 새는 흔들거리고 있다. 꼬리를 흔들고 머리를 움직이고 배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홍당무가 말했다.

 

됐다. 저 놈 같으면 쏠 수 있어. 확실해.

 

그러자 형이 홍당무의 총을 뺐으며 말했다. 비켜 봐, 정말 이 놈은 근사한데, 이건 꼭 맞을 거야. 빨리 총을 이리 줘. 총을 뺏겨 빈털터리가 된 홍당무는 하품을 하고 있다. 새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마치 요술 같았다. 홍당무는 아까까지 총을 소중하게 가슴에 껴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을 빼앗은 형은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되돌아왔다. 형이 말했다. 오늘은 내가 잡았으니, 내일은 네가 잡아. 또 내일이라고? 언제나 전날에는 그렇게 약속을 했잖아. 좋아, 그보다도 다른 새를 찾아야지. 이번에는 내가 쏘아볼게. 안 돼. 벌써 늦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자.

 

 

두 사냥꾼은 집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가끔 농부를 만났는데 모두들 말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설마 아버지를 쏜 것은 아니겠지? 홍당무는 기분이 좋아져서 아까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둘은 으스대며 돌아왔다. 르삑 씨는 두 아들의 모습을 보자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홍당무야, 아직도 총을 메고 있구나. 그럼, 네가 죽 가지고 있었니? , 대부분….

 

 

 

술잔

홍당무는 이제부터 식사 때에 포도주를 마시지 않기로 했다. 2, 3일 동안에 마시는 버릇을 없애 버렸으므로 집안 식구나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사연인즉 이렇다. 어느 날 르삑 부인이 포도주를 따라주자 홍당무는 목이 마르지 않아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르삑 부인은 다른 사람이 먹을 게 많아졌다며 좋아했다. 이튿날도 홍당무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 그러자 모두들 놀라고 말았다. 르삑 씨가 말했다.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거야. 낙타도 타지 않고 혼자서 사막을 헤멜 때 말이다. 형과 누나는 홍당무가 언제부터 다시 마시게 될 것인가 내기를 했다. 그러자 홍당무는 두 사람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졌다. 르삑 부인은 여전히 술잔을 내놓지 않았고, 홍당무도 잔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비꼬는 칭찬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도 무관심하게 들어 넘길 따름이었다.

 

 

한편 홍당무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는 동안에 고통스러워지겠지 하고 걱정했는데, 고집이나 인내로 꼭 지켜 나가기만 하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쓰라린 괴로움을 스스로 떠맡아서 모험을 해볼 작정으로 시작했었는데, 괴롭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몸도 오히려 좋아졌을 정도였다. 목마른 것뿐만 아니라, 배고픈 것도 견뎌 보이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밥 같은 건 먹지 않고 공기로만 어떻게 살아갈 수 없을까. 벌써 술잔 같은 건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벌써 오래 전부터 술잔은 필요 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하녀 오노리느가 그 속에다 촛대를 닦는 붉은 가루약을 가득 담고 말았다.

 

 

 

나팔

르삑 씨가 파리에서 돌아오며 선물을 가져왔다. 형과 누나는 밤새 기다리던 것을 받아들고 기뻐했다. 아버지는 등 뒤로 감추고 짓궂게 홍당무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네 차례다. 나팔이냐 아니면 권총이냐? 홍당무는 개구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나팔을 갖고 싶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홍당무는 늘 주위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자기 또래의 아이들은 권총이나 긴 칼 또는 전쟁놀이의 장난감이 아니면 진짜 노는 기분이 안 난다고. 따라서 아버지는 홍당무가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싶은 나이가 됐기 때문에 알맞은 선물을 사 오신 것이다. 홍당무는 아버지의 기분을 확실히 알아맞혔다는 듯이 당돌하게 권총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르삑 씨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권총 쪽이 좋니! 너도 그렇게 변했구나. 얼떨떨해진 홍당무는 즉시 바꾸어서 말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장난삼아 말했을 뿐이에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난 아주 싫어요. 권총 같은 건. 자, 빨리 나팔이나 주세요. 난 나팔 부는 게 제일 좋아요. 그러자 르삑 부인이 야단을 쳤다. 그렇다면 왜 거짓말을 했니? 아버지를 골탕 먹이려고 그랬지? 나팔이 좋으면서 권총이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거짓말을 한 벌로, 권총도 나팔도 주지 않겠다.

