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사람
세상에 나가면
일곱 번 태어나라 -
불난 집에서
눈보라 치는 병원에서
광란의 정신병원에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밀밭에서
종이 울리는 수도원에서
비명을 지르는 돼지우리 속에서
여섯 아이가 울었어도 충분하지 않아 -
일곱 번째 아이라야 해!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할 때에는
적에게 일곱 사람을 보여라 -
일요일 하루는 쉬는 사람
월요일에 일하기 시작하는 사람
대가 없이 가르치는 사람
물에 빠져 수영을 배우는 사람
숲을 이룰 씨앗이 되는 사람
야만의 선조들을 보호해주는 사람
하지만 그들의 재주로는 충분하지 않아 -
나 자신이 일곱 번째라야 해!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면
일곱 남자를 보내라 -
가슴을 담아 말하는 남자
자신을 돌볼 줄 아는 남자
꿈꾸는 사람임을 자부하는 남자
스커트로 그녀를 느낄 수 있는 남자
호크와 단추를 아는 남자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남자
그들이 날벌레처럼 그녀의 주위를 맴돌게 하라 -
그리고 너 자신이 일곱 번째라야 해!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시인이 되어라
시인은 일곱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
대리석 마을을 짓는 사람
꿈을 타고난 사람
하늘의 지도를 그릴 줄 아는 사람
언어의 선택을 받은 사람
자신의 영혼을 만들어 가는 사람
쥐를 산 채로 해부할 줄 아는 사람 -
너 자신이 일곱 번째라야 해!
이 모든 것을 이루고 죽으면
일곱 사람이 묻힐 거야 -
품에 안겨 입에 젖을 문 사람
젊은 여자의 단단한 가슴을 쥔 사람
빈 접시를 내던지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이 이기도록 도와주는 사람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는 사람
밤새도록 달을 바라보는 사람, 그러면
세상이 너의 비석이 될 거야 -
너 자신이 그 일곱 번째 사람이라면
- 아틸라 요제프
아틸라 요제프의<일곱 번째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을 담고 있는 시다. 태어남, 생존, 사랑, 시 그리고 죽음이 있다. 그런데 이 지난한 삶의 주인공은 한 사람이 아니라 일곱 명의 사람이다.
아틸라 요제프는 그 사람들을 순서대로 호명한다. 그런데 일곱 번째는 비어 있다. 그 자리를 누가 채울 것인가? 그 일곱 번째 사람은 바로 당신이어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의 셈법은 그러하다. 언제나 모자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빈 부분을 채우는 것은 또 다른 부분이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 너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인간, 가능성으로 충만한 삶의 주인공.
그러므로 일곱 번째 사람은 셈을 종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일곱 번째 사람은 바로 내일의 첫 번째 사람이다. - 심보선 시인 해설.
<‘세상에 나가면 일곱 번 태어나라‘에서 발췌, 아틸라 요제프지음, 공진호님 옮김, 심보선교수 해설, 아티초크출판>
* 아틸라 요제프(1905-1937) : 20세기 헝가리의 위대한 시인. 마르크스 사상에 끌려 당시에는 불법이었던 공산당에 입당했고, 1936년 분예비평지<셉소>의 공동 창립자가 되었다.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노동자 계급의 삶을 그린 그의 시는 비애감과 부조리가 스며 잇는리얼리즘의 문체로, 현대인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고 인생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조화에 대한 신념을 드러낸다. 1937년12.3 발라톤사르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도덕 - 이성일까? 감정일까?
에리카는 이 만남이 분명히 사업적인 것이었음에도 침실 문을 미리 열어 두었다. 신발을 벗고 스타킹만 신은 채 카펫 위를 맨발로 다녔다. 사실 그 남자에게 매료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손가락을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중에 결국 침실로 들어갔다. 에리카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은 그 시점에 그녀가 느꼈던 결혼 생활의 무미건조함이나 심오한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다.
<포브스>표지에 얼굴이 실린 남자와 섹스를 한번 해본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기억될 어떤 경험을 한다는 기대와 흥분 때문이었다. 그게 주된 이유였다.
내면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수치심
몇 년이 지난 뒤, <포브스>표지에서 그의 얼굴을 보고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그날 밤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섹스 자체는 별게 아니었다. 아무런 반향도 없고 여운도 없는 몸짓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지 한 시간쯤 뒤, 에리카는 낯선 감각을 느꼈다. 자기의 내면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기업계 인사들을 만나서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요통처럼 서서히 다가왔다.
