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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적 인간

[중산] 2021. 4. 23. 08:31

반항적 인간

반항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노(No)’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거부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다. 즉 그는 또한 반항의 첫 충동에서부터 ‘예(Yes)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일생동안 명령을 받기만 했던 노예가 돌연 더 이상 새로운 명령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이 ‘노’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이를테면, ‘이런 일이 너무 오래도록 게속되었다.’ ‘여기까지는 좋지만 이 이상은 안 된다’. ‘당신 너무하지 않은가?’라는 뜻이며 나아가서는 ‘당신이 넘어오면 안 되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다.

 

상대편이 한계를 넘어서까지 자신의 권리를 확장함으로써 그것과 정면으로 맞서 있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제한하게 될 때, 반항하는 인간이 ‘그건 너무 심하다’고 느끼는 바로 그 감정 속에서 우리는 그와 똑 같은 한계의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나는 ...할 권리가 있다’는, 반항하는 인간의 느낌에 근거해 있다.

 

반항하는 인간은 암암리에 모종의 가치 판단을 개입시키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위험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지킨다. 침묵한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아무것도 판단하지도 욕망하지도 않는다고 믿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이다. 절망이란, 부조리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는 모든 것을 판단하고 원하지만 개별적으로는 아무것도 판단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침묵이 그 점을 잘 말해준다.

 

아무리 막연한 것일지라도, 의식의 각성은 반항적 운동으로부터 태어난다. 반역의 충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노예는 그 모든 시달림을 그저 당하고만 있었다. 그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꾹 참았다. 마음속으로는 아마도 그 명령들을 거부했겠지만 아직 자신의 권리를 의식하기보다는 눈앞의 이해관계에 더욱 신경이 쓰여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인내심을 잃게 되면서 이번에는 반대로, 전에는 감수해왔던 모든 것까지 번져갈 수 있는 어떤 운동이 시작된다. 이러한 충동은 거의 언제나 과거로 소급하게 마련이다. 노예는 주인의 치욕적 명령을 거부하는 순간, 그와 동시에 노예라는 신분 그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

 

반항적 운동은 노예로 하여금 단순한 거부를 넘어서 더 멀리 나아가게 한다. 그는 적에게 용인하고 있었던 한계마저 넘어서서 이제는 동등하게 대우받기를 요구한다. 처음에는 인간의 물러설 수 없는 저항이었던 것이 이제는 저항과 동일화되고 저항으로 요약되는 인간 전체가 된다. 단순히 존중받게 하고 싶었던 자기 속의 그 부분을 그는 이제부터 그 밖의 어떤 것보다 위에 놓고, 그 어떤 것보다, 심지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선언하게 된다. 그 부분이 그에게는 최고선이 된다.

 

이전에는 타협 속에 안주하던 노예가 단번에(“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전체’ 아니면 ‘무’라는 극한 속으로 몸을 던진다. 의식이 반항과 함께 태어나는 것이다. 그가 이를테면 자유라고 부르게 될 그 배타적이고 궁극적인 인정을 받지 못할 바에는 죽음이라는 최후의 실추를 받아들인다.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서서 죽겠다는 것이다.

 

가치란, 훌륭한 저자들에 따르면, “대게 사실에서 권리로, 바라는 것에서 바람직한 것으로의 이행을 나타낸다.” 반항은 현실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셸러에 따르면 또 원한은 그것이 강자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는가 아니면 약자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는가에 따라 출세욕이 되기도 하고 독살스러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중 어느 경우든 사람들은 현재의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이 되고자 한다.

 

원한은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한 원한이다. 반항하는 인간은 이와 반대로, 그 최초의 충동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건드려 변화를 가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자기 존재의 어떤 부분의 완전무결함을 위하여 투쟁한다. 그는 우선 남을 정복하여 들기보다는 자기를 주장하려고 애쓴다.

 

결국 원한은 그 원한의 상대가 느꼈으면 하고 바라는 어떤 고통을 생각하며 미리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항은, 그 원리에 있어서 자신의 굴욕을 거부하는 것으로 그칠 뿐 타인의 굴욕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반항은 심지어 자신의 완전무결함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고통 그 자체를 위한 고통까지도 수락한다.