 

하얀 속옷을 개켜 둔, 벽장 꼭대기 서랍 속 위에 빨간 술 세 개와 금빛 술이 있는 깃발에 싸인 홍당무의 나팔은 나팔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당무의 손에 닿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은 채 숨도 쉬지 못하고 마치 마지막 심판 날의 나팔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뜨

하인 오노리느 대신에 아가뜨가 왔다. 그녀 덕분으로 르삑 씨 집안의 관심은 2, 3일 동안 자신한테서 떠나 이 아가씨 쪽으로 옮겨갈 것 같다. 모두들 커다란 부엌에서 식사를 한다. 아가뜨는 팔에 냅킨을 걸고 아궁이에서 찬장으로, 찬장에서 테이블로 언제라도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조용히 걷는다는 것은 아예 이 아가씨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말이 너무 빠르고 웃는 소리도 너무 컸다. 무엇을 하건 지나치게 열중하는 것이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몫은 르삑 부인이 담아 준다. 형과 누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홍당무의 차례다. 그는 식탁 맨 끝에 앉아 있다. 홍당무는 절대로 더 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마치 더는 못 먹게 되어 있는 것 같다. 한 그릇으로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줄까?하고 물으면 더 받는다. 포도주는 마시지 않고 그는 좋아하지도 않는 밥으로 배를 채운다. 집안에서 단 한 사람, 밥을 좋아하는 르삑 부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형이나 누나는 훨씬 더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었다. 더 먹고 싶으면, 자기 접시를 요리 접시 쪽으로 가져가서 더 담아 온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이상할 것은 없다. 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그런 것뿐이다.

 

 

아가뜨는 역시 르삑 씨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신의 눈치 빠름을 보여 주인어른의 환심을 사서 유능한 하녀로 인정받겠다고 있는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르삑 씨는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을 먹기 시작했다. 이때다 하고 찬장으로 뛰어간 그녀는 다섯 근이나 되는 칼로 자르지도 않은 바퀴 모양의 왕관 빵을 가지고 와서 냉큼 내놓았다. 주인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미리 눈치 챘다는 생각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르삑 씨는 냅킨을 접고는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모자를 쓰더니 담배를 피우러 뜰로 나갔다. 그는 식사를 끝내면 더는 먹지 않는 편이었다. 아가뜨는 다섯 근의 커다란 바퀴 모양의 빵을 안고 그 자리에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바퀴 만드는 회사의 선전용 인형과 똑같은 모습으로.

 

 

 

예정표

어때, 질렸지? 부엌에서 아가뜨와 단둘이 되자 홍당무는 곧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낙심하면 안돼. 이런 일은 늘 있는 거니까. 그런데 병을 여러 개 가지고 어딜 가는 거지? 헛간에요. 홍당무 도련님. 헛간으로 가는 계단이 낡아서 여자들에게는 위험하니까 내가 갈게. 그리고 전부터 헛간 볼일은 내가 맡아 하기로 했어. 아침에 나는 개장을 열어 개에게 수프를 줘. 저녁 때도 역시 내가 휘파람을 불어서 자러 오게 하고. 한눈을 파느라고 좀처럼 안 돌아올 때는 기다리고 있어야 해.

 

그리고 엄마와의 약속으로 닭장 문은 언제나 내가 잠그게 되어 있어. 풀을 뽑는 일도 내가 해. 그리고 뽑은 풀은 가축에게 먹이는 거야. 아빠가 잡아온 사냥감이 살아 있으면 내가 목을 비틀지. 너는 에르네스띤느 누나와 함께 털을 뽑는 거야. 생선 배도 내가 가르지. 창자를 빼내고 공기주머니는 발로 밟아서 터트리지만, 비늘을 벗기고 샘에서 물을 긷는 것은 네가 할 일이야. 실타래를 풀 때도 내가 도와줄게. 커피도 내가 빻아.

 

 

날씨가 좋으면 매일 두세 시간은 강에 가서 빨래를 해야 해. 네가 하는 일 중에서 이것이 가장 힘들 거야. 딱하긴 하지만 이것만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 하지만 틈이 있으면, 가끔 거들어줄게. 울타리 위에 빨래를 널 때라든가 말이야. 방학 동안엔 일을 나눠서 하자. 누나와 형과 내가 기숙사로 돌아가면 너의 일도 줄어들 거야. 말하자면 언제나 똑같다는 뜻이지.

