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는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단어다. 『햄릿』작품에서 ‘미쳤다’는 말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폴로니어스는 거트루드와 클로디어스에게 친절하게 알려준다. “저라면 미쳤다고 하겠습니다. 진정한 광기의 뜻을 정의한다면 오로지 미쳤다고밖에 또 뭐라고 하겠습니까?” 폴로니어스가 내린 정의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진정한 광기’라는 말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광기란 일종의 가장假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광기란 연기演技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햄릿은 공적인 자리와 사석에서의 모습이 달랐다. 다시 말해 광기는 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멀쩡함은 방향이 다르다. 폴로니어스의 말처럼 미쳤다는 말은 미친 것처럼 연기를 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이 멀쩡하다는 말은 정신이 멀쩡한 것처럼 연기를 한다는 뜻이 될 수 없다. 비록 추상적인 단어라 해도 광기의 추상은 우리가 시각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하나의 종류이다. 하지만 멀쩡함은 우리 앞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생기를 띄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극적인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광기는 인습에서 벗어난 진실 말하기, 상대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와 모두 관련되어 있다. 미친 사람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멀쩡한 사람은 자신의 욕구에 관해 더 합리적이고, 더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인 것처럼 보인다. 미친 사람은 공동체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멀쩡한 사람은 복잡성이 어느 정도 결여된 것처럼 보이지만 공동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집단 속에서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살아간다. 멀쩡한 사람은 남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지만 미친 사람은 까다롭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쓰고 350년이 흐른 후 R. D. 레잉이 멀쩡함에 대해 살펴보고 1960년대 말에 정신의학 반대운동이 일어나 당시 행해지던 정신병 치료에 개입하려 한 것은 우리가 기준으로 삼은 멀쩡함 속에 인간의 정신을 빈곤하게 만들어 억압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었다. 정신의학 반대운동가들이 싸워 쟁취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인간의 정의定義였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우리를 비인간화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인간성’이란 사람이 완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광기는 현대적인 삶의 끔찍함에 대한 진정한 반응이었다.
우리가 소외 때문에 거짓 멀쩡함으로 빠져드는 출발점에서부터 모든 것이 모호해진다. 우리의 멀쩡함은 진정한 멀쩡함이 아니다. 그들의 광기는 진정한 광기가 아니다. 환자들의 광기는 우리가 그들에게 저지른 파괴, 그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파괴의 산물이다.
우리의 삶은 멀쩡함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에 달려 있다. 멀쩡함은 이제 유순함과 복종, 사회적이고 직업적인 ‘성공’을 의미하게 되었다. 하지만 멀쩡함이라는 말은 우리 삶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해주는 것으로부터 덜 소외된 ‘더 깊고’, ‘더 진정한’ 내면의 자아와 더 많이 결합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어야 한다. 레잉은 우리가 사회에 적응하려 하지 말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멀쩡함을 뜻하는 영어 단어 ‘sanity’는 1602년 『햄릿』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의미, 즉 ‘정신의 건전함, 정신적 건강’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으며, 19세기 초에 이른바 정신병과 범죄 성향의 관련성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자리를 잡았다. 이 단어의 정의에 따르면 조화로운 조직, 모든 것이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있는 상태가 바로 멀쩡함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멀쩡함의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예외적으로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건강… 건전함… 멀쩡한 상태, 즉 정신의 건강함, 정신 건강… (물질의) 탄탄함.” 이 단어 설명에서 우리에게 실마리를 주는 것은 아마도 ‘건강함 soundness’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멀쩡함과 같은 시기에 나와 19세기의 대표적인 단어가 된 soundness는 요즘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처럼 얽히고 설킨 다양한 정의에 따르면 멀쩡함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직함 reliability이다. 멀쩡함이 지적이고 조리 있는 사람, 공통의 가치관과 정통성과 굳건한 기초가 있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임은 분명하다.
멀쩡함이 낱말로서 아무리 모호하다 해도, 우리가 아무리 무심하게 그 말을 사용한다 해도, 그 낱말의 존재 자체에 별로 확신이 없다 해도, 멀쩡함에는 커다란 테마가 실려 있다. 이 단어에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자신에게 품는 희망이 실려 있다.
엄격한 다윈주의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우리가 삶의 희망과 멀쩡함을 연계시킨다고, 멀쩡함은 우리가 삶의 희망과 연계시키는 것 속에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우리의 자아 가운데 멀쩡한 부분은 우리에게 올바른 희망을 준다. 다시 말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희망 말이다.
