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중산] 2012. 5. 25. 17:04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원하던 차를 갖게되면 행복하다는 것이다. 옷을 갖고 싶고 유럽에 가고 싶어 하다가 그것을 이루면 행복해한다.. 혹은 위대한 정치인을 꿈꾸다가 그것을 이루면 행복해한다.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즉 여러분이 말하는 행복은 무엇을 성취하거나 성공하는 것, 고귀한 사람이 되는 것,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얻을 수 있는한 여러분은 완벽하게 행복을 느낀다. 좌절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불행이 시작된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가 이렇게 살고 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의식하는 것, 충분히 가졌다고 의식하는 것이 행복인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의식하는 순간, 그건 이미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겸손하다고 의식하는 순간 이미 겸손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행복은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추구하면 우리를 비껴가는 것이 행복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다. 그리고 과거는 감각, 반응, 기억일 뿐이다. 우리는 물론 행복했던 과거를 기억한다. 과거는 행복을 떠올리게 만들어줄 수는 있어도 행복이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인식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인식은 기억의 반응일 뿐이다.

 

그런데 기억과 경험의 복합체인 마음이 과연 행복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인식자체가 경험하는 것을 방해한다. 의식은 오로지 더 많은 것에 대한 기억의 갈등과 더불어 다가온다.

하지만 행복은 더 많은 것에 대한 기억이 아니다. 갈등이 있는 곳에 행복이 없다.

 

생각은 모든 차원에서 기억의 반응이므로 언제나 갈등을 야기한다. 생각은 감각이며 감각은 행복이 아니다. 감각은 끊임없이 만족을 추구한다. 그 결과로 감각이 주어지지만 행복은 결과가 아니다. 행복은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물, 관계, 생각, 관념을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행복이 아니라 사물, 관계, 생각, 관념 등을 오히려 더 중시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면 행복 자체보다 그 수단이 더욱 중요한 것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부, 가족, 명예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면 그 수단이 목적을 파괴해버리기 때문이다.

 

사물, 관계, 생각, 관념이 무상하다는 점은 너무도 분명하다. 우리는 이것들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이것들의 무상함을 깨닫지 못한다. 이로 인해 슬픔이 한결같이 우리를 따라다니고 이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숙제로 남는다.

 

행복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자각의 강을 탐험해야 한다. 자각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흐르는 물에 근원이 있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강물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 근원에서 행복을 발견하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행복은 자각의 강물,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개선에서 저런 개선으로, 이런 불가사이에서 다른 불가사의로, 이런 즐거움에서 다른 즐거움으로 계속 옮겨 다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 즐기는 ‘나’, 더 많은 행복을 원하는‘나’, 더욱 세련되어지는 ‘나’, 하지만 사라지고 싶어 하지 않는 ‘나’ 온갖 교묘한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이 “내”가 사라져야만, 추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지극히 기쁨의 상태, 환희, 고통도 타락도 없는 진정한 기쁨이 찾아온다.

 

경험하는 자, 주시하는 자, 생각하는 자인 ‘나’의 생각을 마음이 넘어서면, 썩지 않는 행복의 가능성이 열린다. 우리가 자주 쓰는 영속성이라는 말의 의미에 서 볼 때, 이 행복은 영속적일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영속적인 행복, 영원히 지속되고 계속될 무언가를 원한다. 지속성에 대한 이런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비난하거나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 없이 삶의 과정을 이해한다면 창조적인 행복이 주어질 것이다. 이 행복은 ‘나의 것’도 ‘여러분의 것’도 아니다. 이 창조적인 행복은 햇살과 같다.

이 햇살을 자신의 것만으로 간직하려 든다면 그것은 더 이상 투명하고 따스하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햇살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스럽거나 누군가를 잃어버렸거나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을 원한다면 이것은 단순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이 이것을 넘어서면 마음의 것이 아닌 진정한 행복이 주어진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하다면 우리의 세계는 지금과 전혀 다를 것이다. 시시하고 비참하게 분투하며 보람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쓸모 없는 것들로 우리 자신을 에워싸고 하찮은 야망, 돈, 지위에 만족한다. 지식, 돈, 호화로운 집, 자식들, 차, 경험을 갖고 있어도 우리는 불행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렇게 불행하고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행복을 갈망한다. 사회적, 경제적, 영적인 행복을 약속하는 이들에게 현혹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고통스런 상황에서 행복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의 문제다. 고통이 없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

 

그러므로 고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마음 한 부분으로는 행복을 추구하면서, 이런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길을 찾으면서, 고통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고통을 거부하거나 합리화하거나 비난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고통과 완전하게 하나가 되어야 고통을 이해하지 않을까?

