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발은 내가 묶어야 합니다.
남이 대신 묶어주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타인의 도움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그가 없을 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내 행복을 남에게 맡기지 마세요.
자칫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인간은 진실로 타인을 이해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다른 이의 행복을 만들어줄 수 없다.
- 그레이엄 그린
나는 가족을 망가뜨리려고 이책을 쓴 게 아니다. 이미 독처럼 해롭고 망가진 가족이라면 다른 사람 때문에 더 망가질 이유가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는 건강하고 현실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 내 목표다.
다음 세대까지 고려하면, 장기적으로 볼 때 해로운 가족과의 관계 단절은 오히려 가족을 유지하는 길이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결정을 내린 덕에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학대가 우리 선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해로운 가족과 관계를 끊고 나면 희망이 생기고 삶이 명료해진다.
해로운 가족과 단절해야만 하는 이유가 해로운 친구, 연인, 동료와 관계를 끊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이 꼽은 공통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정서적 학대와 조종 : 과거의 일을 엉뚱하게 바꿔서 이야기 하는 것, 심리적 지배(가스라이팅), 거짓말, 비방, 투사, 삼각화(가족 안에서 두 구성원이 갈등 관계일 때 다른 가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일, 부부갈등에서 자녀를 끌어들이는 경우),편향, 비난,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주는 행위, 배척, 과장된 기분 표출, 염탐, 침범, 통제, 극단적으로 따지는 행위 등.
- 자신과 다른 가치나 상반되는 가치를 강요하는 행위.
- 가족구성원을 전반적으로 존중하지 않는 태도.
- 서로에 대한 믿음과 정직함이 없는 관계.
- 험담 등
많은 사람들이 위와 같은 이유로 가족과 관계를 끊기로 결심했다. 정서적인 부담이 큰 상황에서는 두렵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연락하거나 접촉하지 않겠다는 경계선을 긋고 싶다는 뜻을 가족에게 전하고 싶다면, 아래와 같은 방법이 효과적이다.
- 대화로 전하기(별로 소용없을 것임을 잘 알더라도)
- 결심을 상세히 편지로 써서 전달하기.
- 설명하지 말고 돌아서기.
- 그냥 연락 끊기, 차단하고, 연락처를 지우고, 다 삭제하기.
관계를 끊는 완벽한 방법 같은 건 없다.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스스로 관계를 끊는 것이 핵심이다.
해로운 사람들의 특성
내가 쓰는 ‘해롭다’는 표현은 <정신질환 진단․ 통계 편람 제5편>에서 ‘B군 성격 장애’로 분류된 여러 특성을 나타나는 사람을 간략히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지 않으면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 감정이 금방금방 변하고 감정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다.
- 대화를 독점하려고 한다.
- 성취와 재능을 과장한다.
- 질투가 많고 남을 하찮게 여긴다.
- 다른 사람을 이용한다.
- 대인관계를 잘 유지하지 못한다. 그 관계도 가식적이거나 얕은 경우가 많다.
- 끊임없이 확인받거나 인정받으려 한다.
- 고집이 극도로 세다.
- 빈정대고 비꼰다.
- 스트레스에 대처할 줄 모르거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 감정과 행동을 잘 조절하지 못한다.
- 자기 행동에 뒤따를 안 좋은 결과를 헤아릴 줄 모르거나 그런 결과가 초래된 후에도 교훈을 얻지 못한다. ~
결함이 있는 가족과 해로운 가족은 다르다.
해로운 가족과 단절하기로 한 사람들에게는 이 목록이 그 결심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근거가 되기를 바란다.
누구나 가끔 해로운 면을 드러내거나 남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한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여기서는 부모님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겠지만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건강한 부모가 그렇지 않은 부모와 다른 점은 자녀에게 상처를 줬을 때 속상해한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면 부모는 자연스레 죄책감을 느끼고 후회한다. 부모의 그러한 감정은 아이가 입은 피해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동기가 된다.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자녀 탓으로 돌려서 자기 잘못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로운 가족은 다르다. 자존심이 약한 사람들은 기분 나쁜 순간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낀다. 해로운 부모는 자녀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한다. 아이도 그렇다고 믿게 만든다.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 때마다 아이는 자신이 ‘나쁜 아이‘라고 믿게 된다.
우리 중 40%는 가족과 한 번은 멀어진다.
