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연애에서 배신이란?

[중산] 2024. 7. 27. 07:51

 

연애에서 배신이란?

연애에서 최악의 죄이자 가장 중대한 배신은

다른 사람을 상상하고 꿈꾸는 것이다!

 

42세에 쓴 소설 <흐트러진 침대>에서, 여주인공 베아트리체는 쾌락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아름다운 여배우입니다. 그녀의 애인은 연하의 아름다운 청년 에드워드는 극작가입니다.

 

어느 날 에드워드가 일 때문에 멀리 떠나 있는 동안 옛 애인 니콜라와 잠자리를 함께합니다. 베아트리체가 니콜라를 잠자리 상대로 고른 이유는 ‘에드워드를 향한 일종의 정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니콜라는 입이 무거워서 소문 날 염려가 없고, 처음 하는 상대도 아니었으며, 가슴이 떨리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에드워드 말고 다른 남자를 꿈꾸는 일은 없으므로 베아트리체에게는 배신도 뭣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강에게 배신이란 감정의 배반입니다. 육체의 접촉만 있고 감정이 수반되지 않는 경우는 배신이 아니며, 육체의 접촉이 없더라도 감정이 있으면 배신이었습니다.

 

지나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46세에 쓴 소설 <화장한 여자>에서 남녀가 이런 말을 주고 받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말합니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려달라고 했더니 애인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어요. 사랑한다면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걸 수도 있잖아요.” “똑 같은 말입니다.”

 

☞ 사랑이란 이름으로, 어디까지 자기의 요구를 주장할 것인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어디까지 상대의 요구를 들어줄 것인가. 연애의 보편적 테마입니다.

 

지나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이 아무리 ‘사랑하니까’라고 생각해도 상대가 불쾌하게 생각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강의 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눈감아 주는 것,

쓸데없는 참견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강은 ‘자기 가치관으로 상대를 대하는 일’에 의구심을 품었던 사람입니다. 나는 옳지 않다고 믿더라도 그것은 나의 가치관일 뿐 상대에게는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두자.

 

사강 자신이 상대를 대하듯 상대도 그렇게 해주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눈감아 주는 것, 쓸데없는 참견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친구 부모 자식 관계는 물론 인간과 인간이 농밀하게 이어지는 연애 관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이니까요.  

 

- <'사강의 말에서'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야마구치 마치코 지음,정수윤님 옮김, 해냄출판>

* 프랑수아즈 사강 : 1935년 프랑스 남서부 카자르크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의 3남매 중 막내였다. 10대 때 성공을 손에 넣고 인기 작가로 주목을 받던 그녀는 술, 도박, 병, 마약 문제로 구설과 스캔들을 몰고 다녔다.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이후 아들 하나를 얻고, 그 후로는 수많은 애인과 함께했다. 노년에 마약 소지로 유죄를 받고, 건강을 해쳤으며,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2004년, 69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남.

 

돈에 집착하지 않고,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줘버리는 사강. 그녀는 인기 작가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사회 현상이 되었다. 평생 써 내려간 소설의 테마는 ‘고독’과 ‘사랑’이었다. 굉장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만난 적 없는 독자들까지도 그녀의 강한 매력에 이끌렸다. 그녀를 말할 때 ‘지성’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부산 기장 죽성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은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 빌 커닝햄

 

독신주의 삶

빌 커닝햄! 2016년 사망 직전까지 뉴욕타임스의 스타일 섹션 <온 더 스트리트>를 통해 패션 사진 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사진을 통해 도시의 패션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는 카네기 홀 꼭대기의 주방도 침실도 없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평생을 혼자 살았다.

 

그는 보스턴의 전통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예의 바르고 점잖게 자랐다. 하지만 하버드 대학을 중퇴하고 화려하고 기괴한 여성 모자를 만들면서 가족과 멀어지게 되었다.

 

1960년 모자 산업이 사양길을 걷자 패션 관련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어서 패션 사진을 찍는 수순을 밟았다. 그는 명성이 아닌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는 나의 롤 모델은 아니었지만 분명 현자였다.

 

나는 맛있는 음식과 술을 좋아하지만 커닝햄은 에그 맥머핀에 만족했다. 나는 식탁에서의 즐거움을 좋아하지만 사교 만찬에 참석한 그는 카메라 뒤에서 일을 하곤 했다.

 

그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80번째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한 번에 불고는 양팔을 펄럭이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아이처럼 활기차다. 스스로 커밍아웃하게 되면 직업을 잃을 수도 있는 하이패션 세상에서 게이인 그는 현명하게 행동했다.

 

그가 찍은 사진에서 명백히 드러나듯 그의 재능은 바로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었다. “나는 눈으로 먹는다.” 그가 말했다. 또한 셔트를 누를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가득하다고 했다.

