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타인의 고통!

[중산] 2024. 12. 21. 06:42

울주군 진하해수욕장 명선도 일출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행하다.

행복은 언제나 당신의 힘이 미치는 곳에

있음을 기억하라.

 

- 톨스토이, 러시아의 소설가, 사상가

 

 

 

아이를 키우다 보면 같은 사건을 아이가 전혀 다르게 기억하고 있어서 놀랄 때가 많다. 내가 아이를 위해 큰맘 먹고 한일을 아이는 전혀 기억 못하기도 하고, 반대로 나에겐 흔적조차 남지 않은 기억인데 아이에겐 뼈아픈 사건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그래서 부모 노릇이 어렵다. 내가 준다고 해서 아이가 받는 게 아니고, 내가 주지 않은 걸 아이가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이에게 좋다는 것은 전부 해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그러나 아이가 그것을 온전히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이는 아이대로 필요한 것을 흡수하며 자기 세계를 구축해 나갈 것이다.

 

아이를 잘 가르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아이와 좋은 관계를 맺으면 된다. 아이와 관계를 맺는 방법은 여타 인간관계와 다르지 않다.

 

그저 나라는 사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좋은 부모라는 상에 억눌리기보다 그저 온전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할 것.

그러면 아이들은 자기 부모 명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자기 삶을 알아서 꽃 피운다. 

 

그래서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가 따로 없다. 그저 부모만 있을 뿐이다.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이근후교수 지음, 메이븐출판> * 이근우 교수 :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를, 중학교 때 6.25 전쟁을 겪었다. 고교 때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단칸방을 전전했고, 대학 때 4.19와 5.16반대 시위로 감옥 생활로 취직이 어려웠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50년간 환자들을 돌보고 학생을 가르쳤다.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를 비롯해 40년간 모두 20여 종의 책을 썼다.

 

 

나사리 해변

 

 

‘주체’철학에서 ‘타자’철학으로!

 

주체의 철학이 근대 철학에서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예컨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 칸트의 ‘자연 세계와 도덕 세계의 입법자인 나’, 키르케고르의 ‘신 앞에서 홀로 결단해야 하는 나’, 니체의 ‘스스로 자신의 가능성을 열어 가는 초인으로서의 나’, 하이데거의 ‘죽음에 불안에 직면한 나’ 철학의 중심 주제인 데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의 철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허무주의로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나의 죽음과 더불어 세계도 사라지고 의미도 사라진다.

 

나의 죽음이후를 걱정하거나 타자들을 염려할 이유도 없다. 자기 소멸의 불안 앞에서 삶을 즐기는 일만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허무주의는 쾌락주의와도 통한다.

 

둘째는 타자에 대한 폭력적 지배를 함축한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사태를 붙잡아 자기 앞에 세운다’는 것, 즉 대상화를 뜻한다. 존재하는 것들은 나에 의해 표상되고 문초받는 대상으로서 그 존재 의미를 갖게 된다.

 

주체의 힘에 따라 지배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된다. 이는 자칫 타자에 대한 배제와 거부, 그리고 폭력적 지배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절학의 구도를 송두리째 폐기한, 아니 거꾸로 뒤집은 사상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이다. 이것은 서양 근대 철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의미를 나타내 주는 개념은 무엇보다도 ‘무한’의 개념이다. “무한의 이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무한의 이념은 사회적 관계이다. (…)자아는 무한자를 내포할 수 없다.

 

무한의 이념은 더 작은 것 안에 더 큰 것을 지니고 있는 것, 생각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는 사유이다. 그것은 열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열망은 무한의 무한성의 척도라고 말할 수 있다.“

 

타자는 강자의 모습이 아니라 낯설고 비참한 이방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윤리’가 시작된다. 비천함에 처한 타인이 나에게 간청하며 호소해 올 때, 그 호소로 인해 나의 자유가 문제시될 때, 이때 비로소 윤리적 관계가 등장한다.

 

타자 속의 하느님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요즘 용어로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내 밖의, 나를 초월한 타자와의 만남은 고아, 과부, 난민과 같은 없는 자,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신은 사물을 포착하고 대상화하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볼 수 없는 존재요. 표상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정의를 행할 때, 다시 말해 없는 자와 가난한 자를 돌아볼 때, 그들의 생존과 권리를 옹호할 때 그때 나는 신을 볼 수 있다. 나는 이들 타자를 통해서 신을 만난다.

 

낯선 이로서의 타자가 나에게 환대를 호소해 올 때, 그때 영접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신을 영접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신은 불가해하고 헤아릴 수 없는 존재로서 원인과 결과의 도식을 통해서는 결코 드러날 수 없다.

 

신은 오직 타인의 얼굴에 자신의 ‘흔적’만을 남기고 우리 앞을 ‘지나감’으로써 간접적으로 드러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식은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타자와의 만남을 그리는 것만으로써 만이다.