실제로 그녀는 고통 때문에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웅크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그것은 극도의 자기혐오, 수치심, 불쾌감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온갖 고약한 느낌을 온갖 고약한 방식으로 모두 맛보았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지?
에리카의 이런 행위를 전통적으로 해석하자면, 그녀가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욕망이 사로잡혔다고 말할 수 있다. 열정에 사로잡혀 그리고 자기 단점에 발목이 잡혀서 남편과 결혼하면서 서약했던 맹세를 저버렸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모범이 될 만하게 행동할 때 이성은 열정을 가라앉히고 의지를 통제한다. 이성은 그저 ‘아니오’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으로 행동할 때, 우리는 이런 이성을 적용하지 못하거나 열정이 이성을 압도해 버린다.
에리카는 마치 자기 안에 서로 다른 두 명의 에리카가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한 명은 유혹의 그 전체 과정을 짜릿한 전율 속에서 목격하고 즐긴 에리카이고, 또 한 명은 그 과정을 치욕스럽게 바라본 에리카였다.
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인간의 행동에서 즉각적인 도덕적 직관이 개재되는 사례를 무수하게 제시한다. 예를 들어 집에서 기르던 애완견이 죽은 뒤에 이 개의 고기를 먹는다고 상상해 보라.
또 남매가 둘이서 여행을 가서 어느 날 밤에 금지된 섹스를 한다고 상상해 보라. 이 둘은 섹스를 즐기긴 하겠지만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것이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왜 그토록 역겹게 느껴졌는지 대개 말하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무의식이 그렇게 시켰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물론 연구를 했다. 도덕적인 이론과 고상한 행동 사이에 상대적으로 상관성이 거의 없음을 밝혀냈다.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심리학자인 마이클 가자니가 교수는 저서 <왜 인간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도덕적인 추론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순행적인 도덕적 행동 사이에서 어떤 연관성을 발견하기란 무척 힘들었다. 사실 거의 모든 연구에서 이런 연관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도덕적 추론이 보다 도덕적인 행동을 낳는다고 하면 덜 정서적인 사람이 보다 도덕적일 거라고 기대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보자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누군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거나 살인 혹은 강간을 묘사한 글을 읽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본능적으로 어떤 정서적 반응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손바닥에 땀이 나서 축축해지고 혈압이 올라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무런 정서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결코 고도로 이성적인 도덕주의자가 아니다. 사이코패스일 뿐이다. 사이코패스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정서적 반응을 하지 않는다.
상습적으로 아내를 구타하는 남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이런 사람들은 공격적으로 변할수록 혈압이 오히려 떨어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도덕은 내면의 충돌과 같은가?
지배하는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가지려는 충동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관찰에서 출발한다. 이런 충돌들이 인간의 인식을 왜곡한다.
미스터 K도 에리카의 결혼 생활에 위협을 가하려고 한 게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저 에리카를 자기 삶의 갈증을 채우는 하나의 객체로 바라봤을 뿐이다. 이와 동일한 맥락으로 살인자들은 자기들과 똑 같이 온전하게 인간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죽이지 않는다.
살인자의 무의식은 우선 범행 대상자에 대한 인식을 바꿔버린다. 그 대상은 자기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왜곡하는 것이다. 프랑스 언론가 하츠펠트는 르완다 학살에 참가한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부족 적 광기에 사로잡혀있었다. 자기와 인종이 다른 이웃 사람들을 완전히 사악한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런 광기에 사로잡혀서 이웃에 살던 투치족 남자를 살해한 후투족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아주 황급하게요. 내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심지어 그 사람은 내 이웃이었고, 사실 꽤 친하게 지낸 사이였는데도요. 사실 내가 이웃에 살던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생각은 나중에 들더군요. (…) ”
침팬지는 서로 위로해주고, 다친 동료가 있으면 간호해 주며 또 함께 나누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 역시 유대와 헌신을 지지하는 일련의 감정들이 있다. 사회적인 규범을 깼을 때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힌다.
누가 자신의 존엄성을 무시하면 곧바로 분노한다.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감정 이입은 영국의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에서 잘 포착되어 있다.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팔이나 다리를 노리고 일격이 가해질 때,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자기 필이나 다리를 움찔한다. 그 일격이 목표물에 명중할 때, 사람들은 실제로 그 타격을 입은 사람처럼 타격을 느끼고 어느 정도 상처를 입는다.(…)자연은 인간에게, 형제들이 좋아할 때 즐거움을 느끼고 불편할 때 고통을 느끼도록 가르쳤다.”
