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몇 가지 비관론은 틀렸다.
우리는 비관주의가 잘 팔리는 현실을 목격했다. 그러나 비관주의는 경제학 및 경제사학에서 지구가 평평하다고 외치는 것과 같으며, 이성과 증거를 따르는 대신 신문 사설과 블로그 게시물의 설득에 넘어가게 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이 ‘자본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세간의 믿음과는 달리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북부 지역에 산업혁명이 초래한 영향을 잘 알지 못했기에 그가 집필한 작품은 경제사의 올바른 이해를 돕는 지침서로 간주하기에는 부적절하다.
일부 독자들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1848년 작<공산당 선언>에 빠져들 것이다. 그러나 그 안의 열정과 영민함은 높이 사나 역사적, 경제적으로는 전반적으로 허구라고 볼 수 있다.
첫째 비관론, 맬더스식 근거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가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점은 실제로 전 세계의 빈곤이 얼마나 급감했는지를 통해 잘못임을 확인했을 것이다.
1916년 이후 특히 1980년 이래 대풍요는 엄청나게 세계화되었다. 둘째 비관론은 제국주의와 유럽 중심주의에 기초하였다는 것도 그간의 경제성장을 통해 거짓임이 드러났다.
비유럽국 국민들이 유럽 등지로 진출해 꾸준히 거둬온 성공은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의 호랑이들과 켈트 민족권과 아이슬란드, 그리고 중국과 인도의 급성장하는 신흥중산층은 오직 유럽인들이 대풍요를 이룰 능력이 있다는 주장을 반증한다.
그리고 셋째 비관론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마지막 위기가 찾아왔다는 주장은 1867년부터 지금까지 대여섯 번 정도 고개를 내밀곤 했다.
1930년대 대공황은 정부 개입으로 완화되기는커녕 악화되었다. 2008년 대침체 때도 1930년만큼 심한 불황은 아니었지만 마찬가지였다.
포퓰리즘과 사회주의의 정치적 잔재는 매번 반복된다. 체제가 망가졌으니 현 체제를 타도하자는 주장은 단골 레퍼토리다.
넷째 비관론은 성장이 끝났고 초과 저축이 소득을 둔화시킨다는 케인즈식 ‘침체주의’논리다. 이 논리는 지금까지 세계의 거침없는 성장 행진을 통해 거짓임이 입증되었다.
다섯째 비관론은 사람들이 그래도 ‘소비주의‘ 때문에 타락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확실히 자유와 풍요를 이용해 돼지 같은 욕심쟁이로 살 수 있기는 하다. 원래 옛날부터 사람들은 나쁜 소비 습관이 있었다.
예를 들어 곰을 묶어두고 전투견을 풀어 싸우게 하는 베어 베이팅을 취미로 즐기거나 명금류를 잡아먹기도 했다.
여섯째 비관론은, 유럽과 미국의 소득이 다른 국가들에 따라잡힐수록 소득 수준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암시한다.
그러면 뭐 어떤가? 다른 국가들도 부자가 되니까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모든 사회는 평준화가 되고 있으므로, 거의 동일한 1인당 실질 소득을 달성할 것이다.
<‘당신이 모르는 자유주의’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디드러 낸슨 매클로스키/아트 카든 지음, 임경은님 옮김, 한국경제신문출판> * 디드러 낸슨 매클로스키 : 1942년생으로, 하버드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10년간, 2000년부터 일리노이대학교에서 교수, <부르주아의 덕목>등 20여권을 저서가 있다. 아트 카든 : 샘포드대학교 브록 경영대학원의 경제학과 교수이자 미국 경제연구소 선임 연구원이다.
우리는 나르시시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SNS는 시대의 징후이며 휴대폰은 시대의 페티시입니다.
나르시시즘 - 휴대폰 - SNS는 뫼비우스의 띠를 이룹니다.
-정지돈 소설가의 <어느 서평가의 최후>에서.
케이크가 등장하자 박수가 터져 나온다. 신부와 신랑이 일어서서 나이프를 잡는다. 칼날이 맨 아래 단 깊숙이 들어가고 빼놓을 수 없는 사진도 찍는다.
곧 설탕을 뿌린 조각 케이크가 작은 접시에 담겨 다시 나온다. 차와 커피도 따라준다. 사제에게 마이크가 넘어온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후 감사 기도를 드리지만 한마디도 마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은 기도를 드려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 하느님은 어디 있지? 그가 물었다. 하느님이 무엇이냐 고는 묻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을 몰라도 상관없다.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 바로 이것이 이상한 점이다 - 그는 하느님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바란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의 계시뿐이다. 저녁이 되어 가정부가 돌아간 뒤 창가의 커튼을 꼼꼼하게 치고 나서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사제가 되는 방법을 보여 달라고 기도를 드릴 때도 있다.
사제는 지금 돌아갈 수도 있다. 집으로 돌아가면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것밖에 없다. 잠이 그를 끌어당길 테고 하루가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춤이 시작할 때까지 남아야 한다. 그는 기다렸다가 춤을 보고 나서 갈 생각이다.
일요일에 미사가 끝나면 사냥을 즐기는 남자들이 여기로 몰려든다. 그들은 장끼, 오리, 거위 같은 죽은 새를 사제관으로 가져오곤 했다.
그러면 가정부가 새들을 걸어놓고 털을 뽑은 다음 저녁 식탁에 내놓았다. 사제는 식사를, 그 육즙을 맛있게 먹었지만 자세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오리나무가 자라는 습지에 도착하자 물 쪽에서 당황한 듯 퍼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야생 오리 때가 날아오른다. 그 바람에 밑으로 늘어진 꽃 이삭들이 떨린다.
사제가 가만히 서서 백로를 찾아 하늘을 바라본다. 여기에 와서 못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갑자기 백로가 나타나 하늘을 향해 평온한 곡선을 그리며 느린 날개 짓으로 날아간다.
저 아래 강에서 갈색 물이 느른하게 흐른다. 단지 강이 아직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평화로워진다. 수면에 비친 반대편 강둑의 나무들 모습에 골이 진다.
구름 한 점이 하늘에 떠다닌다. 너무 창백하고 뜬금없어서 전날의 구름이 남아 있는 것 같다. ~
<‘푸른 들판을 걷다’에서 일부 요약 발췌,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님 옮김, 다실책방> 클레에 키건 : 1968년 생, 미국 웨일스대학교 문예창작 석사 학위, 더블린트리니지칼리지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취득, <남극>으로 아일랜드 문학상과 윌리엄 트레버상을, <푸른들판을 걷다>로 영국 에이지힐 상을, <맡겨진 소녀>로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2022년 오웰상을, 부커상을 수상했다. 202년 아일랜드 올해의 작가상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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