 

신과의 관계 맺는 유일한 방법은 타자의 얼굴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 선하게 되는 것이다. 형이상학 역시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윤리학과 관련된 문제이다. 인간과의 관계를 떠나서 신에 관한 인식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인간에 대한 실천을 외면한 채로 신과의 관계는 가능하지 않다.

 

“타자는 형이상학적 진리의 중심이며, 신과 나의 관계에서 불가결하다. 타자는 매개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는 신의 육화가 아니라, 바로 그의 얼굴을 통해서 신이 계시되는 높이의 현현이다.”

 

늘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고통 받는 타인의 처지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냥 스쳐 지나가기 십상이다. 여기서 우리의 반성이 요구된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과학과 계몽의 세례를 받은 이후 신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허무주의와 쾌락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이웃의 인격을 존중하고 윤리를 가능케 하며, 이웃과의 나눔과 평화의 삶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신에게 자리가 아닌 자리를 부여하는 철학이다.

 

이것은 타인의 얼굴과의 만남을 통해 나의 삶에 의미를 얻게 해주는 ‘의미의 철학’이며, 지극히 일상적이고 물질적인 삶의 차원의 의미를 회복시키는 일상의 ‘삶의 철학’이다.

 

고통의 윤리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날 타인의 고통에 대해 둔감함 채 살아가기 쉽다. 왜냐하면 고통 받고 있는 그들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고통당하는 사람은 구체적인 인간으로,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 얼굴은 우리에게 호소하고 항의하고 절규한다.

 

그의 호소와 원망과 항의를 듣고“ 당신의 고통은 당신의 것일 뿐, 나와는 아무상관 없소!”하고 말할 수 없다. 그 사람과 같이 고통을 당하지 않음으로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기는 죄의식이 우리를 엄습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 앞에서 우리는 냉정하게 객관적이거나 이론적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윤리적이 될 수밖에 없다. 타인의 고통은 어떤 권리를 가지고 나에게 요구하면서 나의 의무를 일깨우고 나의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고통받는 타인의 호소에 응답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책임을 진다는 것, 그의 짐을 들어 준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의미에서 ‘윤리적’인 것이다.

 

레비나스는 유용성이나 합목적성을 통해서 고통을 정당화하기를 거부한다. 이는 그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절대 고통과 절대 악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이며, 어떤 이데올로기도, 어떤 형이상학적 목적론도, 존재하는 고통과 악을 정당화할 수 없다“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붙는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되, 타인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고통이라면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나의 고통은 직접적인 반면 타인의 고통은 단지 간접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타자의 고통은 ‘눈감아 줄 수 없는 것’으로서 나에게 응답을 요구한다. 이것은 내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나는 타자에 사로잡혀’있다.

 

이처럼 타인의 고통을 대신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타인을 위한 ‘볼모’가 되어 줄 때, 그때 비로소 이 세계 안에는 연민과 동정과 자비가 있을 수 있다.

 

타인을 수용함,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짐이야말로 주체성의 핵심이다. “대신함은 ‘속죄‘의 방식으로 타인을 위해 고통당함을 뜻한다. 이러한 ’속죄‘만이 모든 동정을 가능하게 한다. (…)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현존(자아)은 애초부터 타자에게 패배한다.

 

“~우리는 ‘자유를 우선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나는 자유에 앞서 책임을 진다. (…) 여기서 자유란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할 수 없는 것을 행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1906~1995: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후설의 현상학과 유대교의 전통을 바탕으로 서구 철학의 존재론을 비판하며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윤리설을 발전시켰다.

 

유대인 부모 아래서 태어나 탈무드 교육을 엄격히 준수되는 집안 환경에서 성경과 푸시킨, 톨스토이, 토스토옙스키 등의 러시아 문학을 읽으며 자랐다. 프랑스에서 철학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강의와 세미나에 참석해 현상학을 공부했다.

 

1930년 <후설 현상학의 직관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포로수용소에서 5년 동안 벌목 등의 강제노동을 하였다. 장발 철학학교에서 강의를, 1979년 <시간과 타자>라는 책을 출간했다.1978년까지 소르본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력성은 전체주의적 속성에 대한 윤리적 성찰로 이끌었으며, 타자에 대한 인격적인 윤리적 책임감을 출발점으로 하는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상과 인물로 본, 철학적 인간학'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박찬구교수지음, 세창출판사> *박찬구교수 : 서울대학교 철하과를 졸업 후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윤리교육학 명예교수이다.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개념과 주제로 본 우리들의 윤리학>등 10여권의 저서가 있다. 한국철학적인간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지금의 당신과

5년 뒤 당신의 차이는

그동안 당신이 만나는 사람과

읽는 책에 달렸다.

 

- 찰리 트리멘더스 존스, 미국의 자기게발 전문가, 강연가

 

 

진하해수욕장 명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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