 

듣는 법을 알면 행복의 본질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고통에 귀 기울이는 법을 알아야 한다. 고통을 들을 줄 알면 행복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음식, 입을 것, 잠잘 곳이 없을 때 우리는 고통스러워 한다. 또 지금 죽어가거나 부상당한 사람들도 고통스러워한다. 나의 것도 여러분의 것도 아닌 이 고통, 그렇다고 비개인적이거나 추상적인 것도 아닌 이 고통, 우리 모두의 이 실제적인 고통을 이해하려면 많은 통찰을 해야 한다. 이 고통을 소멸 시키면 자연스럽게 평화가 찾아온다. 내면의 평화는 물론 외적인 평화까지.

우리는 왜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것일까? 왜 우리는 무거운 짐을 나르는 하급노동자나 아이를 안고 가는 여인에게 무심한 것일까?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고통이다. 고통을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에 무심해지는 것이다. 고통을 이해하면 고통에 민감해진다. 이로 인해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나와 관계된 사람들, 즉 배우자, 아이, 동물, 거지 등 모든 존재에 대해 깨어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고, 이런 도피가 우리를 무디게 만든다. 우리가 고통에 무감각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고통을 이해하지 않으면, 고통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무디게 만든다. 그래도 우리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구원자, 환생, 관념, 술 같은 중독, 실제를 외면하게 해주는 온갖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고통의 원인을 발견한다고 해서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통의 원인이 부주의, 어리석음, 편협함, 야만성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해결책을 찾지 않고 고통 자체를 바라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도피하지 않으므로,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주의 깊고 예리하게 깨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의 마음이 민감해진다는 의미다. 우리 마음이 민감해지면, 타인의 고통도 알아차리게 된다.

 

신체적인 고통은 신경의 반응일 뿐이다. 하지만 심리적인 고통은 나를 만족시켜주는 것들에 집착할 때 생긴다. 내게서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앗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고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심리적 축적물은 흐트러지지 않는 한 우리를 심리적인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준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축적한 것들과 경험의 다발인데, 이것들은 모든 심각한 혼란을 막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혼란을 원치 않으므로, 누군가 이것들을 깨트릴까 봐 두려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다.즉 고통을 피하고 슬픔을 막기위해 우리가 끌어모은 신체적 혹은 심리적인 축적물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슬픔은 심리적인 고통을 피하기 위해 뭔가를 축적하는 바로 이 과정 속에 있다.

 

지식도 고통을 막는데 도움이 된다. 의학적인 지식이 신체적 고통을 막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믿음은 심리적인 고통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 믿음의 실재를 입증해주는 구체적인 증거나 완벽한 지식이 없으면서도 믿음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나에게 떠 맡겨진 전통적인 믿음들 중에는 거부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그런 믿음들 보다는 나 자신의 경험이 내게 힘, 확신, 이해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믿음들과 내가 습득한 지식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고통을 피하는 수단이라는 면에서 결국은 같다.

 

