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겪는 모험 이야기다.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기지와 용기, 언변을 두루 갖춘 인물로 트로이 전쟁에서 거대한 목마를 활용해 10년 넘게 지속돼 온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그리스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보면 ⌜오디세이아⌟는 우리 시대 평범한 중년 남자들의 인생 이야기다. 나이 듦의 길목에서 퇴직을 하고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남자의 상징이다. 너무 늦기 전에 자신을 이해하고 참된 삶을 살라고 촉구하는 집단 무의식이 주는 선물이다.
‘케케묵은 옛 신화가 남자의 노화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는 무려 2500년 전에 살았던 신화 속 인물일 뿐이다. 전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무렵 오디세우스는 45세에서 50세 사이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그토록 그리던 고향 이타카에는 그의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비단 따뜻한 가족 품만이 아니다. 그가 그토록 돌아가고자 한 이타카는 내면이다. 다시 말해 자아다.
괴테가 “내가 이 멋진 여행을 하는 목적은 나 자신을 현혹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보는 사물들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오디세우스도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로 인해 ⌜오디세이아⌟는 우리의 삶과 존재 방식,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자 애쓰는 이들에게 통찰력을 제공한다.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 같은 대문호들이 ⌜오디세이아⌟를 토대로 작품을 썼으며,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며 힘들고 고단한 여행, 인생의 고난을 비유하는 상징이자 대명사가 된 것이다.
10년간 지속됐던 트로이 전쟁이 끝나자 고향 이타카까지의 거리는 약 565해리다. 배를 타고 2주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2주면 넉넉히 갈수 있는 길을 10년 동안이나 방황한 이유가 대체 뭘까? 귀향길에 올라서도 그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저질렀던 노략질과 약탈 행위를 그대로 반복한다. 새로운 것을 하나도 배우지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 전사로서 활약했던 시절의 삶의 방식을 답습한 것이다. 바람은 이들을 그리스 남쪽 해안, 키코네스족이 사는 땅으로 인도한다. 항구에 닿자마자 오디세우스 일행은 자신들이 귀향의 여정에 있다는 사실조차 잠시 망각한 채 항구도시를 습격해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을 노예로 삼고, 약탈품을 거두어들인다.
남자들은 왜 ‘전쟁터’를 떠나지 못할까
나이가 들어서 대부분 남성은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처럼 행동한다. 자신이 평생토록 이끌어 온 전사의 방식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과거의 방식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간다. 호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데다, 다른 사람을 정복해야만 직성이 풀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증명해야만 비로소 안심한다.
사회봉사 활동이나 취미 활동조차 마치 수익을 내야만 하는 비즈니스를 하듯 남들과 경쟁하며 최고가 되기 위해 전투적으로 접근한다. 그들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검’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전사의 삶을 살아온 우리 남자들은 평생을 바쳐 온 일에서 은퇴하는 것이 마치 인생 자체에서 은퇴하는 것처럼 느끼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자칫 미래의 승리라는 열매를 놓쳐 버리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렇게 하다가는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처럼 성숙해지는 일에 실패하기 십상이다.
우리들 중 일부는 자신의 아내, 성인이 된 자녀들, 이웃, 함께 일하는 사람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새로운 ‘전쟁들‘을 끝도 없이 지속하는 실수를 범한다. 이런 전쟁은 마음속에 감춰져 있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열패감,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게 되고 자기 인식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우리는 결코 타인을 바꿀 수 없다. 비판과 갈등을 통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이가 들어 일을 계속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다만 일을 하다가 지치거나 너무 늦어 버려서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와 체력을 잃게 되는 것이 문제다. 남자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일과 성공이 창의성을 계발하고 자아의 성숙을 도모하는 일이, 혹은 아내나 어른이 된 자녀들, 손주들과의 관계를 돈돈히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가? 마지막까지 일에만 몰두하는 남자는 자신이 무엇을 놓쳐 버렸는지 끝내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너무 오래 지체하다 보면 기회란 아침이슬처럼 금세 소명되기 마련이니까!
