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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형식에 대하여!

[중산] 2023. 10. 1. 19:57

 

“생선을 굽고 전을 부치고 나물을 만들고 송편을 빚는 등 차례음식 준비에 많은 시간을 쏟다보니 명절이 어떻게 흘러 갔는지 모르겠어요!“ 명절에 이런 푸념 섞인 기사를 메스컴에서 가끔 접한다. 이렇듯 먼 길 가고 오는데 이틀을 잡아야 하고, 음식과 차례에 예를 다하다 보면 명절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어떤 사람은 복이 많아 해외여행을 떠나는데, 왜 나만 이런 혹사를 당해야 하나?“하는 생각하는 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식된 도리로서 조상님께 예를 갖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또한 유교풍의 형식을 취하지 않더라도 종교적인 형식이든 마음속이든 나름 추모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이런 생활을 일흔이 다 될 때까지 성묘, 벌초와 차례를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숙명적이라 여기며 지켜왔다. 손주들과 시끌벅적했던 시간이 다 지나가고 아들네가 떠난 조용한 이 시점에서, 우리 문화의 유산과 명절의 개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의미에서 글의 소재를 택해봤다.

 

우리는 주변에서 옛방식의 예법을 고집하며 그것을 충실히 수행하려는 사람을 보고 흔히들 '조선시대 사람'이라며 조롱섞인 농을 건낸다. 그 잔존 사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유교 사상이 통치이념으로 뿌리를 내린 시대였기에 근거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유교의 변천

 

기원전 5세기경에 공자 (BC551~479,71세)를 시조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인 유교가 탄생되었다. 공자가 주창하는 인(仁)은 곧 효(孝)이며 제(悌)라 하여, 이런 유교 이념이 수 천 년 동안 중국의 중심 사상이 되었으며, 우리나라도 고려 말 이후 오늘날까지 정치, 사회적 규범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긴 세월 동안 유교는 위기들이 많았다. 전쟁이 난무하는 춘추전국시대 (BC770~221)에는 제사가 많은 귀족들도 제사의 예에 무감각해지고 결국에는 소홀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공자는 예식과 제사는 모든 과정이 장엄하고 엄숙하게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춘추시대 이후로 유교의 지위가 하락하였다. 

 

만약 맹자 (BC372~289)가 다시 유교를 일으키고 순자 (BC298~238?)가 유교를 개혁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한나라 무제가 다른 학파를 모두 없애고 오로지 유교 사상만 숭상하지 않았다면, 공자는 어쩌면 지금처럼 존경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BC259~210)은 강한 통치를 위해 유교를 말살하고 법가사상을 취했다. 그리고 모택동 1966년에서 1976년까지 10년 동안 극좌 사회주의 운동, 이른바 문화대혁명에서 물질보다 정신이념중심으로 정책을 폈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다. 등소평 이후 실용적 개혁과 개방으로  유교의 기본정신마저 흔들렸다.

 

유교 창시자 공자의 사상은 어떠한가?

 

공자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논어>이다. 사서오경에서 예기는 5경의 하나로 중국의 예에 관한 기록과 해설을 정리한 유교경전이다. 제사에 관해서는 제법(祭法), 제의(祭儀)등이 기록되어 있다. 맹자가 나타나 인의 실천을 위한 의의 덕을 내세워 인의를 강조하였다.

 

맹자에 의하여 유교는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정치론으로도 정비되었다. 삼강오륜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우리 어릴 때 삼강오륜이라는 말을 마치 가정의 규율처럼 듣고 자랐다. 그 만큼 우리의 몸에 배인 사상이 되었다. 충효를 강조하면 가족의 질서 곧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성리학 ∙ 주자학의 탄생

 

960년 중국의 다섯 번 째 통일국가인 송나라는 당나라 때의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고, 유교를 중심사상으로 복원,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유교의 새로운 학문인 주자학이 탄생되었다. 사대부인 유학자들이 유교를 발전시켰고 유학자만 과거에 응시하는 등 사농공상승(士農工商僧)라는 계급의식이 만연하였다.

