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지음
엉뚱하게도, 나는 부모님의 비문을 보면서 그분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버지는 네모난 얼굴에 건장한 체구였으며, 어머니는 하얀 얼굴에 주근깨가 박혔고 허약했으리라 생각했다. 부모님의 무덤 옆에는 다섯 개의 작은 비석이 나란히 서 있었다. 바로 내 동생들의 것이었다. 비석들을 보면 동생들은 연이어 태어났고 고만고만할 때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 마을은 바다에서 20마일이나 떨어진 강을 낀 습지대에 있었다. 습기 차고 추웠던 어느 저녁 나절 -내가 처음으로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한 때로 기억한다- 나는 쐐기풀이 뒤덮인 교회 앞 공터에 있었다. 그 음산한 풍경에 몸을 웅크린 채 훌쩍거리고 있을 때였다. “시끄러워!” 갑자기 무덤 사이에서 한 사나이가 나오며 소리쳤다. 잿빛 옷을 입고 있는 사나이는 발목에 족쇄를 차고 있었다. 온몸은 진흙투성이에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요 쥐새끼 같은 놈! 시끄럽게 굴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테다!” 사나이는 내 턱을 잡고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나이는 몹시 추웠던지 말할 때마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제발 살려 주세요.....!” 나는 겁에 질려 겨우 말했다. “이름이 뭐냐? 어디 사는 놈이냐?” 그러나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사나이는 나를 거꾸로 세웠다. 주머니를 털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먹다 남은 빵 쪼가리가 전부였다. “이 빵 쪼가리보다는 네 녀석 볼이 더 맛있겠구나.” 사나이는 나를 비석 위에 앉혀 놓았다. 그리곤 입을 벌려 빵조각을 우겨 넣었다. “넌 누구랑 사니?” “누나하고요. 대장장이 조 가저리 부인 말예요.” “대장장이!” 대장장이란 말에 사나이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나는 더욱 주눅이 들어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잘 들어, 네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니까. 너 줄칼이 뭔지 알지?” “....네에.” “먹을 게 뭔지도 알지? 음식 말이다.” “....네에.” “그럼 당장 가서 줄칼을 가지고 와. 먹을 것도. 안 가지고 오면 네 심장과 간을 빼 먹을 테니. 내일 아침까지 가지고 오면 살려 주지. 대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저기 저쪽에는 나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어. 그 사람은 어린애 간 빼 먹는 데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아무리 숨어도 소용없어. 사실 지금도 그 사람이 널 해칠까 봐 내가 보호하고 있는 거라고. 어때, 시키는 대로 할래?” 사나이의 소름끼치는 말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하느님이 널 때려죽일 거다.” 사나이는 비로소 비석 위에서 나를 내려놓았다. “가! 약속 잊지 말고!” 쐐기풀과 가시덤불이 뒤덮인 묘지 사이로 절룩거리며 가는 그를 보고 나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누나는 나보다 스무 살이나 위였다. 미인은 아니었으나 나를 길렀을 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정성을 다한다고 주위 사람들은 누나를 매우 좋게 생각했다. 누나에 비해 자형, 조 가저리는 잘생긴 편이었다. 푸른 눈빛에 금발의 고수머리가 보기 좋았고 성격도 온순했다. 그날 사나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집으로 뛰어들었을 때 대장간 문은 닫혀 있었다. 자형이 날 보고 말했다. “어디 갔다 왔니? 누나가 얼마나 찾았는데. 벌써 열세 번째나 나갔단다. 이번에는 타클러(‘나’를 때릴 때마다 사용하는 회초리)까지 들고 갔어.” 타클러라는 말에 나는 우뚝 섰다. 얼마나 많이 때렸던지 타클러는 아예 반질반질 길이 난 것이었다. 누나는 부엌 문을 와락 열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나를 밀쳤다. 나는 자형 쪽으로 나가떨어졌다. 자형이 얼른 내 앞에 나서서 누나를 막아 주었다. 한 바탕의 소동 끝에 누나는 회초리를 내려놓고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형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누나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몹시 배가 고팠다. 그러나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교회 앞 공터에서 만난 사나이를 위해 먹을 것을 챙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누나가 워낙 알뜰해서 우리 집에는 음식이 남는 법이 없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것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높은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나, 깊은 바다 속을 뛰어드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내 몫의 빵과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누나가 만들어 놓은 음식들을 훔쳐 챙긴 후 대장간에서 자형이 쓰는 줄칼 하나를 꺼내서 가슴에 품고 나는 안개 낀 늪지대로 달음질쳤다. 포병대 근처의 둔덕에서 사나이는 내 쪽으로 등을 댄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사나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먹을거리를 보면 무척 기뻐하리라. 사나이는 내 손길에 놀라 벌떡 일어나 도망쳤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가 찾던 사나이가 아니었다. 그 역시 남루한 잿빛 옷에 족쇄를 차고 있었지만 어제 만났던 그는 아니었다. 포병대 쪽으로 가니, 내가 찾던 사나이가 있었다. 잔뜩 몸을 움츠린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밤새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줄칼을 내밀었다. 그리곤 보자기를 풀었다. “혹시 누가 따라오지 않았겠지?” 게걸스럽게 먹는 중에도 사나이는 연신 주위를 돌아보고 귀를 기울였다. “저 혼자만 왔어요.” “좋아, 믿지. 만약 나처럼 쫓겨다니는 불쌍한 사람을 수색하는 데 네가 도움을 준다면 넌 사냥개나 다름없어.” 사나이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나는 사나이가 불쌍했다. 마치 우리 집 개가 음식을 먹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 사람이 먹을 건 없겠군요.” 순식간에 줄어든 음식을 보고 나는 아무래도 걱정스러웠다.
“누굴 봤다고?” 사나이가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아저씨랑 똑같은 사람 말예요. 옷도 아저씨랑 똑같이 입고 다리도 아저씨랑 똑같이 절었어요.” “그 친구 뭐 좀 특이한 점 없었니?” “얼굴에 상처가 많았어요.” “어디? 여기?” 사나이는 자신의 왼쪽 볼을 사정없이 때리면서 물었다. “네, 바로 거기요!” “바로 그 놈이군! 알았다! 얘, 거기 줄칼 좀 다오!” 사나이는 먹다 남은 음식을 웃옷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줄칼로 족쇄를 갈기 시작했다. 자기 다리를 나무토막 다루듯 함부로 줄칼질을 해대는 사나이를 보며 나는 다시 무섭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줄칼질을 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몰래 도망쳤다.