고단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기
동료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항해를 계속하던 중 거센 폭풍우를 만나 오디세우스 일행이 탄 배는 난파 위기에 처한다. 무려 열흘 동안이나 지속된다. 폭풍우는 그들을 로토파고이족이 사는 섬에 데려다 놓는다. 로토파고이족은 섬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꿀처럼 달콤한 연잎을 대접한다. 연잎을 먹은 오디세우스 부하들은 도전정신과 삶의 열정을 모두 잃어버리고, 심지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항해를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깡그리 잊고 만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부하들을 강제로 배에 태워 섬을 빠져 나간다.
자아를 찾지 않으려는 절망적인 몸부림
호전적이고 승리에 집착하는 전사의 삶을 포기하는 대신 고단한 현실을 잊고 싶은 마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TV, 컴퓨터 게임, 술에 빠져 진정한 자아와 꿈을 잃고 무감각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또 나는 쉬지 않고 운동을 하면서 너무 피곤하고 정신없는 나머지 자아를 대면할 여유가 없는 남자도 알고 있다. 그는 몸을 혹사시켜 자신을 끊임없이 무감각한 상태로 몰아가다가 결국에는 우울증에 걸리게 될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는 잠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것은 나의 페르소나(남의 눈에 비치는, 본인의 실제 성격과는 다른 한 개인의 모습,가면), 전문가적인 삶, 그리고 개인 소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에 두려움이었다. 이러한 실수는 끊임없이 무의식으로 빠져들어 개인적 성숙 같은 것은 몽땅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귀향길에 오른 오디세우스가 연잎 때문에 위기에 처한 모습을 보고 이와 같은 태만을 ‘참된 자아를 찾지 않으려는 절망적인 몸부림’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또한 플라톤은 ‘로토스(환각,환각을 일으키는 열매)’를 거짓되고 거만한 사고방식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내면들여다보기
항해를 계속 하던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뭔가 홀린 듯이 이끌려 키클롭스들의 나라 인근에 도착한다. 키클롭스는 외눈박이 거인 족으로, 이마 한가운데에 눈알이 하나 박혀 있다. 그들은 각자 동굴에 살면서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고, 회의장과 법규도 없으며, 각자 동굴에 살면서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오디세우스 일행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너희들의 정체가 뭐냐? 대체 어디서 무엇하러 이곳에 왔느냐?”라고 묻는다. 이에 오디세우스는 자신들이 트로이 전쟁 참전 용사임을 밝히고 제우스신의 이름으로 먹을 것과 잠자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머리끝까지 화가 난 폴리페모스는 순식간에 오디세우스의 부하 두 명을 죽여 저녁으로 먹어치우고는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게 동굴 입구를 막아 놓고 잠을 잔다.
포리페모스가 술에 취해 잠들자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뾰쪽하게 깎아 놓은 막대기를 가져와 불을 붙인 다음, 폴리페모스의 외눈에 힘껏 쑤셔 넣는다. 그는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무시무시한 괴성을 질러 댄다. 양의 배에 매달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일행은 배로 돌아와 섬을 떠나면서 포리페모스를 조롱하고 비아냥댄다.
영웅 안에 살아가는 두 살배기 어린아이
이 괴이한 모험은 남자의 나이 듦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키클롭스는 남성의 어떤 심리를 반영하는 걸까? 오디세우스는 왜 폴리페모스가 살고 있는 동굴에 들어가 그들을 자극했을까? 키클롭스의 외눈은 의식과 지각을 구분하기 이전의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활짝 열린 인식 같은 것을 상징한다. 그것은 일종의 통합 의식 같은 것이다. 키클롭스의 섬은 유아기에 맛보게 되는 에덴동산 같은 낙원을 살짝 보여 준다. 우리의 영웅은 그 동굴에서 자신의 미숙하고 자기중심적이며 감정적인 자아, 즉 자기 안의 ‘두 살배기 어린아이’를 만난 것이다.
