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 무렵이었어 … 시가
나를 찾아왔어. 난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나는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침묵도 아니었어.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지.
밤의 가지들에서
느닷없이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결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혼자 돌아오는 말야
얼굴도 없이 저만치 서있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어.
-파블로 네루다, <시>부분에서.
파블로 네루다의 <시>라는 작품입니다. 도대체 시가 뭔데, 목소리도, 말도, 침묵도 아니고, 얼굴조차 없는 그것이 어느 날 스스로 사람을 찾아오나요?
그래서 글을 쓰게 하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며, 마침내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나요?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나요? 아마 아닐 겁니다.
그것은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시인으로 불릴 만큼 남다른 상상력을 가졌던 시인이 남긴 특별한 시적 표현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정작 시인들은 우리와 전혀 생각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시인들은 정말로 시가 자신을 찾아온다고 느끼나 봐요! 어째서냐고요?
<시가 내게로 왔다>라는 시 모음집을 출간한 김용택(1948~)시인의 고백만 보아도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에요.
그래, 그랬어. 스무 살 무렵이었지.
나는 날마다 저문 들길에 서서 무엇인가를 기다렸어.
강물이 흐르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었지.
외로웠다니까. 그러던 어느 날 시가 내게로 왔어.
저 깊은 산속에서 누가 날 불렀다니까. 오! 환한 목소리,
내 발등을 밝혀주던 그 환한 목소리, 詩였어. - 김용택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여름의 오후
가위 소리도 짤깍짤깍
잔디를 다듬다
일손을 멈추네
뒷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는
하품하는 누이 모습
라디오는 소리가 꿈틀꿈틀
창가의 벌은 윙윙
바람은 산들산들
빙빙 춤추며
폭신한 잔디를 돌아다니네
따뜻한 웅덩이에
고인 시간
허무를 놀다 멈춘 듯하여도
여전히 흘러감을 아는 것은
꽃잎이 지기 때문
나는 잠들었는지
글을 쓰고 있는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네
아내가 흰 천으로
식탁을 덮으니
하늘마저 흰 아마포
눈부신 흰빛으로 넘치고
의자 위 유리그릇은
산딸기의 빛으로 반짝이네
나는 행복하다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내 곁에서 바느질하며
멀어져 가는 화물선의 경적 소리에
나와 함께 귀를 기울이니
- 아틸라 요제프
<‘세상에 나가면 일곱 번 태어나라‘에서 발췌, 공진호님 옮김, 심보선교수 해설, 아티초크출판>
여름비 밤새 내리다 그친 새벽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 찾아온다
조용조용 하얀 맨발이
풀잎 이슬을 밟고 오는 소리
누구신가 문 열고 나가보니
여름비에 몸 씻은 마당으로
푸른 화엄들 고요히 뜨겁고
물항아리 위로 수련이 피었다
하얀 꽃 한 송이 활짝 피었다
수련은 내 마음에 사시는 그분의 꽃
우리 집으로 찾아오신 그분께
오체투지로 세 번 절하고
찻물 끓여 차 한 잔 올린다
수련에게 찬 한 잔 권하는 아침
나는 참으로 영광스럽다
- 정일근,『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문학사상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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