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대학 심리학 교수인 앨리슨 고프닉은 이 개념을 깊이 탐구했다. 그녀는 우리가 ‘아하의 순간(유레카)’에서 얻는 쾌감의 파도는 사유하는 마음을 위한 오르가슴과 같다고 주장한다. 오르가슴의 쾌감이란 결국 우리 몸이 생식하도록 하기 위해 채택한 동기 부여의 잔재주일 뿐이다. 이와 비슷하게 ‘아하’의 쾌감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더 많이 배울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주려고 DNA 속에 새겼는지도 모른다.
배가 부른 나는 마음 방랑 훈련을 최소한 세 시간 정도 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그 시간 동안 멍하니 있는 일은 거의 없는데, 그녀는 멍하니 있는 시간이 있고 그런 다음 ‘몽상’이 있다고 말했다. 미친 듯 날뛰거나 산만한 마음을 대충 ‘방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마음이 새로운 통찰력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하려면 공백 시간이라는 사치가 필요하다. 제대로 하려면 목줄을 느슨하게 해야 한다.
어떻게 시작할까? 마음은 약간 지루해질 때 방랑하니까. 목적 없는 산책이라면 좋은 선택이라 할 만하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햇볕이 내리쬐는 교정을 가로질러 걷는다. 그다음 디지털 신호를 침묵시켜 세상사에 손을 놓는다. 휴대전화 전원을 끄고 뒤 호주머니에 넣는다. 전원이 꺼진 상태에서 뭔가 중요한 일이 생각나면 공책과 펜을 이용한다.
나는 집에서 멀리 나와 있다. 친구에게서도 멀리 있고, 계속 신경 쓰이는 노트북에서도 격리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 달콤한, 계산되지 않는 세 시간이 내게 있다. 이 화창한 오후를 나는(위태롭지만) 마음대로 쓸 수 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생각 그 자체뿐이다. “나는 몽상에 대해 몽상에 빠지려고 한다.” 나의 뇌가 말한다. 그런 다음 자발적인 응답이 나온다. “나는 몽상에 대해 몽상에 빠지고 싶다는 내 소망을 검토하는 중이다.” 반대로 이 생각은 불안 응답을 도발한다. ‘이제 나는 몽상에 대해 몽상에 빠지기를 소망하지 말아야 하는지 걱정이 된다.“
그 길을 가다보면 광기를 만나게 된다. 나는 내 마음이 조종간을 잡도록 내버려두어야 하고, 그것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힘들고 미묘하고, 마치 달걀의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하는 일과도 같다.
프로이트가(전형적인 인물이지만) 일찌감치 등장한다. “행복한 인간이 아니라 불만이 있는 사람만이 환상을 품을 수 있다. 헤매다가 들어선 숲 속에서 눈을 깜빡이면서 나는 몽상에 빠지는 사람이 완전히 만족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뭔가 있는가? 이런 공백 세 시간은 미친 사치이고, 모두가 그런 공백을 쉽게 얻지는 못한다.
버지니아 울프도<<자기만의 방>>에서 그렇게 말했다.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에서 평화와 고요함을 가졌더라면 위대한 작가가 훨씬 더 많이 나왔을 것이다. 그녀는 여성 저자들(양육이라는 압박 속에서 틈틈이 글을 한 줄씩 써나갈 수밖에 없었던)이 얼마 안 가서 “게을러질”수 있고 “길거리 모퉁이에서 빈둥대고 생각의 물줄기가 개울로 빠지더라도 내버려둘” 수 있을 것이다. 스토는 그 속에서 “수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그 “몽상의 상태”에 도달하려면 혼자 고립될 권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워즈워즈, 바이런, 사튼, 시인 그들은 모두 떠돌아다녔다. 호숫가 오두막에 은둔하든 아니면 더 고집스러운 방법으로든 다들 방랑했다. 릴케는 그의 유명한 편지에서 이 전략을 이렇게 요약한다. “너의 홀로 있음을 사랑하라. 그리고 그것이 너에게 주는 고통을 담아 노래하라.”