우리가 의미하는 ‘고통’은 무엇인가? 슬픔이 있다고 하자. 사랑받지 못하는 슬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등 어떤 슬픔이든 좋다. 이럴 때 나의 한부분에서는 이유, 설명, 슬픔의 원인을 알고 싶어 한다. 한편 나의 다른 한 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비탄에 젖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부분에에서는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한다. 슬픔을 초월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부분들은 결국 우리다. 나의 한 부분은 슬픔을 거부하고 슬픔에 저항하며, 다른 부분은 이유를 찾기위해 이론들에 사로잡히고, 또 다른 부분은 사실을 외면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가? 슬픔을 통합적으로 이해해야만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찢겨져 나가면 슬픔의 진상을 볼 수 없다. 어떤 사실, 진실이 있을 때, 이것을 분리없이 총체적으로 경험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고통을 관찰하는 ‘내’가 있을 때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고통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곧 고통자체인 것이다. 고통에 어떤 딱지를 붙이거나 명명함으로써 고통을 옆으로 밀쳐버리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냥 그 고통, 그 느낌, 그 슬픔이 된다. 하지만 중심이 곧 고통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아무것도 할 것이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름을 부여하지도 않고 옆으로 밀쳐내지도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그것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럴 때도 우리는 고통스럽다고 말할까? 확실히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나는 고통스러워’ 라고 말하지도 않게 된다. 고통스러워하는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외면한다면 이 또한 그 문을 닫아버린 것과 같다. 남자나 여자, 술, 유흥, 다양한 형태의 힘, 지위, 특권, 공허한 잡담 등으로 도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도피처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도피의 대상 자체가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고통에 이르는 문을 닫아 버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

 

또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 미래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이처럼 고통은 두려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두가지 주요한 삶의 요소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연민과 사랑의 본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연민과 사랑등을 이해하려면 두려움과 슬픔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고통, 불확실성, 철저한 외로움이다. 그런가하면 죽음의 슬픔도 있고, 자신을 충족시키지 못한 슬픔,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의 슬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슬픔도 있다. 슬픔에는 무수한 형태들이 있다.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면 갈등, 불행, 우리를 타락시키고 황폐하게 만드는 일상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슬픔에는 의식적인 것도 있고 무의식적인 것도 있다. 무의식적인 슬픔은 토대도 없고 직접적인 원인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의식적인 슬픔은 거의 모두가 알고 있다. 그 해결책도 있다. 종교적인 믿음을 통해 슬픔으로부터 도망을 치거나 슬픔을 합리화하거나 지적인 혹은 신체적인 마취제를복용하거나 말, 놀이, 값싼 오락거리로 자신을 달래는 것이 그 해결책이다. 하지만 결코 의식적인 슬픔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다.

 

거기다 수세기를 통해 물려받은 무의식적인 슬픔도 있다. 인간은 언제나 슬픔, 고통, 불행이라는 이 의외의 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표면적으로 행복할 때도,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을 때도, 무의식 깊은 곳에는 여전히 슬픔의 뿌리가 남아 있다. 그러므로 슬픔의 소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의식적인 슬픔과 무의식적인 슬픔 모두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슬픔을 소멸시키려면 마음이 아주 투명하고 단순해져야 한다. 단순하다는 것은 그저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단순해지는 데는 엄청난 지성과 감수성이 필요하다.

 

타인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유감스럽게도 타인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으려면 전혀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완벽하게 살아도 우리의 행위는 누군가에겐 괴로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오늘을 살기 위하여“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크리슈나무르티,박윤정 옮김, 판미동출판사>

 

크리슈나무르티;

달라이 라마가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사색가’라고 칭송. 1933~1968년까지 35년간 그가 쓴

글과 강연, 대화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대목들을 출판. 인도 생. 14세에 신의 지혜와 인간에게 잠재된 힘을 탐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가서 영적 지도자 교육을 받았다. 1911년 신지학회 ‘별의교단’을 이끌면서 동서양의 사상을 겸비한 조화롭고도 특별한 사상가로 전 세계에 주목 됨. 1925년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교단을 해체하고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떤 권위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인식을 통해 내면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역설. 1986년 91세로 생을 마감. 그는 어떤 종파나 교리에도 얽매이지 않은 철학자이자 가장 영향력있는 사상가로서, 작가나, 과학자, 철학자, 교육자 등 나이나 배경을 무시하고 그를 찾아 온 수백만 사람들과 대담을 나누었다. 그의 가르침에 매료된 사람들 중 ‘20세기 예언자’ 칼릴 지브란, 영국의 문호 올더스 헉슬리, 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셉 캠벨, 아인슈타인 친구이자 이론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 등도 있다.

 

<유채꽃>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꿀벌!  (0) 2012.06.22
물음을 던진 사람!  (0) 2012.06.22
기쁨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다.  (0) 2012.05.24
자살과 카뮈문학을 생각해 보며!  (0) 2012.05.22
니체  (0) 2012.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