크리스마스 파티가 한창일 때 갑자기 나타난 군인들로 인해 파티는 엉망이 되었다. 자형과 파티에 참석했던 웹슬 씨는 군인들이 탈옥수들을 잡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함께 나섰고, 자형이 나를 데려가겠다고 했기 때문에 나 역시 그들과 함께 늪지대로 향했다. “난 그들을 찾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늪지대를 향해 가면서 나는 자형에게 속삭였다. 만약 그들이 나를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군인들을 데려왔다고 생각하겠지? 두려움을 느낀 나는 자형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사람 살려!” 비바람 소리 사이로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군인들은 뒤엉켜 싸우고 있는 2명의 탈옥수들을 발견했다. 탈옥수들은 피를 흘리며 숨을 헐떡거렸다. “분명히 알아두시오! 저자는 내가 잡은 거요! 내가 잡아서 당신들에게 넘겨준 거란 말욧!” 한 탈옥수가 하사에게 말했다. 나를 협박했던 바로 그 사나이였다. “같은 탈옥수 주제에 누가 누굴 잡아! 하긴 정상 참작은 되겠지.” 하사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바라는 건 정상 참작 따위가 아니오. 중요한 것은 저자를 잡은 게 바로 나라는 거요. 난 그걸로 충분히 만족하오.” 사나이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자가..... 날..... 죽이려..... 했소!” 다른 탈옥수가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했다. 그는 얼굴에 멍이 들었을 뿐 아니라 갈갈이 찢겨진 옷 사이로 드러난 몸도 엉망으로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내가 널 죽이려 했다고?” 사나이가 우스운 듯 크게 소리쳤다. “죽이려다 말았다고? 천만에! 난 네가 도망가려는 것을 막았을 뿐이야. 이제 감옥선(船)은 내 덕분에 널 다시 모시게 된 셈이지. 그런데 내가 널 죽이려 했다고? 왜? 끌고 가서 더 못살게 굴 수 있는데 내가 왜? 보시오, 난 족쇄도 풀었소. 저자만 아니면 멀리 도망칠 수 있었단 말이오. 저자는 날 이용하였소. 그런데 내가 저자를 자유롭게 해줄 리 있겠소? 저자는 타고난 거짓말쟁이오. 아마 죽을 때도 거짓말을 하면서 죽을 거요. 보시오, 저 비굴하고 음흉한 표정을. 우리가 재판을 받을 때도 그랬소.” 사나이는 새삼 화가 나는지 또 달려들 태세였다. “보시오, 저자는..... 반드시 날..... 죽일 거요!” 뺨에 멍이 든 탈옥수가 두려움으로 온몸을 떨었다.
“그만! 이제 횃불을 켜라!” 하사의 말에 군인 중 한 사람이 들고 있던 횃불을 꺼냈다. 그때 사나이와 나는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사나이는 나를 빤히 보았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할 말이 있소. 나 때문에 의심받을 몇몇 사람을 구하고 싶소. 오늘 새벽에 저 건넛마을에서 음식을 훔쳤소. 먹다 남은 파이였소. 술 조금하고. 대장장이 집이었소.” 갑자기 사나이가 하사에게 말했다. 외우고 있었던 것처럼 서슴없이 말했다. “대장장이 집이라고? 그런 일이 있었소?” 하사가 자형에게 물었다. “집사람이 그랬어요, 파이가 없어졌다고. 당신들이 들어오는 그 순간에 말이오. 그렇지, 핍?” “아, 당신이 대장장이오? 그렇다면 미안하오. 내가 당신 파이를 훔쳤소.” 사나이가 사과를 했다. “천만의 말씀이오. 배 고프면 무슨 짓을 못하겠소.” 자형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사나이가 감옥선으로 향하는 보트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잔뜩 웅크린 채 감옥선을 보았다. 감옥선은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떠 있었다. 수많은 녹슨 쇠고랑에 매여진 채였다.
장날이면 누나는 펌블추크 씨와 함께 장에 갔다. 물건 사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장이 있었던 날이 저물었을 때, 누나가 펌블추크 씨와 들어오면서 흥분해서 말했다. “이 애가 오늘 감사함을 모른다면 아마 평생토록 감사한 걸 모를 거예요.” 나는 영문을 모른 채 얼른 감사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말아. 그녀는 믿을 만 하니까.” “그녀라니?” “그럼 해비샴 양을 그녀라고 하지 그 남자라고 해? 미스 해비샴 양이 핍더러 놀러 오래.” 누나가 나를 쳐다보며 기분 좋은 듯 말했다. “놀러 가겠지? 안 가면 내가 일을 시킬 테니까.”
해비샴 양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굉장한 부자로 성격이 까다로워 은둔 생활을 하는 여자라고 했다. 그 큰 집에 온통 철조망을 쳐 놓은 채…. 누나는 나를 낚아채듯 세면대 속의 물통에 처박고 비누칠을 해서 문질렀다. 얼마나 거칠고 급하게 문지르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굴이 얼얼할 즈음 물을 끼얹고 수건으로 닦았다. 그런 다음 숨 돌릴 틈도 없이 옷을 갈아입힌 후 펌블추크 씨에게 넘겼다. 펌블추크 씨는 마치 경찰서장처럼 나를 인계받았다. 자형과 나는 그날 처음으로 떨어졌다. 처음 떨어지는 만큼 두렵고 슬펐다. 하늘의 별조차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펌블추크 씨 집에서 묵은 다음날 아침 해비샴 양의 집에 도착하자, 아주 아름답고 단정한 여자 아이가 나를 맞아주었다. 그녀는 나와 나이는 비슷해 보였지만 훨씬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녀는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매우 냉정하게 돌아서며 나를 한 방문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나는 조심스레 노크를 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한쪽에 도금한 커다란 거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옷을 갈아입는 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락의자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 앉아 있는 해비샴 양은 아주 기괴했다. 그녀는 하얀 레이스로 치장한 비단 옷에 하얀 구두, 하얀 화환, 흰 머리카락 등 온통 흰색으로 휘감고 있었다. 목과 손을 치장하고 있는 보석들도 흰색이었다. 반쯤 열려진 트렁크에 있는 옷가지, 손수건, 장갑, 꽃 등도 흰색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흰색은 아니었다. 좀 자세히 살펴보면 오래되어 제 빛을 잃은 채 누렇게 바랜 것들이었다. 젊은 시절 풍만한 몸에 입혀졌던 신부복은 이제 뼈와 가죽만 남은 몸에 헐렁하게 걸쳐져 있었다.
“누구냐?” “..... 핍이에요. 펌블추크 씨가 말씀하신.....”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고 대답했다. “가까이 오렴. 자세히 보자.” 그녀의 손목 시계는 9시 20분 전에 멈춰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안의 괘종시계도 9시 20분 전에 멈춰 있었다. “무섭지? 난 네가 태어난 이후 한 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단다. 내가 지금 뭘 만지고 있는지 아니?” “심장요.” “그래, 실연한 심장! 난 가끔 상상을 한단다. 연극 보는 상상을. 연극을 해보렴.”
당황하여 가만히 있는 나에게 해비샴 양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냐고 쏘아붙였다. “아니에요. 고집을 부리는 게 아녜요. 하지만 당장은 못하겠어요. 전 여기가 처음이고, 너무 신비스럽고 훌륭해서…” 내 말에 해비샴 양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너한테는 그렇게 새로운데 내게는 너무 익숙하구나. 너한테는 그렇게 훌륭한데 나한테는 너무 낡았구나. 너한테는 그렇게 신비한데 나한테는 너무 우울하구나. 에스텔러를 불러다오.”
