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살아 나가라.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꽃잎을 줍는 아이들은
그 꽃잎들을 모아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그뿐.
- 라이니 마리아 릴케
연꽃 / 이도윤
달도 때로는
술 취해 뒹구는 인간 세상이
그리운 것이다.
아무도 몰래
더러운 방죽으로 스며든 달이
진흙 발을 딛고 검은 하늘을 내어다본다.
갓 피어난 흰 연꽃이 천지에 환하다.
- 이도윤,『산을 옮기다』(도서출판 詩人, 2005)
가시연꽃 / 최두석
자신의 몸 씻은 물 정화시켜
다시 마시는 법을 나면서부터 안다
온몸을 한장의 잎으로 만들어
수면 위로 펼치는 마술을 부린다
숨겨둔 꽃망울로 몸을 뚫어
꽃 피우는 공력과 경지를 보여준다
매일같이 물을 더럽히며 사는 내가
가시로 감싼 그 꽃을 훔쳐본다
뭍에서 사는 짐승의 심장에
늪에서 피는 꽃이 황홀하게 스민다
- 최두석,『투구꽃』(창비, 2009)
수련(睡蓮) / 고두현
단 사흘 피기 위해
삼백예순 이틀
잠에 든 널 보려고
아침마다 벙글었다
저물녘 오므리며
나 그렇게 잠 못 들었구나
물 위로 펼친 잎맥
연초록 윤기 좋지만
물 밑에선 자줏빛 슬픔
오래 견뎠지
남모를 뿌리 아래로만 내려
연못 바닥까지 닿는 동안에도
햇살은 제 몸 넓이만큼 세상 비추고
나는 네 물관 타고 몸속만 오르내렸구나
이토록 깊은 잠이 너를
딱 한 번 깨우고 사라지기까지.
- 고두현,『달의 뒷면을 보다』(민음사, 2015)
연꽃 피네 / 이대흠
덕진공원 호수에 연숲이 있네
그 위로 녹슨 철교 흔들거리네
도 미 솔 화음 속 입맞추며 남녀들
세상의 철교 건너네
불현듯 연숲으로 달디단 바람 불고
엉덩이만한 잎새들
깔깔깔 들썩이네
팔월 땡볕
하늘이 쩌억 갈라져 자꾸
재채기 나오려 하네
햇살, 양수처럼 뿌려지네
연꽃 피네
- 이대흠,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창작과비평사, 1997)
연꽃 구경 / 정호승
연꽃이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연꽃처럼 살아보자고
아무리 사는 게 더럽더라도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죽고 사는 게 연꽃 같은 것이라고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해가 질 때쯤이면
연꽃들이 오히려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가장 더러운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 정호승,『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 2004)
연잎 앞에서 / 오탁번
연잎에 내리는 여름 한낮 빗방울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그리움 따라
연잎마다 크낙한 손바닥 하나씩 펴고
호수 위에 떠다니는 내 마음 손짓하네
물결 따라 일렁이는 푸른 연잎을 보면
내 눈빛 잠자리 겹눈처럼 밝아지지만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때 그 입술은
예쁜 연꽃 봉오리로 아직도 숨어 있네
이른 아침 연잎에 내리는 이슬방울인 듯
마주보며 피워올린 첫사랑의 꽃봉오리!
아무도 모르는 물밑 아득한 깊이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랑으로 피어나는 연꽃!
연잎에 내리는 저녁나절 빗방울인 듯
아직도 눈에 밟히는 그리운 얼굴아
잔잔한 호수 물결 지는 듯 다시 일 때
서늘한 연잎 위에서 푸른 눈썹 떠오르네
- 오탁번,『1미터의 사랑』(시와시학사, 1999)
겨울 궁남지 / 복효근
저 수천 평 연밭에 연꽃은 자취도 없고
허리가 휘어지거나 무릎이 꺾인 꽃대궁
마른 꽃대궁이 마이크 같다
한바탕 유세를 부린다
나도 한때 꽃 피운 적 있노라고
홍련 백련 꽃이었던 적 있었노라고
이제는 구멍 숭숭 벌집 모양
그야말로 벌집이 되어버린 자궁만이
자랑처럼 남아 있다
그래, 자궁이지 궁이고 말고
구멍마다 칸칸이 연의 씨앗이 담겨 있어
씨앗 하나엔 우주가 담겨 있다면 믿겠나
저 씨앗을 연밥이라 부르느니
모름지기 수천 평 연밭을 일구고 먹여 살린
밥이라 하는 것이 저 궁에서 나왔느니
진흙탕 젖은 늪 저승이라 도 두렵지 않던 홍련
백련 왼갖 잡련들이
한 빛깔로 저무는 적멸보궁
무슨 고요가 이리도 소란스럽다
겨울 궁남지*엔
산부인과 대기실에 모인 어머니들처럼
다산多産의 무용담 왁자하다
유세 부릴 만하다
* 궁남지: 부여읍에 있는 연못으로 백제 무왕 때 축조된 것이라 함. 주위에 수천 평의 연밭이 조성되었음.