 

 

그리고 네가 정말 진저리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은 이 집에 단 한사람도 없어. 누나는 천사처럼 상냥하고, 형은 훌륭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 아버지는 사리판단이 분명한 사람이고, 어머니는 보기 드문 요리 전문가이고 말이야. 가족 가운데 가장 말썽꾸러기는 틀림없이 날 거야. 하지만 사실은 나 역시 다른 사람과 다를 게 없어. 게다가 나도 모든 일의 이치는 생각할 줄 알거든. 나쁜 점은 고치기도 하지. 거리낌 없이 말해 주기만 하면 차츰 좋아질 거야. 만일 조금만이라도 그럴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아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어. 그리고 이제부터는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마. 다른 사람들처럼 홍당무라고 불러 줘. 하지만 너의 할머니 오노리느처럼 주책없이 말을 걸지는 마. 오노리느가 늘 그렇게 말을 거는 건 질색이었어. 그래서 나는 그녀를 몹시 싫어했어.

 

 

 

설날

눈이 내리고 있다. 설날이 한결 복된 날이 되기 위해선 눈이 내려야 하는 법이다. 르삑 부인은 조심스럽게 안마당 문의 빗장을 걸어 두었다.(설날에 아이들이 돌아다니며 돈이나 과자를 얻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르삑 부인은 그들을 맞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벌써 개구쟁이들이 문고리를 흔들고 있었다. 홍당무는 침대에서 뛰어 내렸다. 비누도 안 가지고 마당의 여물통으로 세수하러 갔다. 여물통의 얼음을 깨야 했다. 홍당무는 간신히 얼굴만 적시는 시늉만 하고 말았다. 언제나 모두로부터 더러운 아이로 찍혀 있다. 멋을 부렸을 때도 역시 그런 말을 듣는다. 그러므로 가장 더러운 곳을 닦아 내는 정도로 그친다.

 

 

명절 의식에 어울리게 그는 상쾌한 기분으로 의젓하게 형과 누나의 뒤에 섰다. 형과 누나는 부모님에게 키스하며 새해 복 많이 받고 건강하시라고 인사했다. 그런데 홍당무는 모자 안에서 편지를 한 장 꺼내는 것이다. 겉봉을 붙인 봉투에는 사랑하는 부모님께라고 씌어져 있다. 홍당무가 르삑 부인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봉투를 뜯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르삑 씨가 말했다. 그럼 난 아무것도 없구나. 나보다 엄마가 더 좋단 말이구나. 그렇다면 조금 있다가 네 주머니 속을 뒤져보렴. 그 속에는 10수우짜리 새 돈이 없을 거야! 잠깐만 기다려요. 아빠. 엄마가 곧 끝날 테니. 홍당무는 황급히 말했다. 르삑 씨는 편지를 연거푸 읽었다. 늘 하는 식으로 !,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할 일을 다 해버린 편지는 벌써 아무런 쓸모가 없다. 누나와 형은 번갈아 편지를 집어 들고 맞춤법이 틀린 것을 찾아내더니 홍당무에게 건네준다. 홍당무는 어색한 웃음을 띠고 편지를 모자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선물이 나누어졌다. 르삑 부인은 홍당무에게 설탕으로 만든 파이프를 선물했다. 홍당무는 선물이 무엇인지 아는 체 하지 않았다. 르삑 부인이 지난번의 나팔처럼 안 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홍당무는 다소곳한 기쁨으로 얼굴을 빛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부모님의 눈앞에서 한 대 피워 보려고 생각했다. 훼릭스와 에르네스띤느의 부러워하는 눈초리를 받으면서(어쨌든 사람이란 모든 걸 독차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빨간 설탕으로 만든 파이프를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들고서 몸을 뒤로 젖히고는 왼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입을 오므리고 두 뺨이 쑥 들어가도록 힘껏 소리를 내며 빨아들인다. 그리고 나서 하늘까지 닿도록 크게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이거 참 좋은데. 연기가 아주 잘 통하는군.