 

주자학은 가족중심으로 하는 혈연 공동체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공동체의 윤리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대학>의 팔조목인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 ∙ 평천하를 개인 수양과 국가의 통치를 위한 행위규범으로 삼았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는 유교텍스트들 중에서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사서를 경전 화시킴으로써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1289년, 안향은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주자서(朱子書)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이라는 표현보다는 ‘성리학’이라 부른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였지만 그 지지 세력들은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유교 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리기기 위해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규범을 집대성한 책이 경국대전이다. 여기서 유교는 국가 운영 기본이념으로 하였다. 

 

명절과 유교의 상관관계

 

지금쯤이면 가정마다 한가위 명절을 맞아 조상님에 대한 추모의 시간을 다 가졌을 것이다. 각처에 흩어져 있던 자손들이 조상님과 부모님에 대한 도리를 다 한다고 수많은 인구가 연휴기간 동안 거대한 이동을 계속 진행 하고 있다. 

 

형식은 명절에 조상님 뵙는다지만 산 사람위주로 추모의 개념이 바뀐 지 이미 오래다. 과거와는 달리 명절이 포함된 엿새 연휴에는 해외여행을 떠나는 공항인파들(110만명 추정)로 북새통을 이룬 걸 보면 알 수 있다.

 

대충 어림잡아 짐작해보면, 140년 역사를 가진 기독교 인구가 20%(약1,032만명), 천주교 인구는 11%다. 이 분들은 대다수 종교적 행사로 대체할 것이다. 그리고 불교(17%,2022년)를 믿는 분들은 인근 사찰에 위폐를 봉안해 두고 제사를 갈음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총 인구 5200만 명 중 절반만이 옛 풍습을 따르고 있으며, 그것도 옛 방식을 고집하는 집성촌이나 옛 사대부 전통을 잇는 집안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현대식으로 많이 변모해 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명절은 이미 산사람들의 만남시간이 되었다. 평소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처럼 반갑게 만나는 시간이다. 서양에서는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에는 우리네처럼 이런 회합의 시간을 갖는다. 필자 역시 추모와 가족 만남의 시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일례로, 가까운 처남댁은 명절은 산행이나 여행에 초점을 맞추고 부모님 기제 일을 휴일(토,일)로 변경해서 지내고 있다. 제사 음식도 대폭 축소하고 그날 참석자의 기호음식 위주로 준비해서 회식을 겸하고 있다.

 

조선시대 당시 고관대작이 사는 사대부집안을 제외하고는 일반 양반 집안에서조차도 예를 형편껏 따라했을 뿐이지 예법을 다 지키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춘추시대나 조선시대 때 역시 그 시대의 예법 준수의 어려움이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V 특종세상‘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오늘날 어쩌다 시묘살이 하는 장면이 나오는 걸 보았다. 이 풍습 또한 유교 창시자인 공자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공자는 20대 중반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2년 넘게(27개월) 묘소를 떠나지 않고 지켰다는 기록이 있다.

 

공자 역시 당시에는 관직을 맡지 않아 자유로운 삶을 살았고 농경사회여서 가능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듯 고인을 못잊어 묘소를 떠나지 못하는 행위와 불교의 49재 의식들은 고인에 대한 추모의 뜻도 다분히 있겠지만 속죄를 통해 산자의 슬픔을 누그러뜨리고 아픔을 아물게 하기 위한 행위들이다. 

 

공자의 형식보다 파격적인 노자, 장자

 

이런 형식에 얽매인 유교와는 달리, 파격적인 위인이 있다. 바로 노자와 장자다. 수레바퀴를 보면 가운데에 빈 구멍이 나 있다. 바퀴가 굴러가려면 빈 구멍에 끼우는 굴대가 헐렁해도 안 되고 빡빡해도 안 된다.

