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징표
자유를 얻은 것의 징표는 무엇인가?
더 이상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우울한 사람
우울한 사람 한 명만으로도 가정에 끊임없는 불쾌함과
어두운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이 없는 가정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왜냐하면 행복은 그렇게 쉽게 전파되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시간에 저항해서도 안 되며, 시간의 꽁무니를 따라다녀서도 안 된다. 이게 진리다. 물론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빠져나와 영원함을 붙들 출구가 없다는 것도 진리다.”그런 영원함은 없음, 곧 무(無)이기 때문이다.
헛헛한 나머지 위로를 구하려 나 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여 본다. 시간으로 파괴될 위험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시간으로써 보존되는 게 아닐까.
몇 십 년 동안 나를 채워오고 붙들어준 모든 것, 데멜에서 벤에 이르기까지, 헤세에서 프루스트에 이르기까지, 세잔(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화가)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아이랜드 출신 화가, 철학자 베이컨의 이복형)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바로 나의 시절에 나날의 요구를 충족시켰으며, 시간의 수레바퀴가 무자비하게 깔고 지나갔다 하더라도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어떤 것도 결코 손실되지 않았다. 위로, 헛헛한 위로, 공허한 생각놀음, 파괴함으로 보존한다는 것은 역사철학이 이뤄낸 위대한 업적이기는 하나, 실존의 장에서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내일, 다시 말해서 10분 뒤, 1년 뒤, 10년 뒤, 아무리 길게 잡아도 15년 뒤에는 더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나를 묶어준 사슬을 끊는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로부터 풀려나는 자유, 내가 쟁취하려는 자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묶인 채 남는 것은 굴욕적인 체념이다.
텅 빈, 내가 더는 살 수 없는 공간, 오로지 고개만 빳빳이 세우는 자유의 공간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공포에 따른 행동일 뿐이다.
묶임을 묶임으로 느끼지 않고 자유가 더는 자유가 아닌 곳에서, 자욱한 안개의 잿빛 북해라는 영원에만 자신을 맞추며 빠져나갈 수 없이 지레 체념을 하면서도 이를 깨닫지도 못하는 것,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자, 이제는 분명하다. 그것은 죽음이다. 막아줄 묘약이라고는 없는 몸의 쇠락과 문화적 노화는 더 나쁠 수 없는 메시지, 곧 종말의 선포다. 문화의 어떤 표시 체계가 힘을 읽고 허약해지는 과정의 끝에는 죽음 혹은 ‘죽어간다’로 읽어야 하는 현상이다.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지 않고자 하는 한, 부패하는 질서를 버려서는 안 된다.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부패한 체계에 무가치할지라도 충절을 보여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무망한 시도로 자신의 부정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거부해야 한다.
이제는 자신의 소유 존재가 더는 바뀔 수 없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제 늙은 사람이 되었다. 문은 더는 열리지 않는다.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진 사람은 이런 대답을 듣는다. 당신이 어제와 그제 했던 것을 해보라. 어딘 당신의 과거로 당신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보라.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
구인광고의 문구는 한결같다. 40세 이하, 45세까지만 신청 가능, 젊고 역동적이며 전향적인 자세로 일을 즐기며 성격이 좋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 찾음.
도대체 나는 언제 진짜 사는 것처럼 살까? 동시대인, 연금생활자이거나 여전히 흥분한 태도로 인생의 한복판에 서 있는 남자, 자신의 소유를 늘리거나 방어해온 남자는 사회가 그에게 내린 판결, 곧 사회적 연령을 받아들인다.
사회가 체념하도록 은근히 몰아붙이는 실존적 죽음은 몸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직은 낮이라고 저마다 중얼거리며 청년 행세를 하려든다. 그러나 밤은 이미 시작되었다. 아직 어둠이 깃들지는 않았다할지라도 밤은 서서히 위세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사회가 요구하며 허락하고 금지하는 그대로.
백발을 자랑하는 경제 수장, 언론이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정력을 자랑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회장의 배후에는 한창 빛나는 지성을 자랑하는 우수한 젊은이의 떠받듦이 있다. 노인은 그저 점잖게 시치미를 떼며 온화한 미소만 짓는다.
오늘날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전혀 가지지 않는 늙어가는 사람과 이미 노인인 자에게 더는 신성함이라는 품위 있는 이미지를 부여하지 않는다. 늙은 이는 추해진다. 추하다는 것은 우리가 추잡하다며 미워하는 것일 뿐이다.
노인은 허약해진다. 늙어 허약한 인간에게 올곧은 동정을 거의 보내지 않는다. 젊은이가 노인을 바라보는 부정할 수 없는 반감, 존경으로 위장된 반감은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빛바랜 인습일 따름이다.
<‘늙어감에 대하여-저항과 체념사이에서’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님 옮김, 돌베개출판> * 장 아메리(1912~1978) : 191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43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2년 동안 강제수용소 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이후에는 브뤼셀에서 자유기고가와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죄와 속죄의 저편>, <자유 죽음>의 저서로, 1970년에 독일 비평가상을, 1971년 바이에른 예술 아카데미로부터 문학상을, 1977년 오스트리아 빈 시의 언론출판상과 함부르크 시가 수여하는 레싱상을 받았다.
그는 불편한 자세로 움직이지도 않고 거의 소파에 박혀 있다시피 했다. 그의 큰 손은 과로로 팔 끝에서 축 늘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거의 쳐다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좀 더 나중에 보려고 보류해 두는 것 같았다.
내 마음에 떠오르는 그의 모습은 이렇다.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었던가? 이미 오래전에 운이 저물어 버린 사람인가?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거지? 무엇을 구하길 원하지?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 말할 줄 몰라요?(~)”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를 견디기 위한 견고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를 유폐하는 모든 것이 더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불안하게 하고 동요하게 만들었다.