해비샴 양은 에스텔러에게, 나와 카드 놀이를 하라고 시켰다. “얘하고요? 이 천한 일꾼하고요!” 에스텔러가 대뜸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아이 심장에 상처를 내렴.” 해비샴 양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는 해비샴 양 옆에서 카드 놀이를 했다. “얘는 네이브를 잭이라고 해요.” 첫 게임이 끝나기도 전에 에스텔러는 나를 경멸하며 말했다. “저 더러운 손하고 촌스러운 장화 좀 보세요.” 에스텔러의 말에 나는 얼른 손과 발을 감췄다. 처음으로 내 손과 발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수요일에 다시 오기로 하고 나는 해비샴 양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밖으로 나온 내게 에스텔러는 빵과 고기, 맥주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맥주는 직접 주지 않고 바닥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개에게 주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너무 창피하고 불쾌하여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에스텔러는 눈물을 보자 몹시 기뻐했다. 나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그리곤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에스텔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 번 흘끗 보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너무 비참해서 마구 소리 내어 울었다. 울면서 벽을 차고 머리칼을 잡아 뜯었다. 얼마 후 마음이 좀 가라앉아 나는 얼굴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빵과 고기는 먹을 만했고 맥주는 기운을 차리게 해 주었다.
에스텔러가 나를 내보내기 위해 열쇠를 가지고 왔다. “너 왜 이젠 안 우니?” “울기 싫으니까.” “아까는 울었잖아. 반 장님이 되도록 말야. 지금도 울고 싶지?” 에스텔러는 깔깔 웃으며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는 대책 없이 떠밀린 채 잠시 서 있었다. 곧 찰칵, 문 잠기는 소리가 났다. 집으로 오는 길에 해비샴 양 집에서 있었던 일들이 낱낱이 되새겨졌다. 내가 보잘것없는 일꾼이라는 것, 더러운 손에 투박한 장화를 신었다는 것, 그리고 네이브를 잭이라고 부른다는 것 등 나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식하고 비천하고 형편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남보다 성공하기 위해 몇 배 노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동네 간이학교를 다니며 공부도 하고 자형을 돕기도 하며 지내고 있었다. 하루는 자형을 데리고 오라는 누나의 심부름으로 마을의 술집에 들렀을 때, 한 낯선 사나이가 자형에게 럼주 한 잔을 사며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사나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의자를 다리에 올려놓았다. 그의 얼굴에 언뜻 알 수 없는 미소가 비쳤다. “이 고장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강 저쪽이 어째 쓸쓸해 보이는군요. 그곳에 집시나 부랑자들이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가끔 탈옥수들이 숨어들긴 하지만.”
자형과 웹슬 씨는 오래 전에 있었던 탈옥수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나이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총을 겨누듯 나를 보았다. 사나이는 나를 유심히 보았다. 럼주를 마시면서도 결코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럼주를 저을 때 숟가락이 아닌 줄칼로 젓는 것이었다. 그 줄칼을 보는 순간 나는 그것이 자형의 것임을 알았다. 나는 너무 놀라 그를 빤히 보았다. 그러나 사나이는 이제 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가저리 씨. 내 호주머니에 1실링 짜리 은전이 있는데 이 애한테 주고 싶소.” 사나이는 은전을 구겨진 종이에 싸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며 사나이의 눈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고는 끝까지 모르는 척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나는 갑자기 나타난 옛 친구 생각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 은전을 싼 종이가 1파운드 짜리 지폐 2장이라는 사실을 알자, 자형은 당장 돈을 돌려주려고 술집으로 달려갔다. 사나이가 이미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자형은 곧 돌아왔고 누나는 돈을 종이에 싸서 장식용 차 주전자 속에 넣어두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탈옥수와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쩌다 살풋 잠이 들다가도 내게 총을 겨누던 그의 모습과 줄칼이 자꾸 아른거렸다. 그때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해비샴 양 집을 방문해서, 해비샴 양 앞에서 에스텔러와 카드놀이를 하고 그녀를 부축한 채 양쪽 방을 오가고 에스텔러의 경멸을 받으며 헤어지는 일이 여덟 달인지 열 달인지 지속되었다. 그 동안 나는 해비샴 양과 많이 친해졌다. 해비샴 양은 내게 무엇을 배웠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묻기도 했다. 나는 자형의 견습공이 되고 싶다고 했다. 또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은근히 도와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무식한 것을 즐기는 듯 했다. 뿐만 아니라 해비샴 양은 내 수고에 대한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다. 약속도 없었다. 주는 것이라곤 오직 점심 식사뿐이었다. “에스텔러가 점점 예뻐지지?” 해비샴 양은 단둘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묻곤 했다. 그렇다고 하면 아주 좋아했다. 에스텔러의 차가운 태도에 내가 당황하면 그녀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더욱 비참하게 만들어라. 실연의 아픔을 겪게 해라. 나의 자랑, 나의 희망! 결코 동정하지 마라!”
그러던 어느 날 해비샴 양이 말했다. “이제부터 널 대장장이 견습공으로 만들어야겠다. 가서 네 자형 가저리를 데리고 오거라.” 이틀 후 자형은 해비샴 양의 집에 가기 위해 예복을 입었다. 나는 작업복을 입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토록 불편해 마지않는, 와이셔츠 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매는 것 등이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까닭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날 역시 에스텔러는, 우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길을 안내했다. 자형은 모자를 벗어 양손으로 붙들고 저울질하듯 서 있었다. 마치 한쪽이 조금이라도 무겁거나 덜 무거우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했다.