 

 

 

가는 길 오는 길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던 날, 역마차에서 뛰어내려 저 멀리 부모님의 모습을 보자, 홍당무는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두 분을 맞이하러 달려가야 할까?) 그는 망설였다. 너무 야단스러운 것 같아 조금 더 가다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 (모자는 언제 벗으면 될까? 아빠와 엄마, 어느 분에게 먼저 키스해야 할까?) 그런데 형 훼릭스와 누나 에르네스띤느는 먼저 달려가서 부모님의 따뜻한 손길을 둘이서 나누어 가지고 말았다. 홍당무가 갔을 때는 벌써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르삑 부인은 홍당무에게 다음부터는 아빠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라고 부른 다음 똑바로 악수를 해야 더 점잖다고 타이르며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 꼭 한 번만, 비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홍당무는 방학이 되어 돌아오니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 곧잘 마음과는 정반대의 표정을 짓는 것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기숙사로 돌아가는 날, 멀리서 역마차의 방울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르삑 부인은 아이들한테 달려들어 두 팔로 한꺼번에 꼭 껴안는다. 그런데 홍당무만은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 그는 참을성 있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한쪽 손은 마차 손잡이 끈을 쥐고는 작별 인사말도 생각해 두고 있었다. 견딜 수 없이 슬픈 나머지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를 낮은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안녕히. 어머님! 의젓하게 인사를 하는 홍당무. 아니. 이 녀석이 제법 뭐라도 된 것 같구나. 이상한 아이야. 왜, 딴 애들처럼 엄마라고 부르기가 거북하니? 이런 아이가 또 어디 있을까? 아직 코흘리개 애송이가 남과는 다르게 굴려고 하다니! 그러면서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꼭 한 번만, 비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형 훼릭스와 홍당무가 상 마르크 기숙사에서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오자, 르삑 부인은 곧장 둘에게 발을 씻게 했다. 기숙사에서는 발을 한번도 씻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홍당무의 발은 형보다 새까맣다. 왜 그럴까. 둘은 나란히 언제나 같은 규칙 아래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생활하고 있는데…. 홍당무는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요술쟁이처럼 잽싸게 물 속에 발을 집어넣는다. 양동이 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형의 다리 사이로 언제 끼어들었는지 모를 만큼 재빨랐다. 그러자 얼마 안 가서 땟국이 4개의 발 위로 헝겊 조각처럼 퍼져갔다.

 

르삑 씨는 여느 때처럼 방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아들들의 성적표를, 특히 교장선생이 직접 쓴 소견을 몇 번이나 연거푸 읽고 있다. 형 훼릭스에 대해서는 경솔하지만, 머리가 영리해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다., 또 홍당무에 대해서는 하겠다는 생각을 갖기만 하면, 곧 뛰어난 성적을 나타낼 것이다. 다만 하겠다는 생각을 항상 보여주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다. 홍당무가 꼴에 뛰어난 성적을 나타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가족들은 모두 우스웠다. 홍당무는 모두가 자기를 살펴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르삑 씨는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싫어하는 성품이어서 아들을 다시 만난 기쁨을 장난으로 밖에는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쪽으로 갈 때는 홍당무의 귀를 손가락으로 툭 퉁겼고, 돌아올 때는 팔꿈치로 툭 쳤다. 그러자 홍당무는 깔깔 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르삑 씨는 홍당무의 더벅머리 속에 손을 쑤셔 넣어 이라도 잡겠다는 듯이 손톱을 탁탁 퉁겼다. 르삑 씨가 가장 즐겨하는 장난인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손톱으로 정말 이를 한 마리 죽였다. 르삑 씨는 말했다. 잡았다. 잡았어. 아아! 이렇게 더러울 수가 있담? 에르네스띤느, 빨리 대야를 가지고 오너라. 이제 네 일거리가 생겼다. 르삑 부인이 화가 난 듯 말했다. 그리하여 이 사냥이 벌어졌다. 형 훼릭스가 먼저 빗겨달라고 조르자 에르네스띤느는 훼릭스의 머리를 참빗으로 빗어주었다. 일곱 마리 정도의 이가 나왔다. 형은 모두 홍당무에게서 옮겨온 것이라며 홍당무를 나무랐다. 드디어 홍당무의 차례가 돌아왔다. 빗을 한번 대자마자, 홍당무는 훼릭스 이상이었다. 에르네스띤느는 마치 이의 집을 만난 것처럼 생각했지만, 정말은 이가 우글거리고 있는 곳의 일부분을 아무렇게나 빗질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모두 홍당무를 둘러쌌다. 에르네스띤느는 점점 신이 났다. 르삑 부인이 몇 번이나 기가 막힌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어머나, 어머나! 이러다간 삽과 갈퀴를 가지고 와야겠구나.

