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지극히 옳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다는 것이 우리의 행동 동기 가운데 하나다. 2015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 대략 150만 명에 달하는 페이스 북 정규 사용자 가운데 사회적 불안, 특히 사회적 인정 욕구에 목마른 사람들의 사용 빈도가 급증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기술이 구세주가 된다.
2005년에는 미국 성인 가운데 8퍼센트만이 소셜네트워크를 했다. 2013년에는 그 수가 73퍼센트로 늘어났다. 한편 요즘 미국인의 거의 절반이 잘 때 휴대전화를 침대 옆 탁자에 두며, 잠잘 때도 곰 인형처럼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이 된다는 뜻이다. 스크린의 시대에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은 대단히 사회적이 된다는 뜻이다.
2004년 7월, 온라인 그루밍의 충동이 정말 무시무시한 수준으로 커진 것이 “난 외로워 누가 나랑 이야기해줘”라는 말로 시작하는 채팅방을 개설한 순간이었다. 2020년에는 500조 개의 사물들(자동차, 토스트, 샴푸 등등)이 인터넷에 연결될 것이다. 이렇게 온 세상이 만물 인터넷으로 연결되면 그 속에서 연결을 끊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 될 것이다.
2013년 미국에서 7500명을 조사한 결과 그중 80퍼센트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15분 이내로 휴대전화기를 쓰는 것으로 밝혀졌다. 18~24세에서는 그 수치가 89퍼센트로 올라간다. 응답자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한시라도 전화기가 옆에 없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다고 답했다. 전사회적 열성이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대규모 소셜네트워크로의 연장은 실용성의 수준을 한창 넘어선다.
휴대전화가 없이 한두 시간 산책을 나갈 때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뉴스를 놓치는 것이 아니라 나 자 자신이 누락 될지 모른다는 공포다. 연인이 주는 관심의 등불 밑에서만 자신을 볼 수 있는 연인처럼, 나도 항상 타인의 눈길에서 벗어나면 사라질 위험에 처한 존재로 보인다.
스마트폰을 통한 소셜 그루밍의 성공이 우리 뇌의 도파민을 방출하고, 쾌락∙보상 시스템을 활성화한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중독증의 전문가인 심리학자 워터먼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두뇌 회로는 말 그대로 우리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타인들과 공유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공유할수록 기분이 더 좋아진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그렇다.
‘우리의 정보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그 반대 정보는 소수에게만 공유된다는 것을 알면 뇌 속 보상 시스템의 스위치가 켜진다.“ 트위터에서 ”대수롭지 않게 던진 듯한“ 계산된 발언이 여러 개의 리트윗을 받을 때 도파민이 분출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의미심장하게도 우리의 디지털 욕구는 거의 전적으로 사회적인 쪽에만 집중되어 있다. 워터맨은 사람들을 중독의 위험에 빠지도록 방치하는 것은 대부분 소셜미디어의 앱이라고 말했다. “문자 보내기,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 같은 것들입니다. 이와 반대로 뉴스, 날씨, 운동경기 결과 등을 다루는 비소셜 사이트에는 중독의 위험이 거의 없어요. 공유한다는 사실 자체에 중독성이 있습니다.”
채워져야 하고 연결되어야 하고 사랑받아야 하는 이 사춘기적 충동이 모두 하나가 되어 빛나는 토템 속으로 쏟아 부어졌다. 모두가 이 검은 에니그마 속으로 들어갔다. 지난 10년 동안 새 선수가 등장했다. 플랫폼이라는 선수다. (우버나 유튜브 같은) 플랫폼 회사는 그저 공장만 지어놓고 노동은 당신 같은 사용자들을 불러들여 시킨다. 플랫폼 도시의전망은 유토피아적인 동시에 오웰적이다. 그것은 정치, 경제, 문화가 모두 기회 있을 때마다 연결되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 아래에 굽혀든 미래의 전망이다.
한편 내가 잠시 홀로 있는 시간을 소망한다면, 그 대단한 군중들로부터 허가도 받지 않고 이탈한다면, 나는 사라진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다. 나는 하루 시간을 내어 문자에 응답하거나 초청을 거절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오늘 밤은 집에 있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태도를 아주 싫어했다. 다른 친구는 자기 페이스북에 결혼 소식을 올렸는데도 내가 응답하지 않았다고 마구 화를 냈다. (내가 페이스북을 끊은 지 7년이 지났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의 불편함뿐만 아니라 그들의 불편함까지 극복하는 것이었다. 홀로 있음은 정말로 금기가 되었다.