내면의 키클롭스와 씨름하는 남자들
철학자 칼 융은 “모든 성인들의 삶에는 어린아이가 한 명 숨어 있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 속에는 관심과 의존, 사랑을 원하는 ‘내부의 아이’가 살고 있다. 키클롭스는 바로 내부의 아이를 상징한다. 아동들이 약한 친구들에게서 자기 자신의 무의식적인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발견하고는 더욱 심하게 그들을 괴롭히는 것처럼 오디세우스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키클롭스를 조롱하고 빈정된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가치가 미미해지고 예전과 같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분노해 폭발하는 남자도 보았다. 내면의 어린 자아는 생을 다할 때까지 나와 함께 살아갈 또 다른 자아다. 어린 자아를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결국 어린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또 인정받고 싶은 내 안의 욕구이므로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어린 자아와 평화롭게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이다.
배와 선원을 모두 잃은 오디세우스는 작은 뗏목에 매달려 겨우 목숨을 구한다. 지칠대로 지친 오디세우스는 여신 칼립소의 보호를 받으며 서서히 몸을 회복한다. 그러나 그를 돌보다가 사랑에 빠진 칼립소는 그가 섬을 떠나지 못하게 붙잡는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포기하지 않자 칼립소는 자신의 남편이 되어 준다면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 한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7년이 지나고 고향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커져만 간다. 그는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칼립소에게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호소한다. 그 말에 칼립소는 결국 오디세우스를 향한 집착의 끈을 끊어버리고 그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적극 돕는다.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
우리가 지금 나이가 들어가는 길목에서 누군가가 나타나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게 해준다고 약속한다면 , 그것도 낙원과 같은 곳에서 어여쁜 여인과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이 제안을 거절할 용기가 있을까?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즉 우리의 삶에서 죽음이 배제된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고민들은 전혀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나이 들어가는 것도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걷는 것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우리의 생명은 죽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유지된다. 삶은 연기된 죽음에 불과하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아버지 그리고 남편의 ‘빈자리’를 확인하다
집 떠 난지 20년째가 되어서야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어린 아들은 어엿한 남자가 되었다. 아내는 슬픔을 벗 삼아 나이를 먹었다. 오디세우스도 많은 시련을 겪은 결과 꽤 겸손해지고 자제력도 길렀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왕으로 환대를 받으리라 기대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아내 페넬로페 역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전사의 삶에 몰두하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사랑하는 아내의 상처와 직면해야만 한다.
오디세우스는 귀향의 초기 단계에서 만난 이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워낙 지략에 뛰어나고 노련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의 신중함 뒤에는 다른 것이 감추어져 있다. 오디세우스는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자신으로 인하여 초래된 가족의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간절히 원하고 사랑할지 어떨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한 겸손의 상징인 ‘거지’로 변장하고서, 최대한 주변을 잘 살피며, 조심성 있고, 겸손하고 또 공손하려고 노력한다.
과거로 살 것인가, 새로운 나로 살 것인가
많은 남자들이 은퇴 이후에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가족의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생긴 습관들과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이럴 경우 가족과 잘 지내기 어려우며, 결국 가족들은 은근히 남편과 아버지가 날마다 무슨 일을 하든 일단 집을 나가 주기를 바라게 된다.
또한 많은 아내들이 집에 있는 남편을 낯설어 한다. ‘내가 결혼했던 그 남자와는 엄청나게 달라진 이 남자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자녀들도 물론 이와 비슷한 의문을 갖게 된다. 반면 은퇴한 남자들 중 일부는 아내로부터 집안일 요구받는다. 그들의 아내는 마치 ‘이제 내가 당신의 보스야. 내 자릴 넘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경영권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며 남편이 오랫동안 누려 왔던 권력을 흡수해버린다.
그러므로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 자존심을 내세워서도 안 된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게 될 때까지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유심히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남자는 스스로 이렇게 묻는다. ‘예전의 나로 살 것인가, 새로운 나로 살 것인가?’
이처럼 우리는 자신에게 깊이 배어있는 전사의 습관을 이해하고 제거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그런 시간을 적극적으로 마련하지 못한다면 은퇴 혹은 나이 듦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어렵다. 알다시피 여기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귀향의 노력’말이다.~ <‘남자답게 나이드는법’에서 P235 중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존C.로빈슨 지음, 김정민님 옮김, 아날로그출판> * 존C.로빈슨 : 임상심리학자. 중년 남성의 심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남성 심리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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