 

그 빈 공간이야 말로 수레바퀴를 굴러가게 만드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와 장자는 공(空)이요 허(虛)인 그 비어 있는 틈새가 곧 도라고 말하고 있다.

 

자유분방했던 장자는 오늘날 유교를 멀리하듯 세속의 궤도에서 벗어나 길 없는 길을 걸었다. 그는 유가나 묵가가 강조한 인의예지(仁義禮智)나 효제충신(孝悌忠信)이니 하는 인위적인 길을 거부했다.

 

초나라 재상의 자리를 거부한 장자는 가짜 삶보다 살아서 진흙탕을 뒹구는 진짜 삶을 택했다. 행복해지려면 자유가 있어야 하고, 자유를 가지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 매이지 않는 것이 자유요. 자기를 비우는 것이 용기다. 공자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장자의 자유가 필요한 때라고 여겨진다. 장자는 경상초편(庚桑楚篇)에서 ‘바깥일에 얽매인 사람은 마음이 흔들려서 바로 잡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즉, 안팎으로 얽매여 있는 사람은 도를 따라 유유자적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보고 듣는 것을 닫아 버리고 밖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으면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평온하다. 매이지 않은 마음은 귀신 그림자가 춤을 춰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형식에 얽매여 마음을 빼앗긴 상태를 경계한 말이다. 귀신이나 징크스도 마찬가지다. 이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점점 더 두려움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마침내 익사하고 만다.

 

우리는 가끔, ‘조상님께 면목이 없다. 조상님께 잘 못 해드린 것이 마음에 걸려서 꿈속에 나타나 괴롭다. 돌아간 조상이 떠오르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 는 등 두려움의 족쇄를 끊지 못하고 불안 해 하는 경우도 있다.

 

살아생전에 부모님을 학대하여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이상, 돌아가셨다고 해코지 할 옹졸한 조상님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사실은 두려움이 없는 곳에는 귀신도, 징크스도 없다. 어릴 때부터 신앙처럼 받들며 신봉한 유교 습관들이 생활화 되었고 이미 가스라이팅 당한 것이다.

 

장자는 변무편에서 또 파격적인 말을 한다. “~천하에는 본연의 모습이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의(仁義)라는 아교와 옻칠을 하고, 도덕이라는 새끼줄로 옭아맨다는 말인가? 그것은 천하 사람들을 미혹시킬 뿐이다~”

 

"자식은 그 부모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고, 충신은 임금에게 아첨하려고 들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사이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환심을 사려고 노력한다면 되레 어색하다. 임금 신하 사이도 마찬가지여서 뭔가 자꾸 꾸미려 한다면 수상하다. 인위는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일이다".

 

초인, 형식에 대한 탈피!

 

최근에야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규정에 없으니 간편하게 제사를 모셔도 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우리 관혼상제 문화는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에서 주로 물려받았다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성리학, 주자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조선시대 때는 뿌리를 깊숙이 내렸다. 공자의 제자들이 집대성한 논어를 비롯하여, 주자학, 사서삼경, 격몽요결 등 마치 오늘날의 시행령, 규칙처럼 구체적으로 세부 시행지침들이 수록되어 예법을 강화시켰다.

 

이 예법들을 바쁜 현대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옷을 입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들이다. 많은 제사들을 지낸다든가, 제사시간도 자정을 전후로 해서 모신다는 것은 다음날 출근을 힘들게 만드는 일이다. 기독교식 관혼상제가 있듯이 종교가 있든 없든 형식에 얽매인 유교법을 너무 맹신하고 따른다는 것은 일상생활에도 지장을 초래하며 시대정신에도 바람직하지 않을 걸로 여겨진다.

