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롱베이 역사
아득한 옛날, 하롱베이에 외적이 침략해 왔을 때 하늘에서 용들이 내려왔다. 용들은 바다 위에 폭풍우를 쏟고, 격랑을 일으켜 그 외적들을 격퇴했다. 용들은 하늘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도 외적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바다 속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용들이 용틀임하면서 쏟아부은 천둥·번개, 그 몸부림이 하롱베이에 떠 있는 섬으로 변했다고 한다. 지질학자들은 섬들을 석회암 지질이 만든 지형이라고 설명하지만, 그 기괴한 형상들은 용들이 만든 게 틀림없다. 그래서 이름도 ‘하룡’, 용이 강림한 곳이다.
베트남의 역사는 외세와의 투쟁의 역사다. 하롱베이에 얽힌 전설과 역사 또한 베트남의 지난한 투쟁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롱베이에 있는 ‘숨은 동굴’은 베트남판 이순신 장군 격인 쩐후이다오 장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13세기 전 지구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몽골군이 베트남을 침략했을 때, 침략군은 바로 이 하롱베이로 쳐들어왔다. 그때 이곳을 지키고 있던 쩐 장군은 ‘숨은 동굴’ 안에 군사를 숨겨놓고 때를 기다렸다. 섬들 사이에 있는 좁고 얕은 길목에 촘촘하게 말뚝을 박아 놓은 뒤 썰물 때 몽골군 배가 말뚝 위에 걸리자 이들을 섬멸했다. 숨은 동굴에는 2000여명이 은신할 수 있는 큰 공간이 있고, 곳곳에서 당시 사용했던 나무말뚝이 발견됐다.
수도 하노이에 있는 호안키엠 호수 또한 투쟁사의 일부분이다. 호안키엠은 환검, ‘칼을 돌려주다’라는 뜻이다. 역시 먼 옛날 외적이 침입해왔을 때 이 호수에서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와서 당시 왕에게 칼을 주며 물리치라고 했다고 한다. 왕은 그 보검으로 적을 격퇴했고, 전쟁이 끝난 뒤 거북이가 다시 나타나 칼을 돌려 받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호수 한가운데에 성웅 쩐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서 있다.
1964년 8월 4일 하롱베이가 있는 통킹 만에 미군이 함포사격을 개시하면서 베트남전쟁이 시작됐다. 전쟁 11년 동안 베트남은 2차세계대전 동안 퍼부은 양보다 많은 폭탄을 맞고도 결국 미국을 몰아냈다. 용의 전설과 거북이의 전설과 쩐 장군의 역사에 ‘천하무적’ 미국 격퇴라는 또 다른 신화가 보태졌다.
왜 이곳을 가느냐고 묻는다면 유네스코 지정 "세계 3대 자연 문화유산"이 있기 때문일꺼다. 섬 오른쪽 흰 마크가 유네스코 지정 심벌이다.
용이내려 왔다는 하룡(下龍)과 만(Bay)이 같이 붙여진 지명답도다!
병풍처럼 둘러 쌓인 하룡만 경치!
절경이다! 아래 배들은 횟감을 가두어 놓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 1000여개 섬 중 일부라도 감상해 보자!
연인끼리 입맛춤을 연상케 한다는 바위!
띠토섬을 지나 섬들이 많은 하롱베이로 이동 중....
이곳에서 선상 생활을 하는 배들도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자세로 한컷!
날씨가 흐려도 선상에 머물다 보면 또 다른 전경들이 연출된다
날씨가 약간 흐려 아쉽지만 하룡만 전체를 조망할수 있는 띠톱섬(Ti Top Isoland)에서...
띠톱섬(Ti Top Isoland)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찰칵!
자연보존이 아주 잘되어있는 천궁동굴 내부!
천궁동굴의 내부 모습
웅장한 내부 모습들!
천궁동굴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서...
하룡만 에서만 맛볼수 있다는 선상 다금바리회 와 모듬 해산물들....
또 다른 문화를 접해보면서 선상에서 전통주와 횟감으로....
같이 간 후덕하신 선배님들! 초록색 상의를 입으신분이 회갑기념으로 경주에서, 또 다른분은 안락동에서...
일행 중 가장 젊고 감초역할을 하신 선생님들!! 처음엔 미혼으로 보일 정도로 젊다하여 소녀시대로 칭하며 즐겁게 보냈다.
상어과에 속 하는 또 다른 횟감!
이곳에 가면 귀하다는 다금바리 회를 맛볼수 있다! 현지 어민에게 무게(킬로)를 달아 흥정하여 산다.
관광중간에 과일을 팔기위해 접근한다, 대개 몇 달러 정도만 주어도 맛볼수 있다.
하롱베이 가는 길에서....
활짝 핀 연꽃 모습!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는 불교나라인지라 국화가 연꽃이랍니다.
아름다운 바나나 꽃 봉우리 모습! 항상 무거워서 아래로 기운답니다!
한기둥 사원(Chua Mot Cot)! 1049년 연꽃모양을 본떠 1개의 기둥위에 불당을 얹어 지어진 우아한 자태의 사원모습!
한기둥 사원 스님들 모습!
베트남 박물관을 둘러본 후 찰칵!
다양한 그릇들!
베트남 영웅 호치민 유해가 안치된 곳, 베트남 역사의 흐름을 느낄수 있게 하는 통일궁은 호치민의 필수 관광지이다. 프랑스 통치시대에는 영사관으로 이용되다가, 남베트남이 정권을 잡고 있을 당시에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다.