“아, 당신이 이애 자형인가 보구먼?” 해비샴 양이 화장대 의자에 앉은 채 우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형은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당신이 이애 자형이냐니까?” “그러니까, 내가 누나와 결혼할 때 난 총각이었단다.” 해비샴 양의 거듭된 질문에 자형은 엉뚱하게도 나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이 애를 당신 견습공으로 쓸 생각으로 키운 거요?” “그래 핍, 우린 친구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너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네가 항상 검댕이와 먼지 속에서 사는 게 불만이라면 지금이라도 말해 봐.” 해비샴 양은 자형에게 묻고 자형은 내게 대답했다. 나는 자형에게 직접 말하라고 눈짓을 했지만 헛일이었다. 나는 자형이 부끄러웠다. 더구나 해비샴 양 뒤에서 에스텔러가 킥킥거리는 것을 보았을 때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이 애를 가르치는 데 보수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나요?” 해비샴 양이 물었다. “자형, 왜 대답을 안 하세요!” 결국 나는 자형에게 소리치고 말았다. “핍, 그 문제엔 대답하고 싶지 않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잖니.” “그 동안 핍은 여기서 수업료를 벌었어요. 이 가방 속에 25기니가 있어요, 핍, 이걸 네 주인에게 줘라.” 해비샴 양이 옆에 있는 탁자에서 조그만 가방을 꺼내 주었다. “세상에, 이렇게 너그러울 수가! 핍, 받으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주는 거니 고맙게 받겠다.” 해비샴 양이 말했다. “잘 가거라, 핍, 에스텔러, 이 사람들을 내보내도록 해라.” “전 또 와야 하나요?” “아니, 이제부터 네 주인은 가저리 씨다.” 그날 밤 내 작은 침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정말 비참했다. 처음으로 대장장이라는 직업을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처럼 슬프고 참담한 일이 있을까. 나는 우리 집 응접실을 아늑하다고 생각했으며, 현관을 신전의 입구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해비샴 양의 집에 다닌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고 말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는 우리 집을 해비샴 양이나 에스텔러에게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내가 자형의 견습공이 된다면 틀림없이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검댕이에 파묻힌 내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드러내 불평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건대 그것은 참으로 기특한 일이었다. 그것은 오직 자형 덕분이었는데, 중간에 도망쳐 해군이나 육군이 되지 않은 이유도 내 자신이 충실해서라기보다 자형의 너그러운 성품 덕이었다. 그 시절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내가 가장 더럽고 추한 상태에 있을 때 에스텔러에게 들키는 것이었다. 자형과 함께 풀무질을 할 때면 해비샴 양과 에스텔러가 떠올랐다. 불길이 점점 거세지면 에스텔러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 속에서 나를 비웃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마다 나는 교회 마당을 서성이며 늪지대를 바라보았다. 바람 부는 늪의 전경이 어쩌면 내 앞날의 모습과 같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디, 난 신사가 되고 싶어.” 누군가의 습격에 의해 다쳐서 거의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는 누나를 자형에게 맡긴 채, 동네 간이 야간학교 친구였던 비디와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늪지대로 나갔다. “내가 너라면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겠어. 넌 너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니?” 비디가 물었다. “만족스럽지 않냐고? 난 한순간도 내 자신에 만족한 적이 없어! 난 내 직업과 생활이 지겨워! 오직 비참할 뿐이야!” 그 말을 듣고 비디가 딱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만약 내가 이 생활에 만족하고 어릴 적 반만이라도 대장간을 좋아한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 견습 기간이 끝나면 난 자형과 대장간 공동 경영자가 될 거고, 너와 짝이 되어 이렇게 산책을 하겠지.” “그래, 난 까다롭지 않으니까.” 비디가 말했다. 그 말이 썩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좋은 뜻으로 말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해비샴 양 집에 있는 여자를 사랑해. 신사가 되겠다는 것도 사실은 그녀 때문이야.” “복수하고 싶어서? 아니면 관심 끌고 싶어서? 복수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그녀를 무시하는 게 어떻겠니?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아니, 난 그녀가 네 관심을 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과연 비디는 현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에스텔러를 사랑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난 그녀를 사랑해!”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여름 날 저녁 늪지대는 무척 아름다웠다. 노을에 물드는 하늘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내가 건전하고 순수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까닭은 순전히 해비샴 양 때문이라고. 나는 비디가 아닌 에스텔러가 곁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틀림없이 나는 또 다시 짓밟히고 참담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디는 결코 나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아프게 하는 대신 자신이 아프고 마는 그런 여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에스텔러를 더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차츰 마음을 정리해 갔다. 비디가 에스텔러에 비해 월등히 훌륭하다는 것, 내 생활이나 처지가 부끄럽지 않다는 것, 장차 자형과 동업자가 되고 비디와는 친구가 되리라는 것 등이었다.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해비샴 양 집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일껏 다져 놓은 머릿속이 순식간에 흐트러지고 헛된 꿈에 마음이 부풀었다. 견습 기간이 끝나면 해비샴 양이 내게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 하는…….
견습공으로 일한 지 4년째 되던 어느 해 토요일 밤이었다. 두 번째로 해비샴의 집에 방문했을 때 만났었던 ‘제이거스’라는 사나이가 집으로 찾아왔다. 변호사인 그가 말했다. “이 아이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소.” 제이거스 씨의 말에 자형과 나는 서로 쳐다보았다. “이 일을 내게 의뢰한 분은 네가 이곳에서 벗어나 신사가 되길 원하신단다. 다시 말해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할 소년으로 말이다.” 나는 제이거스 씨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운이며, 꿈속에서나 상상하던 일이었다. “단, 조건이 있다. 네가 항상 핍이라는 이름을 쓸 것, 그분에 대해 물어보지 말 것. 그 분은 직접 네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싶어 하신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네가 먼저 물어서는 안 된다.”
그는, 역시 해비샴 양 집에서 만난 적이 있는 매튜를 나의 가정교사로 추천해주었다. 런던에 갈 수 있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당장이라도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제이거스 씨는 자형에게 물었다. “가저리, 당신은 분명히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고 했소. 다시 한 번 묻겠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요?” “물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자형이 분명하게 대답했다. “당신에게 보상을 하라고 내가 지시를 받았다면 어쩌겠소? 핍의 노동력을 잃어버리는 대가에 대한 보상 말이오.” “핍을 잃는 대신 보상을 받는다고요? 핍과 난 대장간에서 제일 친한 친구였소.”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자형이 말했다. “그렇지, 핍?”
나는 자형의 손길에서 증기망치를 떠올렸다. 사람을 쓰러뜨릴 수도 있고, 달걀 껍질과 같이 약한 것도 어루만질 수 있는 증기망치. “지금껏 우린 가장 친한 친구였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나는 자형을 고작 그렇게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자형이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 날 밤, 자형과 비디의 슬픔 어린 축하를 받고 난 후, 어릴 적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층의 내 방에서 앞으로 살아갈 방은 어떨지 들뜬 마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 순간 대장간과 해비샴 양의 집, 비디와 에스텔러 사이에서 느꼈던 혼란함이 새삼 느껴졌다.
나의 새로운 사회생활은 런던의 폐허에서 시작되었고, 그곳에서의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 곳에서 나온 후에도, 나는 도둑질을 하는 세탁부와 아벤저라고 하는 심부름꾼 사이에서 계속 고통을 겪었다. 나의 생활은 점차 빈곤해지고 빚은 자꾸만 늘어갔다. 그러던 중, ‘숲속의 방울새’라는 어리석은 신사들의 모임에 가입하게 되고, 에스텔러와 가끔 춤을 한 번씩 추는 것으로 허송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런던에서 한 번도 행복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단지 에스텔러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와 평생 동안 함께 지낼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에스텔러를 위해 ‘신사’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에스텔러는 ‘숲속의 방울새’ 그룹 중에서도 가장 둔한 인물인 드러믈과 결혼한다. 나는 깊은 절망과 무기력감에 빠졌다. 에스틸러는 “알아둬, 난 심장이 없어. 따뜻함이 없다는 거야. 동정심이나 감정 따위는 물론이고. 농담이 아냐. 혹시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되더라도 내 말을 잊지 마. 난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어.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단 말야.”라고 늘 말했었다. 하지만 난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심장이 없다면 어찌 그다지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나는 스물세 살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유산에 대한 소식은 없었다. 그 날 바람이 집 전체를 흔들었다. 마치 등대에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람 소리를 들으며 나는 템플 저택의 맨 끝 꼭대기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핍 군을 찾고 있습니다.” 아래쪽에서 굵직한 사나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불을 들어 사나이를 비추었더니, 항해자와 같은 60세쯤 되어 보이는 사나이였다. 어렸을 적 늪지대에서 내가 줄칼과 먹을 것을 구해다 주었던 그 죄수였다. 사나이는 나를 보더니 몹시 감격해했다. 바로 그 사나이가, 나의 후원자였던 것이다!