 

죽은 자, 죽음 대한 견해

 

노자나 공자와는 달리 죽음과 관련한 장자의 일화에는 슬픔이 안 보인다. 자료에 따르면, 장자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기는커녕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문상 간 친구 혜자가 장자를 힐난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죽었는데 왜 나라고 슬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삶이란 것은 본래가 없었던 것이고 삶뿐만이 아니라 본래 형체도 기(氣 )도 없었던 것이야.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혼돈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던 것이지. 지금 내 아내는 다 변화라네. 이제 아내는 천지라는 큰 방에 들어가 편안히 안식하게 되었는데, 내 어찌 시끄럽게 울고불고하겠는가?”

 

죽음에 직면하여 기뻐하는 것은 일반 사람이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생사에 초월했던 장자는 눈물을 웃음으로 승화시켜버렸다. 성인으로 추앙 받던 공자는 제자 안회의 죽음을, 예수는 친구 나사로의 주검 앞에서 비통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공자의 진면목과 역설

 

<논어> 선진편(先進篇)을 보면, 공자는 제자들에게 죽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산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는가?” “그러면 죽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제자의 죽음에 슬퍼하는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내세관이 없는 유교에서는 오히려 현실을 중요시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생전에 부모님 한 번 더 보살펴드리는 자세가 더 중요한 것이지, 역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기는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깊은 속 뜻이 들어 있다. 

 

공자는 중국 역사에서 산 채로 무덤에 묻히게 하는 ‘순장’을 가장 먼저 반대했던 인물이다. 공자는 ‘예의 본질은 내면에 있으니 굳이 순장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게 낫고(禮,與其奢也) 상은 잘 치르는 것보다 차라리 슬퍼하는 게 낫다(喪,與其易也)라고 했다. 예법에 구속받지 않고 예의 본질, 즉 내면을 강조한 것이다.

 

공자는 음악 마니아였으며 온화,선량,공손,검소,겸양함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공자의 훌륭한 유교사상을 다 본받기 어렵다. 인생에는 여러 경로가 있듯이, 공자 사상과 가르침을 통해 인생의 단계별 경지와 방향을 이해하고, 자기완성을 해나가면 될 것이다.

 

너무 관혼상제의 과거형식에 얽매인 사람을 보고 ‘조선시대 사람‘이라고 우리가 부르 듯이 형식에 구속되어 현실감각이 무딘 것은 초기 공자의 유교사상과도 배치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제자들이 만든 형식 역시 공자가 그렇게 강조하지 않은 부분일 수도 있다.

 

현대인의 자세

 

워라벨이 불균형을 이루어 번아웃 될 지경에 놓인 현대인들에게는 형식을 탈피해야 하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그렇다고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조상님에 대한 추모의 예를 소홀히 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시대감각에 맞춰 과거의 형식에 벗어나 적절히 조화를 이루면서 가족 간의 화합과 추모개념으로 이어가자는 의미이다.

 

<장자>는 양생주편(養生主篇)에서 노자가 죽었었을 때 제자들이 곡을 하며 슬퍼하자 “노자가 제법 훌륭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하고 꼬집는 대목이 있다. 죽음을 놓고 울고불고하는 것을 보니 노자의 가르침을 평가절하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장자는 노자와 공자와는 달리 죽음은 즐거워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신과 형식에 벗어나야만 현재가 자유로워 질 수 있다. 노자와 장자의 말처럼 말이다. 또 공자는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위인이다. 신의 지배를 받는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조상님에 대한 숭배를 소홀히 하라는 의미는 아니기에 거국적인 유교의 틀이 아니라 각자의 자손된 입장에서 예를 다 하면 될 것이다.  