한편 전화기를 보기 시작하면 홀로 있음은 계속 미뤄진다. 나는 처음에 홀로 있음은 잃어버린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홀로 있음은 자원이다. 우리가 한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텅 빈 공간이 점차 줄어들고, 그 다음에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다. 결국 우리는 본 박사가 가졌던 풍요로운 내적 삶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외로움이라 부르는 실패한 홀로 있음과 대비되는 진정한 홀로 있음은 비옥한 영토지만,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힘들게 노력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타인과의 접촉만이 아기의 생각과 감정 발달을 도움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명한 심리학자 부츠홀츠는 갓 태어난 아기가 실제로는 외향적이기보다는 내향적인 상태라고 지적했다. 사실 자궁 내 태아 사진이 등장한 덕에 우리는 14주차의 태아가 젖을 빨고 싶은 욕구를 손가락을 빨아 충족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츠홀츠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을 위한 일뿐만 아니라 타인과 연결될 준비가 된 상태로 태어난다. 두 가지 필요, 홀로 있고 싶은 마음과 관계를 맺고 싶은 욕구는 필수적이다.” 홀로 있음이 없으면 아이는 자율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며, “우리의 사회적∙심리적 병증 가운데 대다수가 일차적으로 자기 조절 장애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외부 자극(전화벨 소리,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없을 때 뇌가 하게 되는 활동은 몽상이다. 몽상이란 그런 부드러운 용어다. 그런데도 우리 대부분은 그 말이 가리키는 마음 상태를 억눌러야 한다고 배워왔다. 아마 우리는 몽상이 게으른 손이라는 죄악과 관련되기 때문에 모르는 체하는지도 모른다. 악의 선동자로 간주된 게으름은 최소한 중세 이후 내내 죄악으로 취급되었다.
의식적 마음이 통제권을 넘겨준 뒤에도 우리의 뇌는 여전히 독자적으로 활동한다. 뇌의 가장 큰 속임수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투사하는 ‘공백’의 이미지다. 그것은 간섭하고 에고를 물리칠 벨벳 커튼이며, ‘나’라고 불리는 잔소리꾼의 입을 틀어막기 위한 착색된 스크린이다. 우리의 뇌는 자유롭게 ‘방랑할’수 있다. 뇌는 자유롭게 놓아둘 때 고도로 집중력인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있는 상황과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면, 마음은 디폴트(컴퓨터용어, 초기상태)모드로 이동하고, 처음에는 완전히 무 작위적으로 보이는 연결 관계를 검색한다. 그것은 절대 수용하지 못할 호기심과 개방성을 가지고 문제를 탐색한다. 하지만 이 무작위성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방랑하는 마음이 가진 힘은 아무것도 검열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나온다.
그것은 다른 상황에서는 절대로 생각하지 못할 연결을 만들 수 있다.” 스탠퍼드 대학 크리스토퍼 박사는 “몽상은 그것을 꾸는 사람에게 기발한 새 선택지를 주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창조적인 처리과정”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길을 찾으려면 군중 취향에 나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사람들은 ‘내가 좋아 하는 것’을 ‘우리가 좋아 하는 것’, 또 더 심한 경우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으로 바꾼다. 애당초 홍수로 만들어 낸 바로 그 온라인 테크놀로지의 기술을 받아야만 세상 크기만 한 콘텐츠 사이를 헤치고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독립을 포기하다 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개인적 취향이 아닌 집단에 대한 집착으로 가게 된다.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결정을 전달받고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웹사이트에 영화, 식당, 노래의 결정권을 맡길 때, 사람들은 중립적이고 편견 없는 가이드의 안내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엘리트주의를 치료할 방법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비평의 지형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합리적인 판단이고 다수의 견해이므로 가장 믿을 만하다고 여긴다.
우리는 수량화가 가능한 것에 이끌린다. 취향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이 통념이 너무 커지도록 내버려두어 그것에 눈이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베어들 정도가 되어버렸다. 별점이라든가 베스트셀러 순위는 자연스럽고도 비판의 여지가 없는 취향이 된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취향 같은 것은 절대 없다. 우리가 스스로 심미적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또 다른 무엇인가가 우리를 대신하여 결정을 내려준다. 베스트셀러 목록은 19세기 이후 독자들을 인도해왔고, 신문이 발행된 이후로는 매스미디어가 애완동물의 사료를 고르는 것부터 여행지를 선택하는 것까지 모든 결정에 영향을 미쳐왔다.
