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삶의 흐름, 독서!

[중산] 2024. 12. 13. 10:19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해변!

 

 

 

공허한 과시욕, 무대 위에서의 연극, 양 떼, 소 떼, 강아지들에게 던져진 뼈다귀, 양어장에 던져진 빵 부스러기, 개미들의 노고와 짐 나르기, 겁먹은 생쥐들의 우왕좌왕, 실로 조종되는 인형들, 너는 이런 것들 사이에 똑바로 서 있다. 상냥하고 잘난 체하지 마라. 그리고 각자의 가치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의 가치와 일치한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남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도 되도록 너 자신에게 물어보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라. “ 이 사람은 무엇을 노리고 이런 일을 하는 걸까? ” 그러나 너 자신에게서 시작하고 너 자신부터 먼저 심문하라!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에서.

 

 

 

 

 

시대의 변천사!

 

행복의 개념도 달라졌다.

 

18세기 들어 현세의 행복 추구가 유행처럼 번졌다. 1776년이 되자 모든 사람이 가장 원하는 삼박자는 ‘삶, 자유, 행복’이 되었다.

 

1751~1766년 프랑스 백과사전에서는 ‘정부’의 개념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정부가 존재하는 큰 목적은 국민의 이익이 되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1848년에 이르러 북서부 유럽 전역과 그 이웃 국가 및 속국들까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영국에서는 무역, 통계, 개선, 부르주아 생활양식에 대한 정서와 어조가 바뀌었다.

 

윤리와 수사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누구는 부자이고 또 누구는 가난한 이유를 운명이나 정치, 마법 등의 탓으로 돌리는 습성에서 점차 탈피했다. 

 

그리고 ‘산업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북서부 유럽인들이 전통적 사상을 따르라는 기득권자들의 이익에 반대하는 혁신주의로 인해 ‘부의 폭발‘이 일어났다.

 

용기, 정의, 절제, 신중이라는 메클로스키가 말한 <부르주아 덕목> 비종교적 4가지와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이른바 기독교의 덕목 가지는 적절한 수정을 거쳐 귀족 사회나 종교사회만큼 부르주아의 생활 방식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이 덕목들은 편익의 신중한 계산, 상업성이 검증된 산업 혁명의 신문물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 다른 사람이 도덕적으로 떳떳하게 획득한 이윤을 정당하게 여기고 시기심 없이 수용하는 자세 등의 수사법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지식인층은 그동안 상인 계층을 경멸했으나, 1868년 메이지 유신 시기를 기점으로 수사법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가 이러났다.

 

일본의 유교 사상에서 정한 위계질서는 위에서부터 천황, 쇼군, 다이묘, 사무라이, 농민, 수공업자, 상인, 기름장수, 그리고 맨 마지막은 조선인의 순이었다.

 

동아시아서 상인 계급은 유럽에 비유하면 ‘신사’가 아니었고 명예도 없었다. 한때 상인에게는 법적 규제가 완화된 중국 송나라 왕조(860~1279)시기와 같이 비교적 자유를 누리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지주와 장군, 황실의 관료와 달리 존엄성은 없었다. 1689년의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마르틴 루터, 미켈란젤로, 카를 5세 이 세 사람은 행복과 같은 개인적 목표 대신 각각 종교적, 예술적, 정치적인 영광을 추구했다.

 

17세기 후반에 성공회 사제들은 신은 인간이 거룩한 동시에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성공회와 일부 뉴잉글랜드 회중파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맹의 낡고 가혹한 교리에 등을 돌렸다.

 

행복주의자들은 인간이 진노한 신의 손에 꼼짝달짝 할 수도 없는 단순한 죄인도,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도 아니라고 선언했다.

 

먼 과거 세대들은 천국에서의 삶에 중점을 두고 사후의 행복을 기대함으로써 초월적 존재에 자신을 연결했다. 그 후 18세기에 나타난 신기한 현상은 현세에 관한 행복론이 등장했던 것이다.

 

근대화를 싫어하고 나름 매력 있는 전통주의자 중 한 명이었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로크는 기절했고/ 에덴동산은 사멸했다/ 신은 그에게서/ 제니 방적기를 빼앗았다.”행복주의로의 전환은 단연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더 잘 살기 위해 새로운 계획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민주주의도 그중 하나다. 당대의 계몽주의 군주들은 만인을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이 단지 “국가의 첫째가는 공복“ 이라고 주장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우턴은 ”쾌락과 이윤의 추구가 명예, 미덕, 신앙심 등 다른 모든 요인을 제치고 인간의 유일한 동기 부여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라고 덧붙인다.

 

우턴은 “인간은 결국 다 똑 같다”라던 홉스의 제언을 계몽주의의 효시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계몽주의 페러다임과 자유주의를 결합해 이른바 ’소유적 개인주의‘의 부상에 대해 비판한다. 한마디로 ’이기심‘의 새로운 개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우턴은 자신이 혐오하는 현대 경제학자들, 더 혐오하는 부르주아 계급, 가장 혐오하는 자유주의를 공격한다. 그는 부르주아를 원망하는 것이 덕을 실천하는 첫걸음이다.“라고 말했다.