 

자연스럽고 전염성 강하며 모두를 아우르는 그의 환한 미소를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돈을 받지 않으면 그들은 당신에게 명령할 수 없어요. 그것이 모든 것의 열쇠요. 돈을 받지 않는 것.”

 

그는 편집자들이 돈을 주려 하자 수표를 찢으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도 약간의 돈을 받았지만, 임대차 규제가 적용되어 수십 년간 집세를 올릴 수 없는 방에 살아온 사람들에게 당시 뉴욕 물가는 그나마 싼 편이었다.

 

커닝햄은 평생 독신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교회를 가는 한 가지 이유는 회개를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성적 욕망이라곤 전혀 없는 쾌활한 성격이었기에 처음 보는 사람들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순간순간 의도적으로 말장난을 하며 즐겁게 사진에 집중하는 전문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에게 가장 먼저 붙는 타이틀은 외톨이이지만 그는 파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아웃사이더이자 독신주의자, 별종, 속세에 사는 수도사였으나 외톨이는 아니었다.

 

윌트 휘트먼이 그랬듯 커닝햄 역시 물욕에 예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로맨틱한 사랑을 해 본 적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커닝햄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아, 게이에 대해 알고 싶으신 거죠?” “그런 생각을 해 본 적 없습니다. 늘 옷에 대한 생각뿐이었어요.” 예술은 슬로건과 교리를 내세워 진실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알아볼 뿐만 아니라 진실을 인지하고 진실 속에 살아가라고 가르친다.

 

커닝햄은 보다 웅장하고 위대하며 보다 관대한 아름다움을 위해 자신의 특별한 사랑을 제물로 바쳤다. 커닝햄에게 뉴욕의 거리는 세속적 형태의 신성한 무대였고, 그는 한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주기로 선택한 대표적인 독신자였다.

 

남자든 여자든 나의 수도사 친구들은 독신주의에 대해 특정 개인이 아닌 전체와 결합함으로써 자아를 실현하려는 의식적 결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자신을 한 사람에게 한정시키는 대신 모두에게 개방해 모두를 통해 자신을 신에게 드러내 보이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참으로 너그럽고 멋진 주장으로 들린다.

 

하지만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게이 전용 술집에서 놀던 그들도 그들의 난잡한 밤에 대해 거의 같은 용어를 사용해 묘사했다. 

 

금욕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욕망을 정의하는 데 정반대 입장에 있다. 하지만 각각 가장 큰 욕망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다르다기보다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핵심은 고독은 늘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고독은 고통이며 그 고통을 통해 사랑의 장엄함과 가능성에 끊임없이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으로 본다.

 

이는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로스 다우닷이 말한 ‘깊은 가족적 이기주의’라기보다는 휘트먼이 말하는 동지애, 즉 모두들, 특히 아웃라이어들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는 “천재성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자신을 놓아주는 것, 두 가지 명백히 모순된 생각을 애쓰지 않고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자아는 없다!” 스즈키 순류*가 소리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정체성이나 책임감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끊임없이 내주다 보면 지혜가 자아를 찾아낼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 역시 이 진리에 대해 가르쳤다.

 

이는 커다란 용기의 행동이며 개방성과 취약성, 용서를 수반하고 언제나 주의를 요하는 행동이다. 불교 용어 ‘마인드풀니스(mindfullness)'로 정리할 수 있는 이 자질은 언제나 부족하다.

 

더군다나 싼 가격과 편리함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 버린 IT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어폰을 빼고 선글라스를 벗고서도 보고 듣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저 수평선 위로 숲이 우거진 산, 내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을 동경하고 염원한다. 산이 내게 오라고 손짓한다. 정상에 오르게 된다면 우리 모두가 태양처럼 빛나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고독의 창조적 기쁨’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팬탄 존슨지음, 김은영님 옮김, 카멜북스출판> * 팬턴 존슨 : 창의적인 논픽션과 소설을 쓰는 작가. 미 정부의 문학상인 람다 문학상을 수상했다. 일곱 번째 저서인 <고독의 창조적 기쁨>은 뉴욕타임스 북리뷰 ‘편집자의 선택’도서로 선정되었다.

* 스즈키 순류 (1904~1971)는 일본의 정통 선불교 지도자로 195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선사상을 전파했다.

 

 

울릉도 봉래폭포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가 나를 찾아왔어!  (1) 2024.08.03
이상적인 결혼이란?  (4) 2024.07.30
인생에서 의미란?  (12) 2024.07.24
일곱 번째 사람!  (18) 2024.07.21
충분한 삶!  (28) 2024.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