2015년 미국의 한 연구소에서는 응답자의 40% 이상은 일생 중 어느 시점에 가족과 관계가 소원해진 적이 있다고 밝혔다. 사이가 멀어지는 일은 친척과 직계가족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결정이다.
가족과 관계를 끊고 사는 게 어떤 경험인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겪는 고통에 침묵하기로 결심한 생존자가 많기 때문이다. 괜히 말했다가 치욕적인 일을 당할까 두려워서 가족과 단절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생존자도 있다.
남들이 나를 평가하는 게 싫어서 가족 문제는 숨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생존자도 있다. 상대방이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 생존자는 모래를 씹어 삼키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가족과 헤어지면 내면에서 혼란스러운 감정이 계속 부딪히며 싸움을 벌인다. 이러한 내적 갈등은 스톡홀름증후군에 빗대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스톡홀름증후군이란 붙잡힌 사람이 자신을 붙잡는 가해자를 신뢰하거나 그에게 애정을 느끼는 현상이다.
해로운 가족과 살아온 생존자는 그런 감정이 더 느낄 수밖에 없다. 가족은 우리가 친근함을 느껴야 하는 대상인데, 그들에게 애정을 느끼는 동시에 달아나고 싶은 마음도 들기 때문이다.
가해자도 멀쩡하게 굴 때가 있다. 그들도 바른 말과 행동을 하는 날이 있다. 안타깝게도 학대의 대상은 그런 기억 때문에 혼란을 느끼고 헛된 희망을 품는다. 가족과 헤어지는 결단은 어떤 형태로든 학대나 조종은 용납할 수 없다는 기준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는 자신을 사랑해주고 힘껏 보호해야 하는 가족의 강요나 강압에 못 이겨서 혹사당하는 일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맹세해야 한다.
자유를 찾으려고 하면 대가가 따른다. 자기 가족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대부분은 누가 가족과 연락을 아예 끊거나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해하지 못한다.
심리 전문가나 연구자라고 해서 가족과의 단절이 어떤 경험인지 잘 아는 건 아니다. 해로운 가족과 분리된 심리적 스트레스와 평생 남을 가족의 빈자리를 견디고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
누가 아래와 같은 말들로 구한 적도 없는 의견을 제시한다면 그냥 무시해도 좋다.
- “가족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 “그냥 용서하고 잊으라.”
- “가족(의 행동)을 오해하면 안 돼.”
-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
- “가족들은 아마 널 그렇게 힘들게 했다는 것도 모를걸.”
사람들은 이런 잘못된 추정과 상투적인 말로 당사자가 아는 진실과 고통의 깊이를 면전에서 무시한다. 신중하게 고민하고 내린 확고한 결정인데도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는 태도는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과 같다.
자신의 상처를 경솔하게 평가하는 사람들과 만나면 자연히 세상과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가족 안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아무리 자세히 설명하고 증거를 내밀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내용이 공감할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대인관계가 이런 상황에 놓이면, 해로운 가족 안에서 채우지 못한 결핍이 더욱 깊어진다. 이런 기분이 들 때는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 내 가족에 대한 내가 내린 결정은 기본적인 사실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 내 선택을 남들이 인정해야만 상처가 치유되는 건 아니다.
- 해로운 가족에게서 내 평화를 지키기 위해 힘든 결정을 내린 건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일이다.
-가족과 살면서 경험한 그 고통스러운 일들만 봐도 가족과 단절하기로 한 건 타당한 결정이다.
희생양로 벗어나려면
해로운 가족과 단절한 사람은 단절하기 전부터 이미 희생양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단절을 실행한 순간 곧바로 희생양이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체적인 특징이 아닌 단면만 강조해서 묘사하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족이 자신들과 단절한 사람들에게 ‘정상이 아니다’라는 딱지를 붙인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런 주장이 사적, 공적으로 문제 되지 않는다면, 그냥 웃어넘기면 그뿐이다.
하지만 남을 착취하려는 가족은 자신들과 단절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들기 위해 거짓말을 다른 이들에게 퍼뜨린다는 게 문제다. 사실이 아닌데도 정작 당사자는 맞서서 방어할 수도 없다.
안타까운 건 희생양이 된 사람이 가족의 그런 거짓말을 곧이 그대로 믿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가족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가족이 했던 거짓말과 실제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 점차 분명하게 깨닫는다.
거리를 둔 다음에야, 태어났을 때부터 누군가 자신에게 씌워 놓은 모습과 다른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진실은 그들과 단절함과 동시에 새로 깨어난다.