사나이는 나를 데려다 소파에 앉혔다. “그래, 내가 너를 신사로 만들었단다. 그때 난 돈을 벌면 몽땅 너에게 주리라 맹세했단다. 그래서 너를 위해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단다. 네가 일을 하지 않도록 내가 대신 열심히 했단다. 네게 부담 주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란다. 넌 추격을 당한 사람을 구해 주었어. 네가 구해준 그 사람은 벼락부자가 되었고. 그래서 널 신사로 만들었단다. 사실 내가 여기 온 것은 불법이란다. 들키면 바로 사형이지.” 나는 심한 혐오감으로 몸을 떨었다. 나는 그의 손이, 그가 나를 후원했던 그 돈들이 피로 물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프로비스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에게 새 옷을 입혀도 프로비스에게서 죄수의 인상을 지울 수는 없었다. 나는 그가 범죄인 명부에 나온 모든 범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그가 싫어졌다. 그의 모든 것이 거칠고 천박했다. 앉는 것, 입는 것, 먹고 마시는 것까지 죄수의 모습이었다. 나에게 베푼 모든 일과 그가 처한 상황을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서 도망가고 싶었다. 친구인 허버트에게 이러한 비밀을 털어놓자, 허버트는 그가 나를 위해 죽음을 무릅썼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기 전에 그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그 사연을 직접 물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프로비스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내가 일을 하던 때가 있었어. 노동도 하고 마차도 몰았지. 그러던 중 20년 전에 경마장에서 콤피슨이라는 사람을 사귀게 되었어. 늪지대에서 뒹굴며 싸웠던 그 사람말야. 그는 공립기술학교를 다닌 신사였단다, 얼굴도 잘 생겼지. 그가 나를 자신의 사업에 동참시켰어, 사기와 문서 위조 사업이었지. 그러다 일이 터지면 자신은 빠져나가고 대신 다른 사람을 집어넣는 수법이었지. 그는 날 흑인 노예처럼 부려먹었단다. 그런데도 난 늘 그에게 빚을 지고 있었으며 복종하던 신세였지. 콤피슨과 일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어. 항상 나만 걸려들고 재판을 받았어.
그러다 우리는 큰 사고를 쳤어. 도난당한 은행권을 유통시킨 거야. 콤피슨은 당장 변호사를 사고 연락을 끊었어. 그때 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어. 재판을 받을 때, 난 아주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콤피슨은 검은 양복에 하얀 포켓 손수건을 꽂고 나타난 거야. 아주 훌륭한 신사처럼 말이지. 증거물도 한결같이 내게 불리한 것들이었어. 증인들도 마찬가지였고. 모든 일은 내가 꾸미고 돈도 내가 다 받은 것으로 증언하는 거야. 콤피슨은 피고 진술 때도 머리를 썼어. 겸손한 척하기도 하고 시를 인용하기도 했지. 나는 “저자야말로 정말 악당입니다.”라고 했을 뿐이야. 그리고 콤피슨에게 말했어. 법정에서 나가면 얼굴을 박살내 버리겠다고. 그러자 콤피슨은 판사에게 보호를 요청하더군.
판결은 콤피슨이 징역 7년, 내가 14년으로 났지. 판사는 콤피슨에게 사람을 잘못 만나 이렇게 되었다고 동정했어. 그러나 내게는 못된 늙은이라고 욕하더군. 그 때 나는 콤피슨의 얼굴을 박살낼 수 있다면 내 얼굴이 뭉개져도 좋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마침 우리는 같은 감옥선을 타게 된거야. 나는 기회를 보고 있다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서 상처를 냈어. 그리곤 탈옥해서 늪지대에 숨어 있다가 너를 만났지. 그 때 네 덕분에 난 콤피슨이 탈옥한 것을 알았단다. 그래서 그를 잡아 다시 감옥선에 끌고 가려 했단다. 군인들이 나타나 빗나가고 말았지만. 그런데 그 일이 그에게는 오히려 좋게 작용했단다. 내가 무서워서 탈옥한 거라고 했거든. 자기를 죽이려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탈옥했다는 거야. 결국 그는 감형이 되고 나는 다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 받았지. 그 후로는 소식을 못 들었다. 살아 있다면 내가 죽었기를 바라겠지.”
나는 그를 몰래 도망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들을 집요하게 쫓던 콤피슨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매그위치(프로비스의 다른 이름) 또한 심한 상처를 입고 다시 체포되고 말았다. 나는 사형 선고를 받은, 그리고 상처로 죽어가는 매그위치 옆에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매그위치야말로 나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나를 자신의 존재보다 사랑하고 위했던 사람인 것이다. 매그위치는 투옥된 날부터 계속 아팠다. 그는 갈비뼈가 두 개나 부러지고 그 갈비뼈가 폐를 건드렸다. 그래서 그는 숨쉴 때마다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그에게 여러 가지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 책을 읽어 주었다. 그것이 내게 최우선의 의무였다. 나는 그를 보면서 그가 좋은 환경에 있었다면 훨씬 나은 사람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아무 집착이 없었으며 과거를 돌리려고 애쓰지 않았다. 모든 것에 겸손했고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당장 달려갔다. 그는 흰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누워 있었다. 핏기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내가 말을 붙이면 잠깐씩 표정이 밝아졌다.
다시 열흘 쯤 지났을 때였다. 그날 매그위치는 나를 보고 아주 반가워했다. 그때까지 보지 못한 밝은 얼굴이었다. “얘야, 난 네가 늦는 줄 알고 걱정했단다.” “항상 오던 시간에 왔는데요. 미리 와서 면회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어요.” “넌 항상 그랬지, 착한 내 아들.” “맞아요, 한 순간이라도 빼앗기고 싶지 않으니까요.” “고맙다, 착한 아가야! 고맙다, 신의 축복이 네게로! 넌 결코 날 저버리지 않았어. 내 아들이야. 무엇보다도 어려울 때 함께 있어줘서 고맙구나.”
그는 바로 누워서 힘겹게 숨을 쉬었다. 나는 그의 생명이 꺼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사랑하는 매그위치 아저씨, 꼭 할 말이 있어요. 제 말을 알아들으시겠어요?” 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눌렀다. “아저씨가 옛날에 잃어버린 아이가 있었지요?” 매그위치는 조금 세게 손을 눌렀다. 제이거스씨의 하녀로 있는 에스틸러와 꼭 닮은 여자를 알게 되면서, 나는 에스텔러의 출생을 알아보게 되었고, 에스텔러가 매그위치와 제이거스씨의 하녀 사이에서 생긴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 애가 살아 있어요. 멋진 숙녀로 자랐지요. 아주 아름다운 숙녀로요. 전 그녀를 사랑해요.” 그는 힘겹게 내 손을 끌어다가 입술에 대었다. 그리곤 다시 가슴으로 끌어내렸다. 잠시 후 그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신이여, 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매그위치의 전 재산은 몰수당했고, 나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친구인 허버트의 회사의 서기로 들어가 외국 생활을 하다가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나는, 누나가 죽은 후 비디와 결혼한 자형을 찾아갔다. 그리고 자형과 비디 사이의 아들 이름이 ‘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나의 가족들인 그들과 저녁을 먹고, 에스텔러를 생각하며 예전에 에스텔러와 해비샴 양이 살았던 새티스 저택의 터를 찾아보리라 생각했다. 에스텔러는 남편과 별거 중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학대했다고 했다. 그러다 말에 의해 빚어진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저택의 터에는 본채도 없고 양조장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정원의 담만 남아 있었다. 말끔히 치워진 공간에는 임시로 담장이 쳐져 있었다. 나는 집터를 돌아보았다. 달빛에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났다. 그때 사람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림자를 향해 가까이 갔다. 그림자는 돌아가려 하다가 멈칫했다. 그리곤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에스텔러!” 나는 놀라서 소리쳤다. “그래요, 에스텔러예요. 알아보겠어요, 많이 변했는데?” 에스텔러 말대로 그녀에게서 예전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아하고 매력이 있었다. 차고 거만했던 눈은 슬프고 부드럽게 변해 있었고 무감각했던 손은 정답게 변해 있었다.