인간의 경우 이런 사회적인 감정들은 매우 이른 나이에 이미 도덕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부모나 학교가 이런 도덕적인 이해를 강화하는 것은 사실이다.
산이 있는 풍경을 바라본다고 치자 그 풍경이 아름다운지 아닌지 굳이 판단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판단들도 어떤 점에서는 이것과 비슷하다. 도덕적 판단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직관적인 평가다.
깊고 강한 이런 내면적 충돌들은 의식적 인식을 장난감처럼 취급해 마음대로 가지고 놀며 왜곡한다. 이 충동들은 범죄를 저지르는 동안 인식을 왜곡하며, 범죄를 저지르고 난 다음에는 핑계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의 잔인함 혹은 게으름 앞에 희생된 사람들은 그렇게 죽어도 싸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애초에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욕망은 의식에 앞서서, 사람이 생각하는 내용과 틀을 미리 결정한다.
네덜란드 막스 플랑크 언어심리학 연구소의 학자들은, 심지어 안락사와 같은 복잡한 주제를 평가하는 감정들조차도 어떤 명제를 읽은 뒤 0.20초에서 0.25초 사이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혐오감, 부끄러움, 당혹감에 대해서는 굳이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떤 상황에서 얼굴을 붉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할 필요가 없이 그 반응이 저절로 나타난다.
학자들 중 하이트와 그레이엄 그리고 노세크는 다섯 가지 도덕관념을 정의 했다. ‘공정성-호혜성’관념, ‘해-돌봄’관념, ‘권위-존경’관념, ‘순수함-혐오감’관념과 마지막으로 가장 문제적인 ‘집단-충성’관념이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다양한 집단으로 분리한다. 이들은 자기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내면적인 충성심을 느낀다. 집단이 공유하는 공통성이 아무리 임의적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또한 어떤 집단 구성원은 그 집단의 충성심에 반하는 사람에게는 내면에 우러나오는 혐오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자기집단에 속한 사람과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을 0.17초 만에 구별할 수 있다. 이런 범주적 차이점들이 뇌에서 각기 다른 활성화의 모형들을 촉발한다.
직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무의식의 공간은 온갖 충동이 패권을 다투는 경기장이다. 이기적인 직관들이 있고,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직관들이 있다. 사회적인 충동들이 비사회적인 충동들과 경쟁을 벌인다. 또한 사회적인 충동들끼리도 서로 갈등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보다 더 도덕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상주의적 관점은 철학적으로 사색하라고 충고하고, 직관주의적 관점은 상호작용을 하라고 충고한다. 혼자 있을 경우에 보다 더 도덕적이 되기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이야기를 말할 힘이 있고 인간성을 보다 넓게 확장하는 이야기들을 말할 힘도 있다. 조너선 하이트가 말했듯이 무의식적인 감정들은 한층 우월하지만 독재를 행사하지 않는다.
이성은 혼자서 춤을 출 수 없지만, 그래도 꾸준하고 미묘한 영향력을 발휘해서 무의식의 옆구리를 슬쩍 찌를 수는 있다. 우리는 도덕적인 반응들을 발생시킬 순 없지만, 충동을 억누를 순 있다. 심지어 어떤 충돌들은 완전히 뒤집을 수도 있다.
직관주의적 관점은 사람이 천성적으로 선한 일을 하려는 충동을 타고났다는 낙관적인 믿음에서 출발한다. 이미 에리카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남자와 섹스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때가 도덕적인 타락의 실제 순간은 아니었다. 그때는 심지어 어떤 결정을 내린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오랜 시간에 걸친 무의식적인 변화의 결정체였을 뿐이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기가 간직했던 예전의 가치들을 의식적으로 배척하지 않았다. 에리카는 생활을 바꾸고, 종교에 의지하고, 어떤 공동체나 대의명분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에리카는 늘 자기를 부지런하게 살아 자수성가한 여자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욕망 때문에 탕진하는 어떤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덕분에 에리카는 성숙해질 수 있었다.
성숙함이란 머릿속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각자 다른 성격과 기준을 지닌 여러 개의 자아를 될 수 있으면 많이 이해한다는 뜻이다. 성숙한 사람은 급류가 흐르는 개천을 건너가면서 “예, 난 예전에 이 개천을 여러 차례 건넜답니다”라고 말하는 경험자와 같다.
<‘쇼설애니멀-제18장,도덕’ P621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이경식님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출판> * 데이비드 브룩스 :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로 잘 알려져 있다. <보보스>,<인간의 품격>,<두번째 산>,<사람을 안다는 것>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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