가끔은 ‘우리’이며, 때로는 가장 넓고도 가장 비결정적인 존재, 단 하나의 존재인 그 앞에서, 우리는 무수한 하나로 존재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와 상관없는, 보잘것없지만, 강하고, 필연적인 무수한 관계로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나는 그와 만난 처음의 순간을 후회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아니라 그에게 있는 나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안락한 일상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는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면서도 무의미한 지점에 있었다. ~
이름은 우리를 갈라놓는다. 이름은 그가 있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 영원히 던져 놓은 돌과 같은 것인데, 그는 이미 시대와 시대를 거슬러 이미 다가섰다고 느낀 것 같았다. 거기에 친구의 제스처가 있었는가?
그것은 우정인가? 그는 내게 자신을 친구로 여겨주고, 산 채로 잡아들이기 위한 덫처럼 유혹하는, 그를 향한 돌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던가? 그런데 나는 누군가?
- 세계-내 존재로서 타자에게 대상이 된다는 것은 폭력적인 일이다. 그러한 타자와 공동의 관계가 된다는 것은 자아의 훼손이라는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다. 장-폴 사르트르의 타자 개념과 상통한다.
“의식 개체들 사이의 본질은 공동존재가 아니라 갈등이다.” 블랑쇼가 그려 낸 타자의 현전으로 인한 헐벗은 자아의 두려움은 사르트르가 지적한 바와 전혀 다르지 않다.
- <‘최후의 인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모리스 블랑쇼지음, 서지형님옮김, 그린비출판>
줄거리 요약 : ‘그’라는 인물은 멀리 바다가 보이는 폐쇄적인 요양원에 ‘나’보다 늦게 들어온 한 환자다. 얼마 후 화자가 산의 고산지대에 머물렀다가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중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죽음을 사유하기에 이른다. 화자가 주목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어감’이다. 화자는 그의 죽어가는 육체가 남겨 놓은 흔적을 통해 그의 존재와 죽음을 더욱 생생하게 느낀다.
화자는 호흡이 가쁜 그가 그녀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음식을 삼키는 것을 바라본다. 화자의 방은 바로 그의 옆방이었는데,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가 늑대처럼 기침하는 소리 등 그의 존재를 실감케 한다.
그리하여 ‘나’는 순수한 타자성의 영역인 ‘그’의 고통 속에 함께 놓인다. 그의 죽어 감을 목도하면서 곧 자신의 과정이 될 수 있으며, 그 누구도 대면해야 할 공동의 사건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 ‘그녀’, ‘그’는 마치 구분되지 않는 한 덩어리처럼 공동의 존재로 각인된다. <최후의 인간>의 ‘그’는 어떤 특정의 인물로 규정되기 어렵지만 누구라도 ‘그’의 공간에 기입될 수 있는 비인칭적 ‘탈-존재’ex-istence를 실현하고 있다.
블랑쇼는 한발 더 나아가 우리 모두 ‘바깥’에서 함께 존재하는 공동의 관계를 맺고 타자의 고통을 자기 안에 이식하는 데 이른다. 그렇다면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는 인간의 한계지점이라 할 수 있는데 , 불행, 역겨운 상처, 매정한 사물, 흉측하고 더러운 것, 진부한 양심 등이다.
블랑쇼는 훨씬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타자의 역겨운 것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 비천의 경험으로 내려가는 것만이 ‘우리’가 되는 길이라 여기고 있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도 연대할 수 없는 무한한 거리의 차이, 소통의 부재만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블랑쇼는 그 매울 수 없는 간극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비로소 ‘우리’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논리를 편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험 속에서 우리는 진실 속에 드러난 타자의 얼굴은 획일적인 동일성의 법칙에 따라 ‘나’의 욕망을 충족시킬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요컨대 블랑쇼가 최후의 인간에게서 드러내고자 하는 타자와의 관계성은 소통의 부재와 오해, 거리 속에서 함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 <최후의 인간>은 블랑쇼가 1957년 초판에서 1977년까지 무려 세 차례의 수정을 걸친 소설 형식으로 쓴 마지막 작품이다. 온통 ‘그’에 대한 1인칭 화자의 사유로 가득 차 있다.
이 거리의 혼란 속에서, 필요와 목소리들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은 나에게 우울한 행복을 준다. 얼마나 많은 즐거움, 급함, 욕망이 여기서 매순간 드러나는가. 얼마나 많은 목마름과 흥분이 나타나는가. 그러나 곧 이 모든 시끄러운, 생기 넘치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곧 조용해질 것인가. 모두의 그림자, 그의 우울한 동반자가 그 뒤에 서 있다
이것은 항상 이민선이 출발하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과 같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할 말이 그 어느 때보다 많고, 시간은 축박하며, 모든 소음 뒤에는 외로운 침묵으로 기다리는 바다가 있다. 그렇게 탐욕스럽고, 자신의 멋잇감을 확신하며 기다린다. 그리고 모두, 모두가 과거는 아무것도 아니거나 사소한 일이었다고, 가까운 미래가 모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래서 이러한 서두름, 이 소리 지르기, 이 자신을 귀머거리로 만들고 자신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있다.
모두가 이 미래에서 가장 앞서고자 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죽음의 고요함만이 이 미래에서 모두에게 확실하고 공통적인 유일한 것들이다. 이 확실하고 모두에게 공통적인 유일한 것이 사람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들이 자신을 죽음의 형제애로 여기는 것에서 가장 멀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가. 죽음을 전혀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나는 삶에 대한 생각을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어야 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다. 심지어 백 배나 더.
- 프리드리히 니체,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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