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친구가 감옥살이를 하게 되자 사랑하는 친구가 빼앗겨버린 안락을 자기도 누리지 않으려고 매일 방바닥에서 잠을 잤다는 거예요. 누가 우리를 위해 땅바닥에서 잠을 자주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정이란 방심하기 일쑤요. 적어도 무력한 것이니까요.
우정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합니다. 아마 결국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우정에는 부족한지도 모릅니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에겐 부족한지도 모릅니다. 죽음만이 우리 감정을 깨우쳐준다는 사실을 주목한 적이 있으십니까? 사별한 친구를 우리는 얼마나 사랑합니까?
그런데 왜 우리가 죽은 사람에 대해서 더 정당하고 관대한지 아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시간의 여유를 가질 수 있고, 말하자면 여가가 있을 때 찬사를 드리면 그만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무를 짊어지운다면, 그건 추억을 요구하는 일 일 텐데, 우리 기억력은 짧거든요. 그러니 친구들 속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갓 죽은 고인, 마음속에 고통을 주고 있는 고인 뿐으로서, 결국 그건 우리의 감동을 사랑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거예요!
내 편에서는 되도록 나를 피하던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좀 갑갑한데다가 훈계조로 말버릇이 있는 녀석이었어요. 그렇지만 임종 때에는 나를 만날 수 있었답니다. 하루를 나는 헛되이 보내지 않은 셈이지요. 그 친구는 내게 만족하여, 나의 두 손을 잡고 죽었습니다.
또 나를 귀찮게 따라다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여자 하나가 마침 요절해 버린 일이 있었지요. 그러자 당장에 그 여자가 내 마음을 차지하더라니까요. 전화통이 울리고, 가슴이 벅차고, 아픈 가슴을 지그시 누르면서 약간의 자책감마저 느끼거든요! 인간이란 그런 겁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사랑하지 못한단 말이에요.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파리에서 변호사 노릇을 했습니다. 게다가 상당히 이름난 변호사였습니다. 밤마다 정의가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해주는 것 같아서요. 나의 정확한 어조, 적당한 감동, 변론의 설득력과 열성, 그리고 지그시 억누르면서 터뜨리는 분격-그러한 것들을 보셨더라면 당신도 틀림없이 감탄했을 겁니다. 체격도 본래 좋은 편이라 고결한 태도를 보이기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메뚜기는 아무리 몰려와도 나에게 동전 한 푼 이득이 없지만, 내가 멸시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음으로써 나는 생계를 유지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나는 떳떳한 편에 있었고, 그것만으로 양심의 평온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믿는 감정,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만족감, 스스로를 존경할 수 있는 기쁨 등은 인간을 분발하게 하거나 전진하게 하는 강한 원동력들입니다. 만약 그것을 빼앗아버린다면, 인간은 침이나 질질 흘리는 강아지 새끼나 다름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못이 있다는 걸 견딜 수 없어서, 다만 그런 까닭만으로 범죄가 저질러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전에 나는 어느 실업가를 알았는데, 그는 아내를 속이고 있었어요. 그 사나이는 자기가 옳지 못하며, 미덕의 면허장을 받을 수도 없고 제 손으로 만들어 가질 수도 없어서 말 그대로 속이 탔습니다.
아내가 완전함을 보일수록 속이 타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아내를 속이길 그만두었을까요? 천만에..... 아내를 죽여버렸답니다. 그러한 일로 나는 그를 변호하게 되었답니다.
내 직업은 다행스럽게도 정상에 오르기를 좋아하는데 내 천성을 만족시켜주었습니다. 직업 덕분에 이웃 사람에게는 도통 신세를 지는 일 없이 늘 친절을 베풀어주는 편이라 그들에 대한 불쾌감도 없었습니다. 내 직업은 나를 판사와 피고 위에 서게 하여, 오히려 내가 판사를 재판하고 그로 하여금 나에게 감시하지 않을 수 없게 했지요.