- 복효근,『마늘촛불』(도서출판 애지, 2009)
약속 / 정일근
늦여름 장마비 속에서
흰 꽃을 밀어올리는
수련睡蓮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만든 집과 집 속의 사람이
속수무책으로 젖고 있는데
한사코 자신의 야윈 몸 위로
화사한 꽃을 피우려 애쓰는
착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의 굵은 손바닥 후두둑 후두둑
세상의 등을 때려
큰 절집과 열세 채 작은 절집 품은
영축산 통도사도 단단한 결가부좌를 풀고
눅눅한 오수에 빠져드는데
산山 번지도 사라진 빈터
깨어진 돌확 속에서
단정한 앉음새로 앉아
가을이 오기 전에는 꽃을 피워야 한다는
그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찬 빗속에서도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예, 라고 대답하며 수런거리는
수련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 정일근,『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시와시학사, 2001)
첫물 수련 / 문성해
수련이 언제 이리 피었나
흙탕물 논물 위에 첫 수련이 돋았구나
오늘 아침 세수도 못하고 짓무른 눈가 비비며 보는데
누가 지어주나 이름도 기다리지 않고
수련이 작년의 이름으로 내 곁에 왔네
첫 수련의 주둥이가
막막한 수면을 뚫고 나오는 그 힘으로
드넓은 고추밭에 첫 고추가 매달리고
아이 몸에 첫 두드러기가 돋고
마른하늘에선 첫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야
그다음엔
후득후득 일제히 돋아나면 되는 것
터져나오면 되는 것
그 힘으로
희부윰한 새벽을 찢으며
첫 기러기떼가 날아오르는 것이야
- 문성해,『입술을 건너간 이름』(창비, 2012)
수련이 지는 법 / 복효근
수련은 질 때
꼿꼿하게 수면 위로 뻗어 올렸던
꽃대에 힘을 빼버린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혀
오므린 꽃을 제 뿌리 곁에 묻는다
뿌리에서 꺼낸 빛깔과 향기를
다시 거두어 제 어미에 젖을 물리는 것이다
왔던 길 되짚어 돌아간다
발자국마저 지우고
없었던 그 자리 찾아간다
가장 거룩한 신화를 바람 위에 쓴다
가장 아름다운 자화상을 물 위에 그린다
제 주검을 제가 치우고 가는
완전연소 차가운 불꽃의 생
- 복효근,『따뜻한 외면』(실천문학사, 2013)
흰 수련꽃 / 한승원
흐르는 물이 잠시 머무르면서
시끄러움과 고요를 한데 버무려놓은 그 미녀의 하얀
넋을
아십니까,
미녀는 잠이 많다는 속설대로
물에 뜬 채로
오후 1시쯤부터 졸기 시작하다가
4시부터 이튿날 아침 7시까지 깊은 잠을 자버리는
그녀의 잠을 깨우고 싶어 나는 안타까워합니다,
잠자리에 들 때에도 자고 일어날 때에도 늘 상큼하지만
저 세상 돌아갈 때는 추한 모습 보여주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깊이 수장시켜버리는 그녀
아, 그녀의 깊고 그윽한 알몸의 영원한 잠이여.
- 한승원,『달 긷는 집』(문학과지성사, 2008)
아침의 영광 / 정일근
여름비 밤새 내리다 그친 새벽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 찾아온다
조용조용 하얀 맨발이
풀잎 이슬을 밟고 오는 소리
누구신가 문 열고 나가보니
여름비에 몸 씻은 마당으로
푸른 화엄들 고요히 뜨겁고
물항아리 위로 수련이 피었다
하얀 꽃 한 송이 활짝 피었다
수련은 내 마음에 사시는 그분의 꽃
우리 집으로 찾아오신 그분께
오체투지로 세 번 절하고
찻물 끓여 차 한 잔 올린다
수련에게 찬 한 잔 권하는 아침
나는 참으로 영광스럽다
- 정일근,『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문학사상사, 2003)
西湖의 여인 / 오탁번
붉은 연꽃 피어오르는 여름 한나절
모두들 땀 뻘뻘 흘리며 그짓 하고 나온 듯
혹은 걷고 혹은 자전거를 타고
서호를 맴돌던 항주의 젊은이들이
해 저물자 모두 연잎 뒤에 숨어버린 듯한
적막한 밤
간이 상점의 여주인과 말은 안 통하지만
서로 건네주는 술잔에는
아주 많은 것이 통해서
젖무덤 반쯤 비치는 비단옷 가슴으로
연봉에서 하얀 연심 꺼내 깨트려
술안주로 좋다는 시늉하며
내 입 안에 넣어준다
그짓 다 끝내고 나서 또 보채듯
흐린 전등 아래 눈웃음치는
여인의 긴 머리칼 너머
잠 못 이루는 서호는
붉은 연꽃 밤새 토해내고 있다
겨드랑이 아랫도리 다 젖는 밤에
사랑이란 이렇게 밤이슬 내리듯
대륙이나 반도나 다 같은 것일까
밤중에 홀로 피는 연꽃처럼
뿌리째 물 속 깊이 담그고 다 젖은 채
내 손목 잡아 끌어 연잎 위에 눕히는
서호의 여인아
왼종일 제 서방한테는 보여주지 않았던
붉은 연꽃 한 송이 되어
내 눈앞에 솟아오른다
호숫가 어둠에 숨어
사랑을 나누던 젊은이들도
자전거 타고 하나둘 사라진 깊은 밤
간이 상점의 흐린 전등 아래
여인의 몸은 서호의 물결에 다 젖는다
나도 다 젖는다
연꽃 봉오리
한밤중
서호에서
터진다
- 오탁번,『1미터의 사랑』(시와시학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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