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자기방식대로 살아 간 사람들!
계몽주의에서는 장 자크 루소(1712~1778)를 “개 같은 디오게네스의 미친 후손”이라고 불렀다. 루소는 인간이 문명 탓에 대중의 의견에 끌려 다니는 불행한 노예로 전락했으며, 문명화된 인간은 “자기 밖에 사는 타인들의 의견 안에서밖에 살수 없다.”고 선언했다. 루소는 이런 소외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파리를 떠나 시골로 갔다. 그러나 이런 견유주의적 실험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는 신경증적 고립감에 고통 받았고, 대중을 향해 자신을 편집증적으로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아<고백>을 썼다. 디오게네스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의견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수록 루소는 더욱 대중에게 주목받기를 갈망하는 듯 보였다.
19세기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미국 사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윌든 호숫가로 가서 2년 동안 혼자 살았다. 의식적으로 ‘고대의 철학자들’을 모방하기 위해, 그리고 현대의 대학 철학을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지금은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그저 예리하게 사고하거나 학파를 창설하는게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여 그것이 요구하는 대로단순하고 독립적이며 관대하고 신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소로는 사람이 아주 조금만 일하고 조금만 돈을 써도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다는 걸 성공적으로 입증했다. 그러나 그는 문명을 거부하기 했어도 야생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오랜 지기이자 사상적 동반자였던 시인 랠프 왈도 에머슨의 정원 정도까지만 갔을 뿐이다.
산업자본주의의 붕괴에 잘 대비되어 있는 사람 중 하나인 닐 앤셀은 런던의 한 가톨릭 무정부주의자가 만들었던 50명에서 100명 정도의 노숙자들을 위한 공동체인 ‘사이먼 커뮤니티’를 운영을 맡았다. 그는 부랑자의 삶이 낭만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걱정이 없지는 않다고 말한다.“사이먼 커뮤니티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대다수 노숙자들은 삶이 대단히 불행해요. 삶의 현실과 싸우고, 약물에 중독되면서 그 현실로부터 도망치려 하죠. 그건 안전한 삶이 아니에요.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빚 5파운드를 못 갚아서 살해당했어요.”
그 뒤로 닐은 길을 떠나 5년 동안 50개 나라를 여행했다. 히치하이킹을 하고, 아무 데서나 자고, 농촌에서 일꾼으로 일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한 건물을 무단 점거하여 30명 정도 되는 사람들과 침대 15개에 끼어 자며 살았다. “그곳은 정말 아수라장이었어요. 마약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반사회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도 막 들어왔죠.” 그곳에 사는 동안 사이먼 커뮤니티에서 자신을 도와 준 한 여성으로부터 웨일스의 한 언덕 위 오두막에서 살기를 권유받아, “정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곳에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알기 위해서요. 그전 10년 동안 단 하루도 혼자 지냈던 적이 없는데, 혼자 살 수 있는지 알고 싶었고요.”5년 동안 살았는데, 그 기간 동안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나 혼자서 세월을 보내는 기분이었어요.” 닐이 문명을 버린 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문명의 끄트머리에서’ 살았다. 가끔 누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대개 혼자 지냈다. 외로웠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독을 선택하는 건 외로움의 정반대예요. 지루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할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요. 혼자 살아갈 준비를 하는데 2년 정도가 걸렸지만, 채소를 기르고 버섯도 재배하고 직접 술도 담그면서 꽤 자급자족할 수 있었어요.
뭔가 하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명상하는 상태 같았죠. 그럼 내면의 시끄러운 소리가 사라지고 주변 환경에 온전히 빠져들게 돼요. 거기 사는 동안 일기를 썼는데, 시간이 갈수록 일기에서 내 모습은 사라지고, 정말로 자연의 일기가 되어갔어요.
언덕의 오두막 생활이 끝날 무렵, 닐은 갑상선에 병이 생겼다. 그리고 혼자서는 버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내가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지 생각해 보게 됐어요. 그리고 그건 건강상태라든가 아이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는 오두막에서 5년을 지낸 뒤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한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기르다 보니 다시 문명으로 돌아오게 됐고, 닐의 가족은 브라이튼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렇게 인정한다. “산에서 살면서 가족 부양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죠. 겨울엔 너무 황량하고 육체적으로 정말 힘들어요. 닐은 <빅이슈;노숙인 자활을 돕는 월간지>사무실에에 취직을 했고, 얼마 뒤에는 잠입취재 기자가 되어 부패폭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 그 일을 하면 늘 초긴장상태이기 때문에 자신감을 잃으면 안 돼요. 난 그럴 수 있어요. 야생에서 살았던 덕에 내면의 평화를 지키는 법을 배웠고 위기를 다스리는 힘을 얻었거든요.“ 그는 지금 열네 살과 아홉 살 두 딸에게 헌신한다. ”도시에서 이렇게 오래 살았던 건 처음이에요. 지금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두 사람을 위해 살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었죠.“
디오게네스는 극심한 생존경쟁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견유주의적 삶을 실천한 대표적 인물이다.
견유주위 풍자가인 루카아노스는 서기 2세기에 “거리가 온통 해충 같은 인간들로 가득하다“.고 불평했다. 일부학자들은 견유주의가 초기 기독교에, 아마도 예수 본인에게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성 바울의 삶과 글에는 견유주의적 영향이 꽤 드러난다. 그는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이자 모든 것들의 찌꺼기로서...“라고 말했다.
견유주의의 ‘극기’는 기독교의 ‘황야의 교부들’(이집트의 황야에서 은자로 생활하면서 최초의 그리스도교 수도원을 설립한 수도사들)‘의 금욕주의에도 영향을 끼쳤다.
반자본주의자 였던 성 프란체스코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헐벗은 탁발 수도사가 되었다.
견유주의적 대응은 현실성을 지니기에는 너무 극단적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대개 가족을 갖길 원하고, 국가가 어린이, 병든 사람, 노인, 소수자를 보호해 주길 바란다. 무정부주의는 현실성 있는 대안은 아니다. 비록 견유주의자들은 문명이 주는 편안함을 당연히 여기지 말고 문명이 붕괴될 때에 대비해 스스로를 단련시키라고 가르치긴 하지만....
<“철학을 말하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발췌, 줄스 에반스 지음, 서영조 옮김, 더 퀘스트>
녹차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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