그러한 점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벌 받지 않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판결과도 관련되지 않았으니까 나는 재판장 무대 위가 아니라 천장 어느 곳에 있었던 겁니다. 어쨌든 높은 데서 산다는 것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우러러보이고 존경받는 유일한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느 날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홀쭉하고 키가 작달막한 사나이를 태운 오토바이가 나를 앞지르고 빨간 불 앞에 정지했던 것입니다. 정지하는 바람에 엔진이 꺼져버려서 사내는 다시 시동을 거느라 애쓰지만 걸리지 않았습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어서 나는 그에게 지나갈 수 있도록 오토바이를 옆으로 비켜달라고-언제나 그렇듯이-공손하게 부탁했지요. 그 사내는 닥치고 꺼지라는 거예요.
나는 다시 한 번 여전히 공손하게, 그러나 목소리에 약간 노기를 띠고 재촉했습니다. 그 성마른 녀석은 엔진 고장이라는 게 분명해지자 울화가 치밀었던지, 한 대 맞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주겠노라며 소리를 지르더란 말이에요. 그 뻔뻔스러움에 화가 치밀어서, 나는 차에 내렸습니다.
나는 겁쟁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고 상대방보다 머리가 하나쯤 더 컸을 뿐만 아니라, 내 완력은 언제나 내게 유리했었습니다. 그런데 차도에 내려서자마자 몰려들기 시작하던 사람들의 무리에서 한 사내가 나서더니 나더러 너절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고 하면서 오토바이를 탄 사나이, 그러니까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대게 하지 않겠노라고 대드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 협객에게로 눈을 돌리자마자, 거의 동시에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나는 귀퉁이를 호되게 얻어맞았어요. 무슨 영문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오토바이는 떠나버렸습니다. 그 순간 퍽 길게 줄지어 멈춰진 자동차들에서 일제히 클랙슨 소리를 극성스럽게 울렸습니다. 다시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좀 얼떨떨한 채 내게 대들었던 괘씸한 녀석을 후려갈기지도 못하고, 나는 온순하게 자동차로 돌아와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며 그 괘씸한 녀석은 내게 ‘얼간이’하고 소리를 지르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별로 중요할 것 없는 이야기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일을 잊어버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게 중요합니다. 나에게는 그러나 변명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대항하지도 않고 얻어맞았지만, 나를 비겁하다고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또 뜻하지 않은 일격이었던 데다가, 양쪽에서 대드는 바람에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또 클랙슨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명예를 저버리기나 한 것처럼 나는 불행했습니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군중의 비웃는 눈길을 받으며 차에 오르던 내 꼴이 자꾸만 눈앞에 보였어요. 그날 내가 매우 말쑥하게 푸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던 만큼 군중은 더 좋아했습니다. ‘얼간이’라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그런 소리를 들어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나는 군중 앞에서 기가 질리고 말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어요.
공교롭게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 그렇게 된 건 사실이지만, 사정이란 언제나 있는 법입니다. 나중에야 어떻게 했어야 옳았을 것인가 명백히 알 수 있었습니다. 달타냥처럼 굴던 그 녀석을 보기 좋게 갈겨서 쓰러뜨리고 차에 뛰어올라, 나를 때린 녀석을 추격해 그놈의 오토바이를 길옆으로 몰아붙이고는 놈을 끌어내다가, 그놈이 마땅히 받아야 할 주먹을 먹여주는 장면을 나는 상상했습니다. 조금 다르게 꾸미는 일도 있었지만, 나는 이 필름을 백 번 천 번 머릿속에서 돌려보았어요.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며칠 동안 나는 추악한 원한을 꾹 참아야만 했습니다.