 

 

홍당무는 이가 쌓여있는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것을 햇빛 아래 놓고는 지켜보고 있는데 근시의 심술궂은 나넷드 할머니가 다가왔다. 도대체 이게 뭐냐? 홍당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파리냐? 나는 이젠 눈이 똑똑히 보이지 않는다. 우리 아들 삐에르가 안경을 사다주며 좋으련만. 그런데 너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니? 얘야, 나는 네가 가엾다. 틀림없이 식구들이 너를 못살게 구는 모양이지? 홍당무는 힐끔 주위를 둘러보고 어머니가 못 들은 것을 알자 마음을 놓고는 마리 나넷드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에요. 할머니한테 상관 있는 이야긴가요? 할머니 일이나 걱정하세요. 내 일은 상관 말고요.

 

 

 

헛간

이 조그마한 헛간은 닭이나 토끼나 돼지가 번갈아 가며 살아왔는데, 지금은 텅 비어 있어 여름 방학 동안은 홍당무가 전적으로 소유권을 쥐고 있다. 그는 쉽게 거기로 들어간다. 헛간에는 이제 문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 있으면 참으로 마음이 편하다. 귀찮은 장난감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공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친다. 미끈미끈한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오그린 채 손으로 무릎을 끌어않고 둥지 위에 앉아 있으면, 아늑한 기분이 된다. 정말 이보다 더 자리를 작게 잡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는 세상 일을 잊어버린다. 이제 세상 같은 것은 두렵지 않다. 그의 마음을 헝클어 놓는 것은 우르릉 번쩍하며 벼락 치는 소리뿐일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경보가 울린다. 부르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말소리가 들린다. 홍당무는 어디 있나? 홍당무는 어디 있어? 누군가의 머리가 기웃거리며 나타난다. 홍당무는 작은 공처럼 몸을 웅크려서 땅바닥과 벽 사이로 틀어박힌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입을 벌린 채, 시선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두 개의 눈이 어둠 속을 살피고 있는 것을 느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멀어져 갔다. 홍당무의 몸은 긴장이 조금 풀려서 다시 편한 자세가 된다. 그의 공상은 또다시 긴 침묵의 길을 마구 달린다. 잠시 뒤 모래를 품어서 무거워진 한 줄기의 냇물처럼 그칠 줄 모르는 그의 공상은 경사진 곳이 없어지자, 물결이 멈추어 물웅덩이를 이루면서 괴고 만다.

 

 

 

대부(代父)

가끔 르삑 부인은 홍당무에게 대부를 만나러 가도 좋으며 자고 오는 것까지도 허락해 준다. 이 대부라는 사람은 성미가 까다로운 고독한 노인으로, 낚시를 하거나 포도밭을 손질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홍당무만은 귀여워해 준다. 왔구나, 이 개구쟁이! 내 낚싯대도 준비해 두셨어요? 둘이서 하나만 있으면 돼.

 

그러나 홍당무가 헛간을 열어보니 자기의 낚싯대도 고스란히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대부는 늘 그를 놀린다. 하지만 홍당무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다. 노인의 이런 버릇이 두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 일은 결코 없다. 이 노인이 예스라고 말할 때는 노우라는 뜻이며, 노우라고 할 때는 예스인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 된다. 이래서 두 사람은 늘 의좋은 친구이다.

 

 

두 사람은 낚시를 하러 간다. 홍당무는 망둥이를 잡은 것이 더 재미있다. 구두를 벗고 물 속에 들어가 발로 모래 바닥을 휘저어서 물을 흐려 놓는다. 그러면 바보 같은 망둥이가 얼른 몰려온다. 홍당무는 낚싯대를 던질 때마다 한 마리씩 낚아 올린다. 대부에게 큰 소리로 일일이 알릴 틈도 없을 정도다. 대부는 해가 머리 위에 왔을 때 점심을 먹으러 돌아가자고 한다. 그는 홍당무에게 흰 완두콩을 배불리 먹인다.

