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충분한 삶!

[중산] 2024. 7. 18. 19:06

인간들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벼워지고 한 마리의 새가 되고자 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만 한다.

 

인간은 건전하고 건강한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기 자신을 견뎌야 하는 상황에서 방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한 방황은 ‘이웃 사랑’이라고 명명된다. 지금까지 이 말을 이용해 최고의 거짓말과 위선이 행해졌고, 특히 온 세상을 괴롭혔던 자들이 이를 가장 잘 이용했다.

 

그리고 진실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오늘 내일을 위한 계율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모든 기술 중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가장 기이하며 가장 훌륭하면서도 가장 인내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을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을 규명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정신이 영혼에 대해 가끔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내게 더 불쾌한 것은 아첨꾼이다. 나는 내가 찾아 낸 가장 불쾌한 인간 짐승을 기생충이라고 명명했다. 그 짐승은 사랑은 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사랑은 받으며 살고 싶어 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기장군 칠암 앞바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위대함을 꿈꾸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모든 다양한 삶의 목표는 저마다 다른 가치가 있을 테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열망, 즉 사회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앉아 있는 최고 엘리트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공유하는 것 같다.

 

내가 지적하려는 핵심은 우리의 욕망을 유도하는 것들이 잘못됐다는 점이다. 뭔가 잘하려는 욕심에도 잘못이 없고, 성공을 향한 열망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가 강력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대상은 우리 각자가 가진 재능과 역량을 늘 모자란다고 여기게 만들어 끊임없이 경쟁하고 최고를 지향하도록 유도하는 오늘날 사회 구조다.

 

이 순간에도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치료받지도 못하고 있다. 전체 부가 399조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이 세계에서 약 34억 명은 여전히 하루 5.5달러 미만의 돈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연간 3,450만 명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고, 900만 명은 굶어 죽는다. 한편 기계화 자동화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생산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바쁘고 쉴 틈이 없다.

 

유사 이래 이처럼 많은 인구가 지구에 살았던 시절이 없는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혼자다. 가면 갈수록 불안과 우울만 늘어갈 뿐 행복한 사람들은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매년 우리는 지구가 연간 재생할 수 있는 양의 거의 두 배를 에너지로 사용한다. 이들은 너무 적게 갖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는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이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미래가 불안하다 느끼고, 현재 상황에 우울해하며, 동료들에게서 소외감을 느낀다. 이 감정은 경쟁심을 유발해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위대해지는 것만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기게 만든다.

 

나는 생각하면 할수록 무서운 이 역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세계관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충분함’이다. 위대함이 아니라 충분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충분한 삶’, ‘충분한 세상’이라 부르고 싶다.

 

내 기준으로는 적당히 여유롭고 적당히 윤택한,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충분함이다. 세상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우리 삶은 충분할 수 없다. 그런데 아무리 조화로운 사회라도 여전히 실수, 사고, 분쟁, 배신이 일어나고 자연재해를 겪는다.

 

내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충분함’은 보편적인 충분함이다. 모두가 충분한 삶,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에 도달하려면 단순히 많은 이들의 더 좋은 마음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수와 실패가 생길 것이다.

 

충분한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윤곽을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을 했던 경험하지 못했던 다양한 위기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앞을 가로막을 예정이다.

 

위기를 겪을 때마다 우리는 개인의 나약함을 목격했고 내가 아닌 우리의 힘만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이 깨달음을 미래로까지 이어가야 한다.

 

서로가 좋게 잘 대하고 서로에게 충분하면 된다. 서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고 우리 자신만 이기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것을 탐하지 않으면 된다. 인류가 번영하는데 이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작가이자 민권 운동가 제임스 볼드윈의 표현처럼 충분함이 두 가지 상반된 요구를 충족해야 하는 개념이라고 이해한다. 충분함은 “어떤 유감이나 원한 없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임과 동시에 “결코 불의를 일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평등함”이다.

 

충분한 삶은 실패를 기꺼이 인정하고, 그런데도 충분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실패를 딛고 일어나 모두의 평등과 존엄을 요구한다.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임으로써 불만과 결핍으로 인한 자기파괴를 방지하되 자신과 타인을 위한 더 나은 삶, 모두에게 의미와 접근과 활기가 충만한 세상을 새롭게 상상하라는 요청이다.

 

충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위대해질 필요는 없다. 삶이 가치 있으려면 뭔가를 능숙하고 탁월해야 한다고 몰아붙이는 사회는 우리가 충분히 좋은 삶을 누릴 가능성을 무너뜨린다.

 

충분한 개인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수용하고 겸손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목소리를 낼 권리, 평등하고 존엄할 권리, 우리 각자가 모두 세상에 이바지하고 있음을 인정받을 권리를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위대함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자신, 우리 관계, 우리 세계, 우리 지구를 훼손한다. 이 파괴적인 이데올로기를 넘어선다고 해서 충분함이 위대함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함의 종착지는 위대함도 완벽함도 아니다. 그래서 충분함에는 끝이 없다.