 

필자 어릴 때는 부친께서 풍수의 말을 듣고, 자손에게 좋지 않다는 이유로 조상묘 이장을 몇번 하곤 했다. 또한 ‘돌아가신 조상이 꿈에 나와 신경이 쓰여 점집을 찾았더니, '굿을 안 하면 가족 중에 누군가 화를 당할 수 있다!’는 등 주변에서 가끔 듣는 이야기들이다.  이는 산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부추기는 말들과 행위들이다. 이렇듯 불안 심리들이 제사와 연계되어 정성껏 모셔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이어져 명절이 되면 힘들어하는 가정들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직 코로나도 유행인데, 이제 큰집에 모두 모이지 말고, 각자 집안에서 알아서 지내도록 해라.” 이렇게 했더니 모두가 즐거워한다는 말이 주변에서 들린다. “평생 우리 세대에서는 제사를 지냈는데 이제 자식들에게 넘겨주기도 부담이 될 것 같아 절에 맡겼다“그래서 제사를 몇 년 전부터 안 지낸다고 가까운 지인의 말도 들었다.

 

최근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가 조사기관 리서치뷰에 의뢰해 만 20세 이상 성인남녀 1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제례 문화 관련 국민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5.9%가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제사를 지낼 계획이 있다는 답변은 44.1%를 기록했다.

 

응답자들은 ‘간소화하거나 가족 모임 같은 형태로 대체하는 것이 좋다’(41.2%)는 것을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는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시대의 변화로 더는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답변은 27.8%였고, ‘종교적 이유나 신념’을 이유로 든 응답자는 13.7%였다.

 

제사를 계속하려는 이들은 ‘조상을 기리기 위해서’(42.4%), ‘가족들과의 교류를 위해서’(23.4%), ‘부모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15.9%), ‘전통 유지’(10.0%) 등의 이유를 들었다.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가장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 응답자들은 제수 음식의 간소화(25.0%)를 꼽았다. 이어 형식의 간소화(19.9%), 남녀 공동 참여(17.7%),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제사(17.2%), 제사 시간 변경(5.3%) 등 순으로 답했다.

 

이 모든 행위들이 결정권자인 그 집안의 장손 또는 맏이가 형식에 대한 통큰 결단이 있어야 가능하다. 현대의 가족 구성원들은 사회 각 분야에 다양한 역할을 맡고 마치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기계적인 생활을 한다. 지키기 힘든 옛 풍습만 고집하며 꼰대노릇을 하는 우두머리가 아니고 과거와 현대를 아우러는 안목과 지혜가 있어야만 집안의 풍습과 분위기가 바뀐다는 이야기다.

 

 

산자와 죽은 자의 관점은?

 

‘우리 인간은 잠시 잠깐 동안의 삶을 누리도록 태어나 삶이라는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숙소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금방이라도 다음에 찾아오는 사람에게 방을 비워줘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좀 더 오래 살 수도 있었을 텐데”하는 것은, 그의 생은 중단 된 것이 아니고, 우연한 불운이 그의 나이 사이에 끼어든 것도 아닙니다. 각자에게 약속된 것은 지불됩니다. 운명은 각자의 길을 걸어 아무것도 보태지 않고, 동시에 또 약속한 것으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아가지 않습니다." 세네카의 인생론 이야기 일부이다. 

 

“신이 죽기 위해서는 초인은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불안과 나약함을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니체의 말이다. 죽음관 조차 바꾸기 위해서는 인간은 스스로 바뀌어야만 한다. 내가 생각하는 죽음관이 바뀌어야 죽음의 의미도 바뀌기 때문이다. 지나친 형식과 자기만의 잘못된 신념으로 일상생활에서까지 힘들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인의예지신,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가지 도리 등이 이미 유교를 통해서 우리 실생활에 깊숙이 파고 들어 있다.  많이 미흡한 글이지만 잠시나마 초인, 죽음, 신과 도인의 경지까지 넘나들어 봤다. 현대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유교의 본질과 신의 영역을 상호 이해함으로써 명절 증후군도 극복하고, 실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중산>

 

* 참고 문헌 : 세네카의 인생론, <논어> 선진편(先進篇), 논어<미디어 숲>, <장자> 양생주편(養生主篇), 장자 경상초편(庚桑楚篇) , 유교의 변천사, 한국 개신교 역사 <백과 사전> , 니체의 전집 , 보이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홍익출판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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