타협할 수 없는 경계선이 나를 지킨다.
해롭지 않은 가족과의 관계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단절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합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계선이 확고해지면 자기 자신은 물론 해로운 가족과 단절한 사람 사이에서 삼각관계에 놓인 이들을 모두 지킬 수 있다.
중간에 낀 사람들이 해로운 가족의 입에서 나온 여러분에 관한 거짓말을 전하면서 사실 여부를 따지려고 한다면, 이는 경계선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단절한 가족 이야기는 언급하지 말기로 다시 상기시켜야 한다.
피해자 심리에 붙들리지 말자
자립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피해자는 현재에 있지만 피해를 겪은 사람은 과거에 있다. 피해자로 남으면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지만, 피해를 겪은 사람이 되면 변화할 수 있다.
피해자가 애벌레라면 피해를 겪은 사람은 나비다. 자기 상황을 불평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며, 가해자를 싫어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분개한다고 해서 그게 복수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단절 후에는 나를 공격하거나, 아프게 하거나, 내게 상처를 주려고 할 때마다 가만히 있지 말고 계속 움직여야 한다. 즉 그들의 공격이 내게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 잘 파악해서 교훈을 얻고 경험을 토대로 자신에게 의지하는 능력을 더 키워야 한다.
고통이 치유되면 지혜가 된다.
치유의 과정은 오르락내리락 변화가 심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상처를 더 많이 치유할수록 스스로를 의심하고 해로운 수치심에 젖어 있던 자신과는 멀어지며 나를 더 깊이 신뢰하고 내게 기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과 복수
구원은 힘없는 존재의 비상, 그들의 희생양이 되어 따돌림을 당하던 사람이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 것이다. 가장 큰 구원은 해로운 가족과 단절함으로써 그들이 여러분의 삶을 조종하고, 망가뜨리고, 통제할 권한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구원은 밖(해로운 가족)이 아닌 안(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진다. 스스로 발전할 때 얻는 만족감이 구원이다. 해로운 가족 안에서 겪은 두려움에서 싹튼 혼란이 싹 걷히고, 마침내 인생에 기적이 시작되는 것이 구원이다.
복수는 앞이 아닌 뒤를 돌아보는 일이다. 내게 기댈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치유는 지나간 일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달려 있다는 굳은 믿음이 생긴다.
스스로 힘을 불어넣기
스스로 책임지며 사는 삶에서 힘이 나온다. 내 자존심과 결정권, 감정을 갉아먹는 파괴적인 가족의 영향이 사라지면 즐거움을 느끼고, 창의력을 발휘하고, 가장 중요한 평화를 홀가분하게 느끼는 데 꼭 필요한 정서적∙정신적 여유가 생긴다.
해로운 가족과 단절한 사람은 아래와 같은 특별함을 발산한다. 스스로 자랑스러워해야 할 특징이기도 하다.
- 문제가 아닌 평화를 선택했다는 점.
- 진실을 마주, 이야기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
- 자신의 직감을 믿는다는 점.
- 자신을 찾기 위해 정서적으로 힘든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
- 거짓말과 위장, 말만 앞서는 상황을 꿰뚫어 본다는 점.
- 더 이상 남의 기분에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
- 유익한 경계선을 정했다는 점.
- 용감하다는 점.
- 자립적이라는 점 등.
마침내, 자유
해로운 가족의 맹공을 견딘 생존자는 강인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힘에 경탄할 필요가 있다. 가족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물론,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가진 강인함과 정서적 고통을 이겨내는 능력,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악영향에서 스스로 자유를 찾을 만큼 강인해졌다는 사실은 경탄할만한 일이다!
<‘가족을 끊어내기로 했다’P371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세리 캠벨지음, 제효영님 옮김, 심심출판> * 셰리 캠벨 : 미국 공인 심리학자이자 가족 문제 전문가. 뉴욕 BBM글로벌 네트워크와 튠인 라디오에서 방송된 ‘닥터 셰리 쇼’를 진행했고, <그래도 가족인데>,<부모의 정서적 학대 생존자>등의 책을 썼다.
지금 절망 속에 있다면
세상을 보는 눈과
옳고 그름을 느끼는 감각이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아무리 깊은 어둠 속에 있다 할지라도
작은 틈 사이로 비춰 나오는 태양을 추구하라.
절망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니.
- 프리드리히 니체
자유의 징표
자유를 얻은 것의 징표는 무엇인가?
더 이상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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