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아주 도발적이다. 노후에 텃밭 농사일에만 너무 매달려 있거나 전원생활에만 푹 빠져 바깥 야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이른바 ‘산골마니아, 전원생활 과몰입자’얘기를 하는 것이다.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어떤 출연자는 자기가 산속에 들어 온지 3년 동안 한 번도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유는 자기가 사는 곳이 너무 좋아 나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선(禪)에서 말하는, 초심을 유지하는 깨달음의 소유자일 수도 있겠고 그렇지 않다면 과 몰입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또 어떤 자연인은 자기가 사는 넓은 산골짜기를 왕국처럼 꾸며 놓은 것을 보았다. 지은 집만 봐도 대 여섯 채는 될 듯했다. 나는 일순간 “저 많은 집들과 조경을 하는 데 눈 뜬 모든 시간을 다 쏟아 부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어느 분은 하루에 한 끼씩 식사를 하면서 한 두 평 남짓한 황토 움막에서 명상과 더불어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도 보았다. 이렇듯 자연이란 거대한 캔버스에 어떤 그림을 그려나가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질 수 있다. 남들이 부러워 할 만큼 아름답게 꾸미든, 아니면 주변 경관으로 여백을 채우고 자기방식대로 자유롭게 살든 말이다.
산골 전원생활에는 몰입의 도구로 가득 차 있다. 작물을 몇 가지만 심어도 풀 뽑고 가꾸는 데 눈 코 뜰 새가 없다. 거기에다 화단과 잔디까지 돌보게 되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버린다. 근심 걱정할 틈이 없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과 몰입을 불러 올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얘기 해본다면, 가끔씩 눈앞에 보이는 일상과 과감한 이별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때는 정든 님(거처)을 과감히 뿌리치고 훌쩍 떠나야 한다. 이른바 외도를 하자는 것이다.
아무리 맑은 시냇물에도 이끼가 끼게 마련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과에는 신선함이 떨어진다. 에델바이스가 핀 아름다운 알프스 산기슭일지라도 매일 보는 그곳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산과 들판일 뿐이다. 관심이 사그라지고 따분해지면 뇌 활동까지 줄어들어 나도 모르게 어느덧 권태라는 불청객이 스멀스멀 찾아오게 마련이다.
''밭뙈기만 일구다 다 늙을 것인가?''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요즘은 전국 각지가 계절별, 테마별로 잘 꾸며져 있다. 아무리 자기가 사는 곳을 잘 가꾸어 놓아도 비교가 될 수 없다. 때로는 문을 걸어 잠그고 휭 하니 유람을 떠나자는 말이다.
옛날에 말을 타고 달리던 인디언들은 너무 빨리 달리면 영혼이 쫓아오지 못한다고 하여, 미국 서부 세도나(Sedona)라는 관광 명소를 통과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린 뒤 바위에 앉아 쉬어 갔다고 한다.
이렇듯 과몰입에서 빠져나오려면 바쁜 일 멈추고, 과감히 쉴 줄도 알아야 한다. 하던 일을 멈춰야 자연이 보이고, 평상에 누워야 하늘이 보인다. 영혼이 떨어져 나간 몸은 그저 단순한 일벌레, 일중독자(워커홀릭)에 불과하다.
산골에서 명상이나 독서 등으로 마음을 다잡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럴 때는 색다른 장소를 찾아 여행을 훌쩍 떠나는 동적인 행동이 제일 좋다. 나는 내 차를 가지고 며칠 이상씩 나 홀로 여행을 떠난 적이 많았다.
카메라, 책 몇 권과 낚시 도구를 챙겨들고 떠난 여행은 전혀 심심하지 않다. 평소 잘 읽혀지지 않는 사어(死語)로 된 딱딱한 책이라도 고독한 여행지에서는 친한 벗이 되어 주고 눈에도 쏙쏙 들어온다. 처음부터 용기내어 무인도 여행을 하였기에 다른 낯선 지역과 도서여행은 더 수월하게 다닐 수 있었다.
울릉도, 욕지도, 신안군 천사 섬, 홍도, 제부도, 제주도 등과 전국 국립공원과 계절별 아름다운 곳을 찾아 다녔다. 사명대사와 고운 최치원 선생 등 옛 명사들이 짭잘한 주먹밥 싸들고 걸어서 유람했던 곳을 차로 편안하게 다녔으니,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났다는 생각을 가끔 할 때도 있었다.