“여긴 내 소유예요. 내가 포기하지 않은 단 하나의 재산이죠. 다른 것은 모두 내게서 떠났어요. 하지만 난 이 땅을 지켰어요. 아무리 어려워도 굳게 마음 먹고 팔지 않았죠.” “이 곳에 다시 집을 지을 건가요?” “그래야겠지요. 이곳이 더 변하기 전에 작별하려고 왔어요. 당신은 아직도 외국에 살고 있나요?” “그래요.” “사업은 잘 된다면서요?” “열심히 하고 있어요.”
“난 가끔 당신은 생각했어요. 최근에는 더 자주요. 난 오랫동안 어렵게 살았어요. 그때는 내가 버린 것들의 가치를 전혀 몰랐어요. 그러나 그것은 결코 버릴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당신은 내 마음에서 한시도 떠난 적이 없어요.” “나도 당신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어쨌든 이렇게 헤어지게 돼서 기쁘군요.” “헤어지는 게 기쁘다고요? 난 아직도 우리가 이별하던 순간을 생각하면 고통스러운데.”
“당신은 그 때 그렇게 말했죠. ‘신의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신이 너를 용서하길 바래.’하고 말예요. 그 말은 어떤 질책보다도 날 아프게 했어요. 핍, 예전처럼 날 대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가 아직도 친구라고 말해 주세요.” “우린 친구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했다. 에스텔러도 나를 좇아 일어섰다. “멀리 떨어지더라도 우린 친구예요.” 에스텔러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곳을 나왔다. 대장간을 떠나던 날 안개가 피어오르던 것처럼 그날도 안개가 피어올랐다. 나는 안개 속에서 에스텔러를 보았다.
▣ 독서 나침반Ⅰ - 개관
대중성도 있고 예술성도 뛰어나다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861년)은 핍이라는 어린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그린다. 국내에는 ‘위대한 유산’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제의 뜻은 ‘유산’ 자체가 아니라 ‘유산에 대한 큰 기대’이며, 동시에 당시 사회에 만연한 물질적 기대감을 가리킨다. 따라서 훌륭한 유산이라고 이해되기 쉬운 ‘위대한 유산’보다는 ‘막대한 유산’이 더 옳은 표현이라고 하겠다.
사회적 상승욕은 숱한 근대 서구 문학작품의 주제였는 바 이 작품 또한 ‘신사(紳士)되기’라는 차원에서 같은 주제를 다룬 성장소설이라 할 만하다. 디킨스 당대의 이상적 인간상인 신사는 구시대의 귀족적인 이상과 부르주아적 이상이 결합된 사람으로, 일정한 재산과 교양에다 ‘신사다운’ 덕목을 두루 갖춰야 했다. 이는 서유럽에서도 가장 먼저 시민혁명을 일으켰지만 귀족계급과 근대 시민계급의 부단한 타협을 통해 진행된 영국 근대사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신사는 일정한 재산과 사회적 신분에 따라 정해지는 지배집단으로서 계급사회 특유의 배타성과 가부장적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주인공인 핍은 대장장이인 자형(姉兄) 조 가저리의 도제로 몇 년을 보내다 런던으로 가서 신사 수업을 받게 된다. 이런 행운은 그가 어린 시절 우연히 도와주었던 탈옥수 매그위치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유형지(流刑地) 호주에서 크게 성공해 번 돈을 그에게 몰래 보내 주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핍은 자신의 후원자는 그가 짝사랑하는 에스텔러를 양녀로 기르는 미스 해비셤일 거라고 근거 없이 추정하며 자기기만의 길로 빠진다.
핍의 신사 수업은 진정으로 덕목과 실력을 갖추는 과정과 무관하다. 오히려 신사의 속물적 세계에 동화되어 가던 핍 앞에 어느 날 매그위치가 갑자기 나타난다. 핍은 그동안 자신을 후원해 준 사람이 매그위치라는 것을 알게 돼 큰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은인을 저버리지 않는 인간다움을 발휘한다. 회한 속에 큰 병에 걸려 누운 핍을 조가 멀리 찾아와 극진히 간호하고 심지어 빚까지 갚아 준다. 자신의 속물성을 뼈저리게 깨달은 핍은 외국에서 사업가로서 노력하여 성공하게 된다. 또 자신이 짝사랑하던 에스텔러가 첫 결혼에 실패한 뒤 과거와 달라진 모습을 보이자 다시 만나 사랑을 이룬다. 핍은 런던 사교계의 화려함 뒤에 숨은 차별과 착취의 현실을 통해 단련됨으로써 조의 세계가 가진 현실적인 무력함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계의 인간다움을 간직한 원숙한 인물로 남는 것이다.
어린 핍을 그리는 초반부를 제외하면 작품은 전체적으로 당대 사회의 낙관적 분위기와 판이한 환멸의 정조가 지배하며, 신사의 이상이 어떻게 탐욕이나 범죄와 직결되는지를 가차없이 해부한다. 물론 주인공의 결말이 오늘의 눈으로 볼 때 흡족하느냐는 점은 논란거리이다. 작가가 당대의 신사 개념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틀림없으나, 신사 이외의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는 없다. 이런 탐색에 대한 주문은 디킨스에게는 너무 무리한 것이지만, 21세기의 한국 독자라면 거기까지 나아가는 성찰을 통해 고전을 읽는 의의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 몇 가지 역본이 있으나 고전에 참맛을 제대로 옮긴 것은 없어 아쉬운 상황이다. (김명환,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독서나침반 Ⅱ
주인공 핍은 부모가 없는 고아로 누나의 손에 의해 길러진다. 핍은 대장장이인 매부 조 밑에서 견습공 노릇을 하며, 고독한 마을에서 살기 때문에 다른 사회를 전혀 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회는 여지없이 그에게로 다가온다. 그는 탈출한 죄수를 늪지대의 교회 무덤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핍이 경험한 최초의 사회와의 접촉이다. 그러나 핍은 최초의 접촉을 잊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로 말미암아 핍은 누나의 집에서 물건을 훔치는 경험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이 죄수와 핍과의 만남이 후에 얼마나 중요한 사건으로 전개되는가는 핍 자신도 독자도 알지 못한다.