중국의 천안문과 흡사한 "바딘광장"에서....
호암키엔 호수 (Hoan Kiem Lake), 한쪽 길이가 200m, 다른 한쪽 길이는 700m정도로 길쭉하게 늘어져 있고 호수 주위에는 나무들이 늘어져 있어 하노이의 낭만을 더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 북쪽으로는 시장이 형성돼 있으며 남쪽으로는 프랑스식 건물들이 들어찬 외교 공관가를 이룬다. 호수를 끼고 나있는 있는 길에는 시민들이 휴식을 즐기는 곳이다. 이 호수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전설을 지니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호암키엔 호수의 사원입구에서!
열대과일 두리안 흥정하는 하노이 재래시장 모습! 사람들의 표정은 항상 밝은듯 하다!!
과일 두리안 열매와 우리나라 꼬치구이를 판매하고 있는 재래시장 내부모습!
하롱베이 주변 가정집 모습
수상 인형극을 연출한 연주자 모습들
베트남 전통 수상인형극 장면
재래시장에서 전통음식 맛보기...
<토막 베트남 역사>
★ 베트남의 국명은 월남이란 한자어의 베트남어 발음으로, 월남이란 1802년 베트남 최후의 전통왕조인 阮朝(1802~1945)가 세워지면서 당시 청 나라의 승인하에 제정된 국호로부터 유래한다. 한때 월남의 별칭이었던 안남이란 말은 당이 월남에 설치한 안남도호부에서 연유한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와 많이 유사하여 일본과 더불어 중국문화권 내지는 한자문화권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 오랜 중국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또 고도의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중국에 동화되지 않는 월남인의 생명력은 마침내 서기 939년에 吳權(고구엔)에 의한 월남 최초의 독립왕조(吳朝:938~968)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 프랑스는 구완에 대한 군사원조의 대가로 베트남 남부지방에 대한 할양을 요구하여 점령하고 이를 '코친차이나'라 하여 직할 식민지화하였다.(1862) 그리고 뒤이어 1873~1885년 사이에는 베트남의 중부와 북부를 점령하여 이를 각각 '안남'(1884)과 '통킹'(1884)으로 명명하고 남부와는 달리 명목상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완조의 군주는 폐위되지 않고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 베트남의 현대사의 전환점에는 4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1930년 2월의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결성과 그 활동이고, 둘째는 1945년의 8월혁명의 성공과 노농국가의 수립, 셋째는 1954년의 7월의 반불항거의 승리로 국토의 절반을 해방시켜 사회주의로의 진전을 이룩한 것이며, 넷째는 1975년의 춘계 대공세와 봉기의 성공으로 반미 구국항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전국토의 해방 및 사회주의 개조와 건설로 전진하게 된 것이다.
胡志明(호치민)과 베트남
■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호치민은 일제봉기를 명령하고 8월 19일 하노이를 손에 넣는다. 9월 2일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 그는 정부주석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 중국과 거래 끝에 다시 베트남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해방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새로운 투쟁이 호치민의 어깨에 지워졌다. 그러나 이번에 선택한 무기는 총이 아니라 협상이었다.
♣ 1946년 3월 그는 타협적 온건주의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베트남을 완전 독립이 아닌 프랑스연합. 인도차이나연합의 일부로 남아 있도록 프랑스와 타협했다. 그러나 그는 인민들 앞에 나가 "싸움보다도 교섭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5년만 지나면 교섭에 의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데, 지금 어떻게 5만이나 10만 명의 사람 목숨을 희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의 고비는 1954년의 디벤비엔푸 전투였다. 호치민의 가장 충실한 동지이자 또 하나의 영웅인 보 위엔 지압이 이끄는 부대는 디엔비엔푸 프랑스군 요새 주변의 지하로 400km에이르는 참호와 갱도를 뚫어 요새를 함락시켰다.
◎ 그결과 북위 17도선을 잠정경계선으로 해 베트남을 남. 북으로 분할하는 제네바협정이 체결되었다. 프랑스군은 물러갔지만 '세계질서의 수호자' 미국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45년부터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한 미국은 1955년 고 딘 디엠이 월남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본격적으로 그를 지원했다.
1960년 12월 월남의 공산주의자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했고, 호치민은 베트콩을 지원했다. 극으로 치닫는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됐다. 한국.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등이 참전해 국제전의 양상도 띠었다.
♠ 끝을 알 수 없던 전쟁은 1970년 닉슨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방향으로 겨우 물줄기를 틀었고 1973년 월남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의 티우 정권은 독재와 탄압정치를 계속했고, 1975년 1월 북베트남의 전면공세와 미군의 철수 속에 급속히 몰락했다. 그러나 전쟁의 맨 선두에 서서 싸움은 이끌었던 호치민은 승리의 영광을 안지 못했다. 그는 1969년 9월 3일 심장병으로 숨졌다.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까닭에 그의 임종을 지켜보는 가족 하나 없이...
▣ 뒷날 베트남인들은 이 '살아있지 않은' 영웅에게 사이공시의 이름을 호치민시로 바꿔 존경과 애정을 표시했다.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하고 줄곧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했지만 호치민은 공산주의의 면모와 함께 민족주의자의 냄새를 짙게 풍겼다. 농민이 대부분인 현실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해 독특한 혁명의 길을 창조했다. 그에게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는 칭송은 결코 과분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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