노후는 모래시계와 같이 제한 된 시간 속에 사는 삶이다. 산골 한 곳에서만 텃밭과 정원 가꾸기 등으로 보낸다면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더구나 지나치게 몰입하게 되면 종국에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혹사당하게 되고 소중한 시간까지 다 날려 버리게 된다.
나는 사륜구동 밴에 항상 취침을 할 수 있는 침낭과 코펠 등이 실려 있다. 언제든 휭 하니 떠날 수 있도록 핫 스탠바이 시켜 놓은 것이다. 처음 무인도로 갈 때는 마치 이주하는 사람처럼 짐을 잔뜩 싣고 간 적이 있다. 울릉도에서의 밤낚시, 제주도 일주 탐방 등의 추억들이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즐기고자 떠난 여행도 며칠간 이어지다보면 피로가 쌓여 돌아온다. 그 때는 자기가 살던 집이 제일 편하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지루하고 의욕이 떨어지던 산골이 새삼 파라다이스처럼 느껴진다. 이렇듯 의도적인 환경 변화를 줌으로써 심신을 힐링하고 환경까지 새롭게 맞이하는 이중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버벅대는 컴퓨터를 깨끗이 지우고 새 프로그램을 다시 깔듯이 마음을 한번 씩 포맷시켜주자는 것이다. 교만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을 구출해내는 방법은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우선 나는 산골농원에 계속 머물지 않고 이틀 간격으로 간다. 처음부터 거주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세컨드하우스(관리사) 개념으로 접근했다. 번듯한 별장처럼 거금을 들여 전원주택을 짓지 않았기에 금전적 쪼들림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다.
손수지은 황토집이 휴식 공간과 간헐적 취침공간이 돼주기도 한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그곳으로 이주하지 않고 관리사 개념으로 생각한 것이, 지나고 보니 일중독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고 노년의 여유로움을 더 가지게 해준 거 같다.
농원에 가지 않는 날은, 나만을 위한 자유로운 시간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평범한 진리처럼, 눈앞에 놓여 진 일들을 멀리하는 것은 이 방법이 매우 좋다. 그 공간을 벗어나야만 일구덩이라는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이 원칙을 지금까지 계속 지켜오고 있다.
워라벨을 갖자
산골이나 전원생활을 택했을 때는 이유가 어떻든 간에 소유중심에서 존재중심으로 정신적 무게중심을 이동시킨 거로 봐야한다. 그런데 일에 매몰된 시간이 많을 경우 여전히 소유중심에서 헤매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지인들마저 가지치기하는 마당에 정서적 우선순위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워라밸을 적절히 유지하면서 가치관까지 재정립하여야 할것이다.
지나고 보니 나는 전원생활 처음 2,3년쯤과 중간 중간마다 몇 번의 고비가 찾아온 거 같다. 그럴 때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근본적으로 분석해봤다. 모기 뱀 등 열악한 환경문제인지, 병원 마트 등 주변 기반시설의 문제인지, 금전적 문제인지, 과 몰입에 따른 심신의 피로감인지, 영농실패에 따른 회의감 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갈등의 첫 번 째 원인으로는 전원생활에 대한 기대감과 만족감과의 괴리현상이라고 본다. 워라벨을 안배하지 못해서 힘든 시간들이 누적되다 보면 그렇게 불만이 쌓여 갈 수 있다. 생계형으로 매달리다보면 매일 출퇴근하듯이 해야겠지만 퇴직 후 취미 농의 경우에는 매일 가는 것 보다 하루 걸러서 가면 그 곳이 새롭게 와 닿는다.
자유로운 여행에 걸림돌이 되는 가축(개, 닭과 벌 등)의 개체수도 조절해야 한다. 키우고 돌보는 가축들로 인해 일 년 내내 발이 묶여 가택연금 같은 신세가 돼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인들의 모임회식장소로 전락해서 전원생활을 하는 건지 펜션을 운영하는 건지 헷갈려서도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는, 노동의 시름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담금술을 곁에 끼고 깊게 사귀다 보면 여행은 고사하고 병고로 조기 하산을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산골 전원생활일지라도 당연히 일에 대한 욕망이 큰 자리를 잡고 있을 수 있다. 유유자적한 여유 있는 생활을 꿈꾸어 왔는데도 불구하고 경험적 행복은 줄어들고 어느덧 일의 덫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심심해서든 욕망이든, 상황이 이쯤 되면 처음 입문했을 때와 지금까지 느꼈던 산골 전원생활들을 재구성해봐야 한다.