 

 

이건 정말 입안에서 슬슬 녹는걸. 엄마가 늘 만들어 주는 것도 맛없지는 않지만, 요즘은 나빠졌어요. 틀림없이 크림을 아껴서 그럴 거야. 네가 잘 먹는 걸 보니 즐겁구나. 엄마 앞에서는 틀림없이 배부르게 먹지 못할 테지? 모든 것이 엄마의 식욕에 달렸어요. 엄마가 배고프면 엄마의 배가 부를 때까지 먹게 해줘요. 엄마는 자기 접시에 담을 때, 나한테도 덤으로 주니까요. 엄마가 이제 그만 하면 나도 그만 일어서는 거예요. 더 달라고 말하려무나, 바보 같으니. 말하기는 쉽지요. 아저씨, 하지만 언제나 배는 덜 차는 게 좋은 거예요. 나한테 자식은 없지만 원숭이 엉덩이라도 핥아 주겠다. 만약에 그 원숭이가 내 자식이라면 말이야. 이런 기분 알겠지?

 

두 사람은 그날의 일과를 포도밭에서 끝냈다. 홍당무는 대부 아저씨가 땅을 파는 것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그 뒤를 따라가기도 하고, 포도덩굴 위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버드나무의 새순을 씹기도 했다.

 

 

 

샘터

홍당무는 대부와 함께 자는데,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방은 춥지만 홍당무는 곧 땀에 흠뻑 젖었다. 어쨌든 엄마 곁을 떠나서 잘 수 있게 된 셈이다. 엄마가 그렇게도 무서우냐? 그렇다기보다 엄마한테는 내가 그다지 무섭지 않나 봐요. 엄마는 말해요. 훼릭스는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에 때려서는 안 된다고요. 홍당무는 때려야 하지만 하고 말예요. 둘 다 잠이 오지 않았다. 홍당무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돌아눕는다. 숨이 답답해서 허덕였다. 대부 아저씨는 그것을 측은하게 여겼다. 홍당무가 잠이 들려고 할 때, 대부는 별안간 그의 팔을 잡았다.

 

 

꿈을 꾸었구나. 네가 아직도 샘터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지. 너는 그 샘터를 기억하고 있니? 홍당무는 벌써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홍당무가 샘터에 빠져 허우적댄 적이 있었다. 네가 물장구를 치는 소리에 겨우 잠이 깼지. 그래도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어. 얘야, 가엾게도 너는 펌프처럼 물을 토했단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1초만 늦었더라도 내가 끌어올렸을 때 죽었을 거야. 지금쯤은 먼 곳에 있겠지요. 방정맞은 소리 말아라. 하긴 나도 공연한 말을 했구나.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하룻밤도 편히 자본 적이 없단다. 이것이 천벌이겠지. 마땅한 일이야. 하지만 아저씨. 나는 그런 벌은 안 받아도 돼요. 졸려서 죽겠는걸요. 그래, 자거라. 얘야, 잘 자거라. 내가 자기를 바란다면, 아저씨, 이 손을 좀 놔주세요. 한잠 자고 나면 되돌려 줄게요. 다리도 치워 주세요. 누군가의 살이 닿으면 털이 까칠까칠해서 나는 잠을 못 자요.

 

 

 

올챙이

홍당무는 마당 한복판에서 혼자 놀고 있다. 한복판에 있으면 르삑 부인이 창문으로 이 아이를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당무는 얌전하게 노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 친구인 레미가 나타났다. 같은 또래의 남자아이인데, 절름발이인 데도 언제나 달음박질을 하고 싶어 한다. 레미는 올챙이를 잡으러 가자고 졸랐다. 홍당무는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다. 내가 왜 물어봐야 하니? 내가 물어 보면 허락을 안 해 주니까 그렇지. 레미가 르삑 부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르삑 부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분명히 안 된다라는 신호다. 잠깐만 더 기다려 봐. 우리 엄마는 언제나 처음에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나중에는 곧잘 생각이 바뀌니까 말이야. 그럼, 15분만 기다릴게. 그 이상은 안 돼.

 

둘은 시치미를 떼고, 계단 쪽을 유심히 보고 있다. 잠시 뒤, 홍당무가 레미를 쿡 찔렀다. 어때, 내가 말한 그대로지! 마침내 문이 열리며 르삑 부인이 층계를 내려온다. 홍당무에게 줄 소쿠리를 손에 들고 있다. 그러나 수상쩍은 눈으로 멈춰 섰다. 아니, 아직 있었니, 레미야? 벌써 간 줄 알았는데, 아빠한테 말해 주어야겠다. 여기서 빈둥거리고 있었다고 말이야. 틀림없이 야단을 맞을 거야. 아줌마, 하지만 홍당무가 기다리라고 그러는 걸 어떡해요. , 그게 정말이냐?