나는 해변으로 길을 찾아 내려왔다. 그 교정의 서쪽 외곽에 있는 누드 비치에까지, 한 남자가 구릿빛 황혼 햇살에 물든 파도를 뚫고 헤엄치고 있다. 혼자서, 그리고 옷을 입지 않고, 정처 없이 가고 있었다. 그의 팔 동작이 내 주위를 끌었는데, 이상하다. 이건 카프카 스타일인데, 나는 프란츠 카프카가 홀로 몽상에 잠겨야 할 필요를 매우 솔직하게 털어놓았던 것을 기억한다. “글쓰기는 철저히 고립이고, 나만의 차가운 심연 속으로 침잠하는 것이다.” 내 기억을 상기시킨 것이 그 차가운 물이었던가?
카프카에게는 펠리체 바우어라는 피앙세가 있었다. 그녀는 그가 글을 쓰는 동안 그의 곁에 앉아 있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가 곁에 있으면 작업을 망칠 것이라고 말했다. “글을 쓸 때는 아무리 홀로 있어도 충분하지 않다”라고, “그 어떤 고요함도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심지어 밤도 충분히 밤이 아니다.” 그들은 결혼식을 취소했다.
30분 뒤 캠퍼스 쪽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이런 조각들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내가 제멋대로 떠올리는 생각들이 어떤 원초적 원소의 웅덩이에 들어 있는 엉성한 유전적 재료 조가들 같았다. 여기저기서 가져온 단백질 크기의 개념들을 조합하고 변형하여 내 마음에 더 적합한 생각들로 발전한다.
이 산책은 고작 세 시간에 불과했고, 특별한 뭔가를 때려 부순 것도, 유레카의 순간에 도달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방랑하는 마음이 통찰력에 얼마나 필요한지 깨달았다. 나만의 정신적 작업장 같은 곳이 없는 한 타인들의 아이디어를 조합하여 나만의 고유한 의미를 마들어 낼 수 없다. 몽상이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오로지 앵무새, 더 심하게는 컴퓨터에 불과하다. 몽상은 신세계의 엔지니어다.
슬프게도 유레카 수준의 몽상은 숲을 헤매고 다닌다고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짜증스럽게도 몽상을 잘 다루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훈련된 상태가 아니다. 한 시간 동안 공원에서 멍하니 있는 것은 한 시간 동안 포켓몬고 게임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버트런트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여가의 현명한 사용은 문명과 교육의 산물임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퓰리처상을 받은 드 그라치아는 ‘여분의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은 문명의 산물이 아니라 문명의 성공을 재는 리터머스 시험지라고 믿는다. 그는 이렇게 쓴다. “아마 어떤 나라의 내적 건강을 판단하는 척도는 그곳 주민들이 어느 정도까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좋은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드러누워 생각에 잠기고, 목적 없이 돌아다니고, 앉아서 커피 마시는 것 등,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생각이 마음대로 가게 내버려둘 수 있고 혼자 평화롭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드 그라치아의 기준에 따르면 몽상은 문맹률과 함께 삶의 질 지표 항목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의 기준에 따를 경우 우리의 분주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빈곤해 보이고 굶주린 모습을 띠기 시작한다.
시간을 잡아먹는 앱이 내 눈에는 더 섬세하고 성숙한 여가를 체험하지 않으려는, 또는 체험할 수 없는 문화에 처방해주는 안정제로 보인다. 우리는 악마가 게으른 손을 사랑하다고 말한 사람들을 믿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효율성, 성취에 대한 끊임없는 증거를 갈망한다. 이런 증거를 향한 갈망, 번쩍이는 외적 증명에 대한 갈망 때문에 홀로 있음은 그것으로부터 얻어갈 것이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취약해질 것이다.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마이클 해리스 지음, 김병화님 옮김, 어크로스 출판>
* 마이클 해리스 : 캐나다의 가장 주목받는 논픽션 작가.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에서 영문학, 대학원에서 문예창작학과에서 미술학 석사. 캐나다 총독 문학상 논픽션부분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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