그 사건을 다시 회상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습니다. 결국 내 몽상이 사실의 시련에 견디지 못했던 겁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인격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남들의 존경을 받는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려고 꿈꾸었던 것이 확실했습니다. 말하자면 절반은 세르당(유명한 권투선수)같고 절반은 드골 장군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지요. 요컨대 무슨 일에서나 군림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부러 보란 듯이 두뇌의 능력보다도 육체적 역량을 보이기를 즐겨했던 거예요. 그런데 꼼짝도 못하고 군중 앞에서 얻어맞은 뒤로는 그러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질 수 없게 되었어요. 만약 나 자신이 자처하듯 내가 진실과 지혜의 벗이었다면,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벌써 잊어버리고 말았을 그런 사건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로 화를 낸 데 대해 스스로를 책하고, 또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침착성을 잃고 홧김에 초래된 결과를 저지하지 못한 데 대해 자신을 책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나는 복수를 하고, 때려주고, 이기고 싶은 욕망에 불탔으니까요.
마치 나의 진정한 욕망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가장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내 마음대로 누구나 쳐부수고 결국 가장 강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도 아주 유치한 수단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사실인즉,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지혜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갱스터가 되어 순전히 폭력으로 사회를 지배하기를 꿈꾸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갱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닌지라, 대개는 정치를 수단으로 택하여 가장 잔인한 정당으로 달려갑니다. 모든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면 자기의 정신을 욕되게 한들 어떻겠습니까? 안 그래요? 내 마음속에서 나는 흐뭇한 압제의 몽상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나 자신이 위협을 받으면 나 역시 판사가 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심한 인간, 모든 법률을 무시하며 범죄자를 때려눕히고 무릎 꿇게 하고 싶어 하는 폭군이 되었답니다.~
[작품 해설]<<전락>>은 카뮈 작품 중 가장 완성도가 높고 가장 복잡하고 난해한 작품이라는 평을 동시에 받고 있는 작품이다. 암스테르담 한 술집을 배경으로 파리의 전직 변호사였던 클라망스가 끝없이 늘어놓는 ‘계산된 고백’을 따라 진행된다.
클라망스는 남들로부터 심판을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현대인의 심성’을 가졌다.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자기에 대한 비난을 약화시키고 가능하다면 무력화시키기 위해 한 가지 방책을 고안해내기에 이른다. 그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가혹한 심판을 받기 전에 자신을 먼저 심판대에 올려 심판하는 방책이 그것이다. 자기가 지은 죄를 먼저 참회하고 나서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한 고도로 계산된 전략인 셈이다.
이른바 자발적 참회자가 되는 여기서 카뮈는 <<전락>>의 화자 클라망스에게 ‘재판관-참회자’라는 이중의 직함과 역할로 인해 <<전락>>의 의미망은 더 두꺼워지며 작품의 모호성은 커지게 된다. 클라망스에게는 개인으로서의 카뮈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르트르를 포함한 지식인들의 모습, 나아가서는 비극의 ‘20세기‘를 몸소 겪었던 카뮈의 동시대인들의 모습이 복합적으로 투영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진보적 폭력 개념은 ‘목적’-수단‘ 논쟁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목적’-수단‘의 관계에서 ’목적‘도 정당화 되어야 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동원되는 ’수단‘도 정당화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사르트르진영에 속한 메를로 퐁티 등과 더불어 실존주의자들과 PCF에 가입한 좌파지식인들은 ’목적‘이 정당하다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어느 선까지 폭력 사용이 용인되고 정당화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진보적 폭력을 ’필요한 폭력‘과 ’유용한 폭력‘으로 여기면서 폭력 사용을 극구 배제하는 카뮈, 그러니까 ’손을 더럽히는 것‘을 거부하는 카뮈에게 일제히 등을 돌렸던 것이다.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출간 이후 촉발된 이와 같은 사르트르, 그의 진영에 속한 실존주의자들과 PCF(프랑스공산당)에 가입한 좌파 지식인들과의 격렬한 논쟁의 충격으로 완전히 침몰하게 된다. 그때까지 집필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난, 무시, 조롱 등을 도로에서 오토바이 운전자와의 망신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락’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알베르 카뮈 지음, 이휘영님 옮김, 변광배교수 해설, 문예출판사>
* 알베르 카뮈 : 1913 알제리 생. 1957년도 노벨문학상 받음,<이방인>,<안과 겉><시지프의 신화>,<페스트>,<반항하는 인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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