오늘날 우리는 ‘문화 포화 상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문화포화 상태로 인해 우리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과 꼭 봐야 하는 산더미 같은 동영상 밑에 깔릴 지경이다. 심리학자 베리 스워츠가 ‘선택의 패러독스’라 부른 것에 직면한다. 사람들은 선택지가 더 많으면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크린 시대의 시민들이 만나는 선택지의 홍수는 “해방보다는 마비를 낳는다.”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인들은 늑대 밥이 될 공포에서 벗어났다. 괴테와 루소의 활홀경에서 우리는 에레미아에서 ‘숭고’로, 우리의 인공적이고 그림 같은 도시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외경스러운 풍경의 호의적인 묘사로 넘어가는 변화를 본다. 자연에 대한 반짝이는 사랑은 낭만주의 시인의 글에서 격려를 받아 왕성하게 불타올랐다. 윌리엄 워즈워스가 1798년에 쓴 글을 들어보자.
봄날의 숲에서 나오는 한 가지 충동이
모든 현인들보다
인간에 대해,
도덕적 악과 선에 대해,
더 많이 가르쳐줄지도 몰라.
자연이 알려주는 이야기는 달콤하지;
우리의 방해하는 지성
사물의 아름다운 형태를 왜곡하지: -
우리는 그것을 해부하느라 죽여버린다네.
미국의 첫 백인 정착민들에게 자연은 정복의 대상일 뿐 올바르게 평가해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유럽을 지배했던 진부한 ‘자연 애호가’라는 야생관은 도시 건설과 산업화의 결과로 유럽이 자연의 위험에서 안전하게 격리된 섬 같은 곳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종의 사치였다. 괴테나 루소 같은 낭만적 인물들은 ‘야생’이란 겁내야 할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했다.
이제 도시혁명이 절정에 달했고, 인간이 어느 때보다도 도시화된 상황에서, ‘자연결손장애’는 모든 아파트촌마다 만개하며, 도시 성의 군중은 우리가 한 번도 방어해야 할 필요가 잇는 줄 몰랐던 인간 생활의 핵심적 구성 요소를 들고 나온다.
온라인에서 나는 현실의 삶에서보다 더 빛나고 더 매력적인 존재(말은 확실히 더 잘하는)가 된 기분, 더 큰 존재가 된 느낌을 받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연 세계는 우리를 정반대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일을 잠시 놓아두고 숲으로 들어가면 당신은 존재가 사라진다. 무감각하고 움직이지 않는 풍경 속에서 인간이라는 주체는 하찮아진다. 크로포드의 말에 따르면, 저기 바깥세상에서 자아는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닌 상황에 처해 있다.” 인터넷이 “여기 있어, 이것 해봐”라고 말하는 반면, 삐걱거리는 나무숲은 “넌 알 수 없어. 오로지 놀라고 또 놀랄 뿐이지”라고 속삭인다.
걷기에는 기술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틈새 순간을 활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이킹을 가거나 그냥 야채가게에 갈 때 이왕이면 경치 좋은 길로 걸어가는 것은 홀로 잇음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 기회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호기심 많은 자아에게 억지로 떠밀려 휴대전화도 없이 태블릿 피시도 없이, 만물 인터넷도 없이 세상으로 걸어 나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물의 풍요로움을 맛볼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할 자유, 완벽한 자유다. (....) 나는 모호한 개념들이 미풍에 흔들리는 언덕위 엉컹퀴처럼 부유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것들을 논쟁이라는 가시 박힌 족쇄로 묶어두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나는 모든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것은 혼자 있을 때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윌리엄 해즐릿이 문밖에서 돌아다닐 때 남긴 말이다. 이것은 혼자서 도시 공원을 잠깐 산책해도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정말로 도시를 벗어나서 용기를 주는 자연의 효과를 느꼈다면, 홀로 잇음이 마지막으로 주는 이득을 발견할 준비가 된 것이다. 모순적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서로에게 연결해주는 방식이다. 에세이 선집인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 없다>>에서 웬델 베리는 자연 속에서 혼자 걷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의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힘의 끌어 담김을 느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타인의 삶에 더 명료하게 반응한다. 생명체로서의 자기 내면에서 더 일관성을 갖추도록 그는 모든 생명체의 영적 교감 속에 더 온전하게 들어간다.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마이클 해리스 지음, 김병화님 옮김, 어크로스 출판>* 마이클 해리스 : 캐나다의 가장 주목받는 논픽션 작가.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에서 영문학, 대학원에서 문예창작학과에서 미술학 석사. 캐나다 총독 문학상 논픽션부분을 수상.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프카에게 인생을 물어보다!(카프카와의 대화) (0) | 2021.04.08 |
---|---|
우정이란? (0) | 2021.04.06 |
선, 진정한 사랑이란? (0) | 2021.03.18 |
오디세우스와 중년남자! (0) | 2021.03.12 |
목적 없는 산책 (0) | 2021.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