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보이는 정자가 인상적이다!
청량산 들어오는 길
응진전
청량사 전경
청량사를 배경으로~
경북 봉화군의 청량산을 산행 겸 단풍구경하였다. 내려올 때는 차량이 많이 막혀서 고생을 하였지만 먼길을 달려간 만큼 만족감을 안겨 준 명산중에 명산이었다. 하산 후 약 12키로 떨어진 도산서원을 들렸다가 안동으로 내려왔다!
청량산은 도산서원에서 동북박 12Km떨어져 있는 낙동강가에 높이 솟아 있는 산으로 영남의 소금강이라 불리 울 만큼 12봉 우리로 어우러져 산세가 기묘하다.
청량사 바로 뒤에는 청량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보살봉이 있다. 원래 이름은 탁필봉이지만 주세붕선생이 지형을 보고 봉우리 이름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청량산의 아름다움은 퇴계가 자신의 시조에서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는 나와 백구뿐"이라고 읊은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퇴계는 어릴 때부터 청량산에서 글을 읽고 사색을 즐겼으며 말년에도 도산서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이 산을 찾았다.
청량산 주변에는 신라시대 최치원의 유적지로 알려진 고운대와 명필 김생이 서도를 닦던 김생굴, 김생굴 외에도 암릉을 따라 금강굴, 원효굴, 의상굴, 반야굴, 방장굴, 고운굴, 감생굴 등이 들어서 있다.
이밖에 공민왕이 피란와서 쌓았다는 청량산성, 최치원과 김생이 바둑두던 난가대 등도 더듬어볼 만한 발자취다.
입석에서 등산로를 따라 30분 정도. 뒤로는 거대한 금탑봉이 병풍처럼 둘러서있고 아래는 아득한 낭떠러지. 바위가 마치 9층으로 이뤄진 금탑모양을 하고 있다. 층마다 소나무들이 테를 두른 듯 암벽에 뿌리를 내렸다. 절벽 아래로 붉게 타는 단풍이 장관이다<네이버>.
메인 등산코스는 김생굴-자소봉-정상인 장인봉(4,3k)순이 좋을 듯한데 힘든 코스 같다. 경일봉 올라가서 마주보이는 봉우리를 감상하다 청량사로 하산하였다
(약 3시간 소요), 코스는 경일봉보다 자소봉쪽을 권하고 싶다.
경일봉에서 보라본 봉우리들(좌측부터 연적봉, 탁필봉, 자소봉 인듯)!
청량사 경내 솟대,시와 차를 마시는 공간에서~
금탑봉을 배경으로~
퇴계선생의 가르침이 남아있는 곳,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한국정신문화의 성지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네이버 발췌>
서원 앞 마당에 가로로 누어진 고목나무에서~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뛰어난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이다.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論語)』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周易)』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평생을 병치레하였다 한다.
27세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구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 도중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았다. 중종 말년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히고,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았다. 끝내 퇴거(退居)할 수 없는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자, 퇴계는 이를 피해 전임을 청해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세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어진 이를 초빙했으나 오지 않음을 탄식하다)」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고,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좌우에 두었다고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퇴계를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퇴계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퇴계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蓬)의 「사잠(四箴)」, 『논어집주』, 『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의 깊은 의미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고향에 돌아온 후 학문 탐구에 전심하였으나, 70세가 되던 다음해 11월 병환이 악화되었다. 돌아가시던 날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고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愁: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퇴계선생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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