다시 마음을 새롭게 다잡거나 자신이 처한 욕망의 일부를 내려놓는 통 큰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던 곳을 정리하고 원점 회귀를 해야 하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나 또한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겪었기에 20년 이상 영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이라 하지만 생명이 있는 ‘그대’가 없다면 숲속 나무와 바위 그리고 푸른 하늘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하루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면 나의 존재는 그냥 생명이 없는 말 그대로 나무나 바위처럼 사물로 변해 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당신을 존귀한 자연인이라고 여기며 응답하고 배려하는 2인칭 상대가 없기 때문이지요.
자연은 3인칭인 ‘그것’이다. 유대인 랍비인 마르틴 부비(1878~1965)의 외침을 들어보자. ‘진리의 진지함으로 말하노니 그대여, 사람은 ’그것(자연)‘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프랑스 철학자 마르셀(1889~1973)은 ‘그대-이론’에서 3인칭 대상은 “나에게 현존(現存)이 아니고 부재(不在)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그들이 나에게 응답하지 않고, 또 나를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존재물(또는 사물)의 세계에서는 내가 있어야 그대가 있지만, 존재(또는 존재의 의미)의 세계에서는 그대가 있어야 내가 있다. 다시 말해 그대가 있어야 내 존재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심해에 한동안 머문 고래가 지상의 공기를 마시기 위해 해상으로 떠오르듯이, 인간은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바깥 인간 세계와 교감이 있어야 한다.
장자크 루소도 기껏 섬에서 두 달 간 머물렀다고 한다. 그것도 하인을 데리고 말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역시 2.5년 간 자연 속에서 머물다 세속으로 나왔다. 그는 자연 속에서 하루를 보내면서도 일과가 끝난 오후에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윌든’이라는 책을 내는 데는 4배가 더 걸린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노후 마지막 10년은 바깥에서 일반인 생활로 인생을 마감하였다.
이렇듯 우리는 인간이기에, 자연 속에서 고독이 주는 혜택을 받으면서 외로움이 엄습해와 마음이 무(無)로 향하기 전에 바깥 공기를 쐬고 사랑하는 또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면서 정서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오늘은 새벽 일찍 앞산 산행 길에 도전했다. 긴 장마로 인해 야외활동이 중단되었는데 비를 맞을 각오로 산행에 나섰다.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린다. 차라리 이럴 땐 세찬 소나기라도 내리면 더 시원할 듯하다.
안개 자욱하고 습한 숲속 산행은 오히려 운치를 더한다. 여름철 매미들이 마치 풀피리를 불어 대는 것처럼 떼를 지어 연주를 하며 나의 산행을 반겨주는 거 같다.
나름 아름답게 꾸며 놓은 산골 정원도 높은 산 먼 곳에서 바라보면 점하나에 불과하다. 이렇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오늘도 반복된 일상에 매몰돼 있었을 것이다. 가끔씩 이렇게 대자연에 동참하여 호연지기를 느끼면서 나를 위로하고 쓰다듬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두 마음
정든 곳 어디 메냐
잠시 머물며 쉬어 가는 곳이지
내 갈 곳 어디 메냐
눈 떠서 마음 가는 곳이지
내 집, 내 밭뙈기, 여행지도
잠시 머물다 떠날 곳이거늘.
눈 뜨면 잽싸게 나타나
늘 찰싹 붙어 지내 온 그대
사랑보다 미움을, 기쁨보다 슬픔을,
비움보다 채움을 갈망했던 그대
기쁠 때는 더 들뜨게 하고 슬픔은
더 깊숙이 안겨주었지.
때 되면 더위와 추위는 떠나는 데
내 안의 변덕은 물러남이 없다
내쳐봐도 소용없어 어르고 달래서
긴 하루를 동행할 수밖에.
그대 실체 이젠 알았기에
좀 더 품어주고 다독여야겠다!
<‘나만의 전원생활'에서 발췌, 중산 김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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