한편 미스 해비샴은 그 동네의 은둔자로 수십 년 동안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자기의 어린 양녀와 놀아 줄 소년을 찾는다. 핍은 그 상대로 선택된다. 그녀는 태양을 피하여 바깥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온 방안의 공기는 곰팡내 나는 부패 그 자체이다. 그녀는 언제나 신부의 드레스를 입고 지내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녀는 결혼식 날에 신랑으로부터 배신당한 과거를 안고 있다. 해비샴은 그 쓰라린 과거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고집하며, 이는 자기 자신과 외부에 대한 복수일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복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해비샴의 억양은 핍과 다르며, 그녀의 태도도 상식에서 벗어난다. 이는 그녀의 기이한 복장과 더불어 일상의 틀에서 벗어난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해비샴의 양녀인 아름다운 에스텔러는 핍의 기대와는 달리 그를 멸시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핍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천한 혈통을 알게 한다.
핍은 해비샴이 자신을 상류계급으로 상승하게 해 줄 후원자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또한 핍은 에스텔러에게 매혹당한다. 그는 이런 환경 속에서 점점 파괴되어 가는데, 이는 해비샴이 에스텔러 안에 파괴의 도구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핍은 에스텔러를 처음 만나 그녀에게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비천한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기의 집, 자기의 직업, 또 자기를 지금까지 돌보아 준 친절한 매부에게까지 불만과 혐오를 품게 된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핍은 사회로부터 들어온 또 하나의 인물과 만나게 된다. 해비샴의 집에서 잠깐 본 후 동네의 술집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제이거스 변호사가 바로 그다. 핍은 제이거스와의 만남 후로 급격한 변모를 겪게 된다. 그에게는 장차 막대한 유산이 약속되어 있었다. 핍은 런던에서 신사 교육을 받고 신사의 생활을 하게 된다. 핍의 후원자는 지금까지 친절했던 매부 조에서 제이거스 변호사로 바뀐다. 제이거스를 따라 도착한 런던은 더럽고 좁고 흉했다. 이 부분의 런던에 대한 묘사는 디킨스 자신이 소년 시절 경험했던 런던의 모습과 같다.
핍은 런던에서의 생활에서 단 한 번도 행복한 시간을 갖지 못하지만, 여전히 에스텔러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와 평생 동안 함께 지낼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에스텔러는 디킨스 소설의 여러 여주인공들 중에 가장 매력적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도 핍과 마찬가지로 비천하고 형편없는 집안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핍이 늪지대에서 만났던 죄수이며, 어머니는 제이거스 집안의 가정부였다. 더군다나 에스텔러 자신도 신경쇠약에 걸린 여인의 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핍은 그런 에스텔러를 위해 ‘신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에스텔러는 어리석은 신사들이 모이는 ‘숲속의 방울새’ 그룹 중에서도 가장 둔한 인물인 드러믈과 결혼한다.
한편 핍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준 장본인은 미스 해비샴이 아니라 핍이 늪지대에서 도와주었던 죄수로 판명된다. 바로 그 죄수가 핍을 매부의 대장간에서 끄집어내어 허망한 희망의 사회에서 살도록 해 놓은 장본인이다. 사실 그는 자신이 핍을 ‘신사’로 만들어 놓았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핍은 죄수 매그위치가 바라는 것과 같은 신사가 되지는 못한다. 매그위치가 자기가 만든 신사를 보고 싶은 갈망 때문에 갖은 고생 끝에 핍을 찾아오지만 핍은 그가 싫게만 느껴진다. 단지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동정의 감정만을 느낄 뿐이다.
매그위치를 몰래 탈출시키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매그위치는 심한 상처를 입고 다시 체포된다. 상처입은 죄수의 침대 옆에서 핍은 비로소 ‘신사’가 되어가기 시작한다. 그에게서 애정 깊은 은인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조에게 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을 자책한다. 매그위치는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사형 집행을 받기 전에 죽는다. 또한 그의 중죄로 인하여 전재산이 국가에 몰수당한다. 핍이 물려받기로 되었던 유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큰 빚을 지고 만다. 그 동안 흥청망청 시간을 보낸 탓으로 특별한 기술이나 직업도 없는 형편이 되고 만다.
소년기의 핍은 누나 때문에 불행했고 미스 해비샴으로 인해 야심에 차 있었고, 에스텔러로 인해 좌절을 맛보았다. 또한 제이거스가 가져온 ‘위대한 유산’의 소식 때문에 유혹을 당했었다. 핍은 이러한 유혹과 좌절을 맛보면서 점차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깊이를 깨달아 간다. 이것이 바로 그를 신사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한편 그와 함께 신사의 과정을 밟은 허버트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무엇이 진짜 ‘신사’인가를 배운다. 마음으로부터 신사가 아닌 사람은 태도에서도 진짜 신사가 될 수 없다고 허버트는 믿고 있다. 핍이 에스텔러를 상류계급의 상징으로 쫓아다니는 반면에, 허버트는 일부러 돈 한푼 없는 클라라와 약혼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속해 있는 위선적인 계급에 도전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사는 귀족 태생의 드러믈도, 런던에서 신사 교육을 받은 핍도 아니다. 시골 대장간에서 묵묵히 정직한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핍의 매부 조가 바로 디킨스가 찾으려 한 신사이다. 제이거스가 핍을 데리러 와 그 동안 키워 준 데 대한 대가를 지불하려 했을 때 조는 당당히 거절한다. 그는 두 번 화를 내는데, 한 번은 자기 부인을 위해서였고 또 한 번은 어린 핍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비난받았을 때였다. 매부 조는 겉으로는 대장장이의 거친 완력으로 뭉친 인물이지만 내면에는 진정한 신사만이 가질 수 있는 온화함이 넘쳐흐른다. 그는 영원한 핍의 보호자이다.
매부 조와 더불어 진실한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비디이다. 그녀는 시골 학교의 말수 적은 선생이었으나 조의 부인이 공장의 조수 올릭에 의해 상처를 입고 누워 있을 때, 조의 집안사람들을 돌보아준다. 핍에게 언제나 좋은 충고를 해 주는 그녀는 결국 자신과 같은 유형의 인간인 매부 조의 아내가 된다. 핍이 오랜 방황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매부 조와 비디 사이에 난 아이를 ‘핍’이라고 이름지은 것이 다름아닌 자신에 대한 매부 조와 비디의 사랑의 표시임을 알게 된다. 핍은 매부에게서 위대하고 진실된 참인간을 보게 된다. 핍은 비로소 자신이 진정한 유산을 물려받았음을 깨닫게 된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디킨스의 독특한 풍자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신사의 본질은 물질적인 풍요나 인위적인 교육에 의해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바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디킨스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러한 감동을 느끼는 것도 그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아닐까.
