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세 유형으로 구분하는데요. 효용성에 토대를 둔 쓸모 있는 우정과 즐거운 우정, 그리고 선에 토대를 둔 고귀한 우정이 그것입니다. 먼저 효용성에 토대를 둔 우정의 가장 뚜렷한 사례는 링크드인 같은 우리가 비즈니스 인맥 사이트에서 맺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의 목적은 직업과 관련된 인맥을 맺는 것이지요. 본질적으로 효용성을 추구하는 활동입니다. 관계를 통해 서로에게 혜택을 주지만, 오로지 얻을 이득이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으므로 순전히 도구적인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에는 본질적인 가치는 없고 오직 효용적인 가치만 있습니다.
즐거움을 토대로 한 우정도 비슷합니다. 단지 관계를 지속하는 힘이 경제적 이득이 아니라 즐겁고 유쾌한 감정에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지요. 일단 재미있고 유쾌하기 때문에 관계를 시작하지만, 언제든 그런 감정이 없어지면 굳이 관계를 이어갈 이유가 사라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효용성과 즐거움을 토대로 한 우정은 진정한 의미의 우정이 아닙니다. 오로지 도구적 관계에서만 그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고귀한 우정은 효용성이나 즐거움 같은 이익이 아니라, 그저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달리 말해, 고귀한 또는 진짜 우정은 그 자체로 좋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친구를 많이 갖는 건 아마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친구’를 500명 넘게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진짜 친구는 그보다 훨씬 적으니까요. 그러니까 효용성과 즐거움뿐만 아니라 다른 이익도 얻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우정의 본질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효용성과 즐거움 같은 도구적 가치는 철학 용어로 표현하면 ‘우연적’인 것들입니다. 운이 좋다면 우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도구적 가치가 우정의 본질을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 성격을 정의하는 것은 오직 내적가치, 또는 본질적 가치뿐입니다.
어쩌면 인간은 이익이 되 든 안 되든 상관하지 않고,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소망만을 토대로 우정을 쌓을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일 것입니다. 다른 많은 종이 맺는 복잡한 사회적 관계의 토대는 지배와 번식이지요. 그런데 아마 몇몇 분들은 인간에게 비도구적 관계를 맺을 능력이 있는지 의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허무주의자라면 우정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고, 인간 역시 우정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얻으려고 할 뿐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도구적 관계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런 관계를 맺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정의하는 본질적인 특징이라 말하지요. 비도구적 관계가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가 다른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그저 진화가 많이 된 원숭이에 불과할 테니까요.
<‘철학이 필요한 순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스벤 브링크만 지음, 강경이님 옮김, 다산초당출판>
* 스벤 브링크만 : 덴마크 오르후스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철학과 심리학 전공했고 현재 알보그대학교 심리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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