 

 

범죄에는 격정에 의한 충동적 범죄와 논리에 의한 이성적 범죄가 있다. 형법은 사전 음모가 있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아주 편리하게 양자를 구분한다. 우리는 지금 사전 음모와 완전 범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시대의 범죄자들은 더 이상 자비로운 선처를 빌던 저 무력한 어린애들이 아니다.

 

반대로 그들은 성인들이며 그들이 내세우는 알리바이는 논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이니, 심지어 살인자를 심판관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만능의 철학이 그것이다. <<* 폭풍의 언덕>>에서 주인공 히스클리프는 캐시를 소유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는 그 살인이 합리적이라거나 어떤 체계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 뿐, 그것으로써 그의 믿음은 끝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힘을, 그리고 성격을 전제로 한다. 사랑의 힘은 귀한 것이기에 살인은 예외적인 것이 되고 또 그렇기에 위반의 모습을 갖게 된다. 그러나 성격의 힘이 결여되고 보니 스스로를 교리로 무장하려 들고, 스스로의 논리를 세우다 보니 그 순간부터 범죄는 바로 이성 그 자체처럼 불어나면서 삼단논법의 온갖 양상을 띠게 된다.

 

절규처럼 고독하기만 했던 범죄가 이제 바야흐로 과학처럼 보편적인 것으로 변했다. 이제까지만 해도 심판을 받던 범죄가 오늘은 법이 되어 지배한다. 사람들은 아마도 50년 동안 7,000만 명에 달하는 인간들을 제 땅에서 몰아내어 노예로 만들거나 살해해버리는 한 시대는 오직, 그리고 우선적으로,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리라. 그렇다 하더라도 우선 그 시대가 유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순서일 터이다.

 

폭군이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노예가 정복자의 전차에 사슬로 매인 채 축제로 들뜬 시가지 곳곳으로 끌고 다니고, 사로잡힌 적이 운집한 군중의 면전에서 맹수에게 내던져지던 고지식한 시대에는, 그토록 순진한 범죄 행위 앞에서 양심은 흔들림 없이 확고할 수 있었고 또 판단은 분명할 수 있었다.

 

우리 눈앞에 있는 저 타자를 살해할 권리, 혹은 이 타인이 살해됨에 동의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지 없는지를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30년 전에 사람들은 살인을 결심하기 전에 철저히 부정을 했었다. 자살로써 스스로를 부정할 정도였다. 신이 속임수를 쓰고, 신과 더불어 모든 사람이 다 속임수를 쓰고, 나 자신마저도 속임수를 쓰니, 따라서 나는 죽는다. 즉 자살이 문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이데올로기는 타자들만 부정한다. 오직 타자들만이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인을 한다. 새벽마다 몸치장을 한 살인자들이 슬그머니 감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반항적 인간은 신성한 것 이전이나 이후에 위치하는 인간이며, 인간적인 질서를 요구하는 데 골몰하는 사람이다. 그 질서 속에서 모든 해답들은 인간적인 것, 즉 합리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순간부터, 모든 물음과 모든 말은 반항이다. 반면에 신성한 것의 세계에서는 모든 말이 은총의 작용이다.

 

인간 정신의 견지에서 보면 가능한 세계는 오직 두 가지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신성한 것의 세계(기독교적 표현을 빌리면 은총의 세계)와 반항의 세계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한쪽의 세계의 사라짐은 다른 한쪽 세계의 나타남과 일치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전체’냐 ‘무’냐의 문제와 마주친다.

 

우리는 신성이 사라진 역사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수많은 분쟁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반항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적 차원들 중의 하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반항은 우리 시대의 역사적 현실이다.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는 한 우리는 반항 속에서 우리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신성한 것과 그 절대적 가치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온 인간이 과연 행동의 규칙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반항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존재하기 위하여 반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의 반항은 그 자체 내에서 발견하게 되는 한계 - 인간들은 그 한계 내에서 서로 결속함으로써 존재하기 시작 한다 - 를 존중해야 한다. 우리가 겪는 일상적 시련 속에서 반항은 사유의 차원에서의 코기토(‘나는 생각 한다’라는 뜻의 라틴어)와 같은 역할을 한다. 반항은 모든 인간들 위에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통적 토대이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반항하는 인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님 옮김, 책세상출판>

<<* 폭풍의 언덕>> : 한동농원의 '검색' 에서 요약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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