▣ 작가 찰스 디킨스(1812. 2. 7 ~ 1870. 6. 9)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작품들은 성서와 셰익스피어의 작품 다음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그만큼 그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어서 국내에서도 이미 그의 작품 한둘쯤은 읽어보지 않은 독자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찰스 디킨스의 생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1812년 영국 남단에 있는 군사 항구인 포츠머스 근교에서 해군성 경리부 서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상냥하고 낙천적인 기질을 지녀 나쁜 사람이라는 평은 듣지 않았으나 약간 주책스럽고 가끔씩 무의식적이나마 신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하던 해군 경리부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던 사람의 딸로서 순진하고 마음은 착했으나 허영심이 많은 여성이었다. 한편 그의 할아버지는 남의 집 하인의 신분으로 있다가 출세하여 어느 거물급 인사의 청지기가 되었고, 그의 아내 즉 디킨스의 할머니도 오랫동안 하인의 신분에 머물러 있었다. 즉 디킨스의 선조대는 모두 남의 집의 고용인 출신이었다. 따라서 디킨스의 아버지가 정부의 관리가 되었고, 자기보다 가문이 좋은 집안의 딸과 결혼한 것은 확실히 그들 집안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아버지가 런던으로 전근되었고, 1817년에는 다시 켄트 주에 있는 항구 도시 채텀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채텀은 낡은 대회당이 있는 도시로서 체스터를 이웃하고 있고 석회질의 언덕이 많은 밝은 도시였다. 이곳의 거리와 풍물은 나이 어린 디킨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새겨 주었다. 당시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던 집은 지금도 시가지 한쪽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잉글랜드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켄트의 아늑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훗날 디킨스가 채텀 시대를 거의 유일한 행복했던 추억의 시절로서 그리워했던 것은, 당시 그의 가정생활이 순조로웠던 때문만은 아니고 이 고장 자체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824년 아버지가 다시 런던으로 전근한 무렵부터 집안 살림이 기울기 시작하더니 이어 파탄이 일어나, 디킨스는 구두약 공장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그러한 굴욕에 정신적 타격을 받는다. 정부 관리의 아들이었던 그가 한낱 어린 노동자가 된 것은 단지 그 자신만이 전락한 데 그치지 않고, 대대로 사회적 계층을 올라가려고 노력한 입신 과정이 갑자기 역전된 것이었다. 소설가 디킨스가 내포하고 있던 기묘한 아이러니가 이 일로 말미암아 싹트게 되었다. 소년 디킨스가 노동을 시작하면서 곧 아버지가 빚을 갚지 못해 투옥되자, 그는 대도시의 혼잡 속에서 고독감을 느끼게 되고 그의 정신적 성장은 현저하게 왜곡되었다. 수개월 후 부친이 석방되자, 그는 공장을 그만두고 비로소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1827년 디킨스는 어느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나 이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종종 연극을 구경 다니기도 하고 아무 목적 없이 거리를 방황하기도 했다. 약 2년 후 그는 마침내 신문사의 기자가 되었다.
디킨스는 소년 시절부터 고전을 탐독하면서 일찍부터 문학에 대한 눈을 떴는데, 여기에 기자 생활은 많은 여행과 만남을 통하여 세상에 대한 풍부한 관찰과 경험과 식견을 더해 주었다. 이 시기에 그가 보고 들은 풍속 스케치를 신문 잡지에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이것들을 모은 책이 곧 『보스의 스케치집』이다. 훗날 『데이비드 코퍼필드』 속에 도울러로 등장하는 소녀에게 연정을 품었던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그 소녀와의 사랑은 혼자만의 짝사랑처럼 되어 실연으로 끝나고 만다. 1836년 24세의 나이로 캐더린 호가드와 성급하게 결혼을 하지만, 성격적으로 맞지 않은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1836년과 1837년에 걸쳐 『보스의 스케치집』의 확대판이라 할 수 있는 『픽윅 페이퍼스』를 간행하는데, 이 책으로 디킨스는 명성을 얻게 된다. 곧이어 『올리버 트위스트』『니콜라스 니클비』『골동품 상점』『바나비 러지』를 출판하였다. 1842년에는 미국을 여행하며 느낀 인상기를 적은 『미국 기행』을 냈고, 이어 『크리스마스 책』 중 제1편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하여 계속하여 장편 소설『마틴 치즐위트』를 발표하였으며 이탈리아를 여행하고는『이탈리아의 정경』을 발표하였다.
1846년『돔비와 그 아들』을 쓸 무렵부터는 디킨스의 작품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녀작 이래로 동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웃에 대한 선린을 찬양해 온 디킨스는, 작가적 수련을 쌓아 올림에 따라 사물과 인간관계에 대한 눈이 날카로워지고 인간 사회의 실정을 깨달은 듯하다. 또 민중 속에서 태어난 그는 작가적 명성과 함께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자 자신의 입장이 민중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음을 깨닫게 된 듯도 하다. 초기의 ‘돈키호테’적인 선의는 버리지 못했지만 묘사가 어둡고 안타까운 초조감이 감돌게 된다. 그의 대표작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그의 작가적 경력의 중간쯤에 위치하며, 그와 같은 작품의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러한 작품의 변화가 균형 잡힌 작품성의 형성에 이바지했다.
1850년에는 주간 잡지인 <귀에 익은 말>을 창간하여 성공을 거둔다. 이 잡지는 그 후 10년 동안 계속하여 간행되었고, 디킨스는 이후 자신의 작품을 분책으로 내고 또 이 잡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어린이 영국사』『쓸쓸한 집』『고된 시기』『귀여운 도릿』 등이 있다. 디킨스는 잡지의 성공 등으로 그제야 사회적 명사가 되고, 금전적으로 부유해져 1855년에는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갯즈 힐 저택을 사기 위해 교섭을 벌인다. 한편 경제적인 성공은 그로 하여금 사회사업에도 손을 대게 했으나 그때부터 그의 내면생활은 차차 분열되는 듯한 양상을 보였다. 디킨스 자신도 이를 의식하고 자기 분열적 의식에서 탈출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1858년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공개 낭독을 시작했는데 크게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 해 아내와 별거를 시작했는데 최근의 고증에 의하면 아마추어 연극 상연 때에 출연시킨 젊은 여배우 엘렌 터너와의 스캔들이 그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개성이 없는 아내와의 무의미한 일상생활을 견딜 수 없어 하던 차에, 엘렌에게서 첫사랑의 아련함을 발견하고, ‘데이비드 코퍼필드’처럼 곧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낸 여자의 영상에 자신의 나이를 잊고 열중했다. 평온했던 가정생활을 파탄에 몰아넣고 미풍양속을 존중하는 시대정신에 거슬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이 시기의 작품은 차차 어두운 색채를 띠게 되는데,『두 도시 이야기』『위대한 유산』『우리들의 친구』『에드윈 드루드』 등의 장편소설과 수상 스케치집으로『비상용 여행자』등이 있다. 1867년부터 이듬해 건강의 악화로 의사로부터 활동을 금지당할 때까지 미국을 여행하며 각처에서 공개낭독을 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1870년 건강이 약간 호전되자 다시 공개낭독을 나섰으나 이때는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을 단독으로 알현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 해 6월부터『에드윈 드루드』를 분책으로 출판하기 시작했는데 예정의 채 반도 끝나기 전에 저녁 식탁에서 일어서다 갑자기 쓰러진 후 1870년 6월 9일 결국 의식불명인 채 사망하였다.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까지 디킨스는 문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으나 만년에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아이러닉한 인생의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느 면으로나 디킨스는 대중적 작가로서 현재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으며, 영국 문단의 대표적인 문인 중의 하나이다. 생전에 인기를 크게 떨쳤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널리 애독되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고 더욱 증대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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