 

 

홍당무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시치미를 떼고 있기로 작정했다. 홍당무는 르삑 부인의 성격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또 어머니의 속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레미가 일을 망쳐놓았기 때문에, 홍당무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 얼굴을 돌리고 있다.

 

르삑 부인은 내려온 층계를 다시 올라갔다. 홍당무가 올챙이를 잡으러 갈 소쿠리를 그대로 손에 든 채. 일부러 날 호도를 비우고 가지고 온 소쿠리였는데. 레미는 도망가 저편 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날을 헛되이 망쳐 버린 홍당무는 이제 놀고 싶은 기분도 나지 않는다. 멋지게 놀 기회를 놓친 것이다. 슬슬 억울한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기다릴 뿐이다. 외롭고 서글픈 기분으로 지루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자기가 못나서 받게 되는 벌이라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극적 변화

 

1

르삑 부인 - 너 어딜 가려는 거냐?

홍당무 - (새 넥타이를 매고, 침을 뱉어 반들반들하게 구두를 닦고 있다.) 아빠하고 산책할 거예요.

르삑 부인 - 가면 안 돼, 알겠지? 가기만 해봐라.(오른손이 날아올 듯이 뒤로 간다.)

홍당무 - (낮은 목소리로) 알았어요.

 

 

2

홍당무 - (벽시계 옆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매를 안 맞는 일이다. 아빠는 엄마보다는 덜 해. 정확하게 계산해 보았단 말이야. 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3

르삑 씨 - (홍당무를 귀여워하고 있기는 하나 조금도 돌봐 주지 않는다. 일이 바빠서, 언제나 일에 쫓기고 있기 때문이다.)자, 가볼까!

홍당무 - 응, 나, 안 갈래.

르삑 씨 - 왜, 가기 싫으냐?

홍당무 - 가고 싶어요. 하지만 안 돼.

르삑 씨 - 까닭을 말해 봐라. 왜 그러느냐?

홍당무 - 아무것도 아니예요. 하지만 집에 있을래.

르삑 씨 - 아아, 그렇군. 또 그 변덕이 시작된 게로구나. 아무튼 널 당해낼 수가 없는 아이다. 너한테는 정말 두 손 다 들었어. 언젠 가고 싶다고 졸라대더니, 벌써 가고 싶지 않다니. 그래, 집에 있거라. 네 마음대로 울상이 되어서 말이다.

 

 

4

르삑 부인 - (부인은 언제나, 문 옆에 서서 남의 말을 엿듣는 나쁜 버릇이 있다.) 정말 가엾게시리! (징그러운 목소리로 홍당무의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면서 쥐어뜯는다.) 눈물이 글썽거리는구나. 그래, 아빠가 (르삑 씨 쪽을 살며시 본다.) 싫다는 걸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시든? 엄마는 그처럼 매정하게 들볶지는 않는단다. (르삑 씨 부부는 서로 등을 돌린다.)

 

 

5

홍당무 - (벽장 안, 입 안에 두 개의 손가락을 넣고 있다. 코 안에는 손가락 하나) 아무나 되고 싶어서 고아가 되는 것은 아니로구나.

 

 

 

최후의 말

저녁 때 르삑 부인은 기분이 언짢아서 누워 있었으므로 식사하러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들 잠자코 먹고 있는데 - 이것은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서로가 거북했다. 식사를 마치자 르삑 씨는 누가 함께 언덕으로 산책을 가겠느냐고 물었다. 홍당무는 아버지가 이런 방법으로 자기를 데리고 나가려는 것을 눈치 챈다. 여느 때처럼 의자를 벽 가로 옮겨 놓고 얌전하게 아버지를 따라간다. 틀림없이 아버지가 이것저것 묻겠지만, 당장은 그런 기색이 없다. 홍당무는 머리 속에서 무슨 말을 물을지, 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그것을 이모저모로 궁리해 본다. 얼마 안 되어 준비가 끝났다. 몹시 마음이 괴로웠으나 이젠 아무것도 후회할 건 없다. 낮에 그토록 엄청난 사건을 맛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 결심한 듯한 아버지의 말투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뭘 우물쭈물하고 있느냐? 엄마를 슬프게 한 아까의 행동은 어떻게 된 일이냐. 까닭을 말해 보려무나. 아빠, 난 오랫동안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제 분명히 해둬야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난 엄마를 좋아하지 않아요. 흐음! 그래 어떤 점이, 언제부터? 모든 것이 싫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그거 참. 야단났구나. 하지만 나한테만은 엄마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지 말해 다오.