 

마르크스와 토머스 칼라일과 같은 이론가들에게서 공격을 받던 자유주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사회적, 경제적 결실을 맺었다.

 

아무리 현대인의 모든 기쁨을 가져다준 자유주의를 창출한 동시에 그 혜택을 받은 주체가 부르주아 유럽이었고, 자유주의가 평범한 사람들도 처음으로 자기 뜻을 펼칠 가능성을 열어주었음에도,

 

우턴은 자유주의가 현대 세계와 어떻게든 긍정적인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공격하고 있다. 우턴이 생각하는 격언은 공리주의가 자유주의의 전부라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법이 아니라 바로 윤리다. 여기서 우리는 토크빌의 말에 공감을 표한다. “나는 제도(법)가 인간의 운명에 단지 부차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맞다고 본다.

 

(…) 정치 사회는 법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정서, 신념, 사상, 마음먹기의 습관, 그리고 그 사회가 형성되기 전부터 구성원들이 이미 지니고 있던 정신에 따라 형성된다. (…) 정서, 아이디어, 관습만이 국민의 번영과 자유로 이어질 수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현실적인 정치인이었던 링컨은 더글러스와의 토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심을 따르면 어떤 정책도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심을 외면하면 아무것도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법을 제정하고 공포하는 자보다 민심을 움직일 수 있는 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그러한 자가 법의 제정과 시행의 성패를 판가름한다.”

 

화재가 난 건물에 주저 없이 들어가 아이를 구하는 이유도 단지 TV에 얼굴을 비추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은 안 하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성인이자 전문직 종사자로서 그는 가정환경과 자기비판, 자기 주변의 문화 등의 영향을 받으며 윤리적 정체성, 신념, 그리고 애덤 스미스가 말한 “내면의 공정한 관찰자‘라는 것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윤리가 결여된 제도는 아무리 법을 잘 만들어도 효과가 없다. 그래서 “정치 사회는 법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세간의 통념과 달리 윤리적 신념은 빠르게 변할 수 있고 실제로 변한다. 유력 대선 후보들이 모두 동성 결혼의 합법화를 반대했던 2008년 말과 달리, 최근에 감지된 정서의 변화를 생각해보라.

 

2020년 대선 캠페인에서도 동성 결혼을 반대했다간 심지어 골수 공화당원까지 포함해 양쪽에서 치명타를 입었을 것이다.

1689년 권리장전 이후 영국의 경제에 변화가 일어났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알고 보니 사회적 합의와 대화가 우리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곳이었다.

 

뇌 과학자 레이먼스 탤리스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수 십 만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인지 활동이 악수하듯 연결되어 형성된 무한하고 극도로 정교한 마음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

 

이 공동체가 우리 일상이 펼쳐지는 무대다. 그것은 혼돈 속의 삶을 직장에서의 삶과 분리하고, 말 그대로 마음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두뇌 활동만 단독으로 관찰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당신이 모르는 자유주의’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디드러 낸슨 매클로스키/아트 카든 지음, 임경은님 옮김, 한국경제신문출판> * 디드러 낸슨 매클로스키 : 1942년생으로, 하버드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10년간, 2000년부터 일리노이대학교에서 교수, <부르주아의 덕목>등 20여권을 저서가 있다. 아트 카든 : 샘포드대학교 브록 경영대학원의 경제학과 교수이자 미국 경제연구소 선임 연구원이다.

 

 

울주군 서생면 신암항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는 독서

 

도스토옙스키를 경애하는 작가는 많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 내 자신이 작가라는 사실이 허무해질 정도”라고 할 만큼 도스토옙스키의 팬으로 유명하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처럼 여러 세계관과 관점을 하나의 작품에 담고 조합시 ‘종합소설’을 쓰고 싶다고 한다. 특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반복적으로 읽고 있으며 그가 많은 영향을 받은 책 중의 하나로 꼽았다.

 

호칭도 많아서 혼란스럽고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각각의 인물상과 관계성 등의 전체상을 이해하고 이야기의 줄거리를 좇아가야 한다.

 

머리가 아득해지는 느낌이라고? 그 아득함까지 포함해서 독서라고 할 수 있다. 깊이란 종합적인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가진 놀라운 깊이는 하나의 주제나 관계성으로 좁혀 단순화시킨 내용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비단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작품은 술술 읽히지 않는다.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생각하게 되어 좀처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을 때도 있다.

 

‘이제 얼마 남았나 … 아직 다 못 읽었네’하고 몇 번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 역시 독서다.머리가 아득해지는 느낌마저도 겁내지 말고 깊은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까짓, 덤벼봐야지’하고 경의를 담은 무사의 마음과 자세로 앞으로 나가보자.

 

<‘책 읽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는 곳’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사이토다카시지음, 황미숙님 옮김, 쌤앤 파커스출판> * 사이토다카시 : 일본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교수이자 최고의 교육 전문가, 도쿄대학교 교육학연구과 박사 과정.<신체감각을 되찾다>, <어른의 말공부>, <잡담이 능력이다>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