 

충분함은 늘 여지가 있고 늘 차오르는 상태다. 채우기만 하면 위대하고 완벽할 것 같은 그 여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상태다. 충분한 삶을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을 부드럽게 포옹하고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면서 모두의 충분함을 헤아린다.

 

내가 철학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철학이야말로 충분한 삶의 개념을 뒷받침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철학에도 수많은 분야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철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가장 근원적인 관련이 있는 학문이다.

 

모두가 충분하려면 개인이 충분해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달라져야 한다는 뜻인데, 더 높고 원대한 목표를 위해 우리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개인의 이익 경쟁을 동력 삼아 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사회 체제에 반기를 들라는 이야기다.

 

불교 철학에서 우리는 사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고통 줄일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의 본질적 상호 의존성을 포용하는 것임을 배울 수 있다.

 

아프리카-아메리카 철학을 통해 우리는 위대함을 넘어서는 일이야말로 삶의 투쟁이며, 투쟁의 끝은 우리는 새로운 위계 구조가 아닌 모두의 적절함과 충분함 그리고 불완전함의 보편적 확립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모두의 충분함을 운운하는 발상이 오히려 공허할 뿐이라고 못마땅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행복이 심리적 요소임을 전제할 때 행복 심리에 관한 수많은 연구는 사익 추구가 개인의 삶에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우리는 성공하고 부유해지면 행복해지리라고 믿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한다. 하지만 대개의 연구는 성취가 그저 깨진 컵에서 새는 물임을 보여준다. 우리 욕망은 본래 한계가 없어서 더 많이 취할수록 더 많은 것을 바란다.

 

끝없는 곡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또 다른 성취를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꼭 우리의 본성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에 반해 공동의 성취는 훨씬 오래간다. 개인의 위대함을 종용하는 사회 체계 탓이 더 크다.

 

플라톤과 오비디우스의 이야기로 돌아 가보자. 확실히 ‘충분한 관계’라고 하면 서로가 하나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열망과 관련이 있는 듯 보인다.

 

나도 아내와 뜨겁게 포옹할 때 영화 <제리 맥과이어>의 유명한 대사 “당신은 나를 완성해” 표현대로 나를 완성해주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절대로 놓고 싶지 않고, 어떤 때는 정말이지 한 몸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우리 합체할까?”하고 귀속 말로 속삭이기도 한다.

 

그렇게 잠시나마 은유적으로 한 몸이 되기도 하지만, 부인하지 못할 진실은 우리 두 사람 가운데 누구도 진짜 합체는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나나 아내나 자신만의 개성, 취향, 혼자 있는 시간, 서로 다른 취미, 친구, 추구하는 가치 등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낭만적인 이야기란 애초에 역사가 아닌 신화나 전설 차원에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신화나 전설의 이야기는 너무 매끄럽게 진행된다. 불확실함은 없다~크고 작은 혼란을 초래할 만한 요소는 생략되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고 문헌학자 아우어바흐가 말했다.

 

우리는 관계를 신화가 아닌 역사로 들여다봐야 한다. 말 같지도 않은 영원한 하나 됨이 아닌 오해와 실수, 이해와 개선으로 가득 채우는 관계를 탐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충분한 관계’의 본질적 의미다.

 

우리의 사랑은 낭만과 현실이 약간씩은 필요하다. 약간의 이상적인 비장함이나 황홀함도 필요하고, 약간의 일상적인 관심과 배려도 필요하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반려자에게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반려자 또한 우리 자신에게 충분한 존재가 돼야 하며, 서로의 충분함을 온전히 수용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충분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 서로의 충분함을 온전히 수용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계속 노력해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그 노력의 가치를 가치 있게 하면서, 이따금 정말로 경이로운 순간을 서로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모든 삶은 충분해야 한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아브람 알버트 지음>

*작가이자 교육자.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으며,“21세기의 인간조건”, ”민주주의 미래“, ”사회적-경제적 변혁“이라는 세 가지 의제를 중심으로 학 제 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정책을 제안하는 더뉴인스티튜트의 일원 이다. 유대계 미국인으로 태어나 다인종 문화에 관심을 가졌고, 인종주의에 극렬히 저항하면서 불교 철학, 노장 철학, 이슬람, 아프리카 철학 등 다양한 사상을 학계와 대중에 전파하고자 부단헤 애써왔다. <근대적 자아의 세계적 기원, 몽테뉴에서 스즈키까지>,<부분적 깨달음 :근대문학과 불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완벽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잘 사는 법>등의 저술 책이 있다.

 

 

간절곶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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