 

 

홍당무라는 아이는 진심으로 남을 원망하지 못해요. 다만 토라져 보일 뿐이지. 그럴 때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되는 거예요. 토라질 만큼 토라지고 나면, 마음이 풀려 명랑한 게 구석에서 나오는 거예요. 특별히 관심을 가진 척 해서는 안돼요. 나는 가끔 겉으로 토라져 보일 때가 있어요. 하지만 분명히 말해 두는데, 마음속으로부터 분개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에 받는 모욕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어요. 엄마하고 헤어져 살고 싶어요. 일년에 두 달, 방학 때 만날 뿐이잖니? 방학 때도 기숙사에 있게 해주면 좋겠어요. 틀림없이 성적도 오를 거예요. 그렇게 할 수는 없어. 나는 이때까지 너를 네 형이나 누나와 똑같이 대해왔다. 누굴 특별히 어떻게 한다던가 하는 일은 결코 안 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작정이다. 그렇다면 학교를 그만두겠어요. 기숙사에서도 나와 버리고요. 아빠, 난 자살할 뻔했던 일도 있어요. 너무 허풍을 떨지 말아라. 홍당무야. 정말이에요, 아빠. 어제만 해도 나는 목을 매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넌 멀쩡히 있지 않니? 그러니 그런 생각은 없었던 것이 틀림없어. 그런데도 자살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고 잘난 척 으스대고 있구나. 이 세상에 오직 너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떤 운명도 나보단 나을 거예요. 나한테는 엄마가 있어요. 그런데 이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나 역시 싫어해요. 그럼, 나는 너의 엄마를 사랑하고 있는 줄 아니?

 

 

참다못한 르삑 씨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이 말을 듣자 홍당무는 눈을 들어 아버지를 쳐다본다. 더부룩한 아버지의 수염 속에 입이 너무 지껄인 것을 수줍어하듯 숨어 버렸다. 얼마동안 홍당무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맛보고 있는 남모를 기쁨과 힘껏 마주보고 절대로 놓지 않으려는 듯한 아버지와 아들의 손. 이런 것이 모두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만 했다. 이윽고 홍당무는 주먹을 불끈 쥐고 멀리 어둠 속에 고요히 잠드는 마을을 향해 번쩍 쳐들고 을러댄다. 그리고는 그쪽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심술궂은 여편네! 흥, 빈틈없는 심술쟁이 여편네! 난 정말 싫어. 그만둬! 르삑 씨가 말했다. 그래도 역시 네 엄마가 아니냐. 아아! 홍당무는 조심스럽게 여느 아이로 되돌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이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예요. 홍당무는 그후 다시금 르삑 가의 온순한 아들이 되었다.

 

<“홍당무”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쥘 르나르 지음>

 

저 자 쥘 르나르(Jules Renard, 18641910)

1864년 프랑스 중부에 있는 라바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시절을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는데 『홍당무는 그러한 르나르 자신의 소년시절에서 소재를 얻은 작품이다. 시와 소설을 쓰면서 5년 동안 「피가로 지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한 르나르는 홍당무를 발표, 일약 명성을 떨치게 된다. 『홍당무는 곧 희곡으로 각색되어 파리에서 상연되자마자 대단한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어로 번역이 되었다. 홍당무 외에도 르나르의 『포도밭의 포도농사』『박물지등도 큰 성공을 거둔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자연주의 전통을 계승했으나 감상을 배제한 냉혹한 눈으로 바라본 현실의 섬세한 인상을 간결하고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눈 덮인 지리산 천왕봉>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도시 이야기(The Tale of Two Cities)!  (0) 2012.02.21
위대한 유산  (0) 2012.02.21
프랑켄슈타인!  (0) 2012.02.21
변신!  (0) 2012.02.21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0) 2012.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