현대인들은 멀쩡함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데 끝없이 집착하고 있다. 멀쩡함은 환상지幻想肢나 인공 보철물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멀쩡함이라는 개념이 19세기에 얻기 시작해 간편하고 유용한 개념이라는 자리를 확보한 후 우리는 그 개념을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개념을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분석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멀쩡함이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미친 아이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 The Praise of Folly」(1590)에서 이렇게 썼다. “정신이 신체기관을 적절히 통제하기만 하면 멀쩡하다고들 한다”. 거의 500년 전에 기독교를 옹호한 글 속의 한 구절이기는 해도 이 문장에는 멀쩡함에 관한 우리 현대인들의 생각이 대략 요약되어 있다. 첫째, 멀쩡함이란 몸의 상태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는 것이다. 둘째, 몸을 통제하는 것이 멀쩡한 정신의 기능이며 따라서 정신의 지휘를 받지 않는 몸은 걷잡을 수 없거나 금지된 행동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셋째, 몸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일 뿐 아니라 그 몸을 적절히 통제하는 것도 부적절하게 통제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멀쩡한 정신이 무엇보다 잘 아는 것은 바로 적절함이다. 마지막으로 시간이라는 요소가 관련되어 있다. 멀쩡함을 위해서는 우선 정신이 있어야 하고, 그 정신이 몸을 통제해야 한다. 멀쩡함이 영구적인 상태가 아니라 불확실한 상태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또한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이 몸을 통제할 수 있는지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자신의 몸을 통제하는 능력이 아주 가끔씩만 발휘되는 생물 가운데 가장 친숙한 존재는 아기와 어린이다. 병자, 노인, 범죄자도 마찬가지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타고난 광기라고 할 만한 어떤 것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리고 광기를 관리하는 멀쩡함을 터득해야 한다. 1945년 「원시적 정서 발달Primitive Emotional Development」라는 논문을 쓴 위니콧은 아이들이 가장 좋은 의미의 광인이라고 했다. 반면 어른은 가장 나쁜 의미의 멀쩡한 사람이다. 아이들은 멀쩡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아기들은 자신의 욕망을 신봉하지 않는다. 그들은 욕망 자체이다. 아이가 순수함의 상징 자리에서 물러나면, 광기의 상징이 된다. 이런 최초의 광기가 없다면, 유년 시절과 이어진 이 감정적 생명줄을 유지할 수 없다면, 인생이 헛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우리는 멀쩡한 아이가 계속 욕구를 품기를 바란다. 아이의 생존이 거기에 달려 있으므로.
만약 유년기를 통해 욕망(욕망에 대처하며 살아나가는 것, 즉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협조하며 살아가는 것)의 준엄함과 기쁨을 알게 되는 것이라면 사춘기에 시작되는 성은 우리 삶을 조직하는 이 절박한 욕구의 새로운 물결이다.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광기와 더 가까운 것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장에서 살펴볼 멀쩡한 섹스가 그 자체로서 모순적인 말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미치지 않은 섹스란 무엇인가
멀쩡함이라는 단어는 보기 드물게 강한 침착함, 욕구로부터의 독립성을 암시하는 경향이 있다. 유대교-기독교 문화권에서 멀쩡한 사람은 죄라고 불리는 것의 대척점을 차지할 것이다. 멀쩡함은 사람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어 하느님에게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육체적 욕망과 힘을 겨룰 것이다. 성은 모든 욕구 가운데 가장 당혹스럽다. 사춘기는 변화와 위반의 시기이다. 성적인 욕망은 가족을 벗어나는 길이다. 청소년은 이제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것을 부모형제에게서 얻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춘기 청소년은 욕망의 결과에 온전히 책임을 지기 시작한다. 결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욕망의 결과 가운데 하나이다. 규칙을 지키는 것이 멀쩡한 행동이라면, 착하게 구는 사람이 이미 익숙해진 편안함을 계속 즐길 수 있다면 섹스는 일종의 광기가 된다. 사춘기 청소년이 발을 들여놓은 딜레마가 이것이다. 사춘기 청소년은 성적인 욕망을 지닌 멀쩡한 어른이 되는 훈련, 격려, 교육, 조작을 받는 중이다. 성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도권을 잡는 사춘기에 어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이의 광기, 임신, 자살이다. 만약 사춘기라는 대혼란 속에서 이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멀쩡함이 승리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니체의 ‘초인’처럼 청소년은 성인기라는 불안한 혁신을 끄집어내기 위해 미쳐야 할 필요가 있으며 실제로 광기를 획득한다. 사람들은 사춘기의 안내자인 성으로부터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춘기 자체로부터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다. 사춘기는 모든 사람이 지각 있는 광기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시기이다. 멀쩡함은 이 경험을 이기고 살아남은 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멀쩡함은 언제나 나중에 찾아온다.
멀쩡한 섹스가 전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파괴해버리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도 그와 동시에 소중한 신뢰와 우리의 성이 불화를 빚을 가능성이 항상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멀쩡한 섹스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모순이다. ‘멀쩡함’이라는 말과 더불어 우리는 한계에 대한 점잖은 인식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는 다들 동의하면서도 정식으로 합의하지는 않은 암묵적인 지식 같은 것이다. 섹스 할 때 우리는 점잖지 못하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결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아는 자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멀쩡함은 우리가 재앙처럼 끔찍한 변화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사용하는 친숙함을 설명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멀쩡함은 모든 것을 똑같이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멀쩡함은 새로움의 적이다.
광기를 선택하는 사람들
현대 정신의학이 진단한 질병 세 가지가 있다. 어린이의 자폐증, 정신분열증, 우울증이 그것이다. 이 질병들이 분명히 서로 다르고, 진단과 치료에 관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도, 건강하고 멀쩡한 현대인의 모습에 관해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자폐증이나 우울증, 분열증이나 도착증 진단을 받는 것은 정상적이고 멀쩡한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자질들이 부족한 사람으로 비친다는 뜻이다. 의사소통 능력, 활기, 따스함, 인간적인 성격 등이 바로 그런 자질들이다.
자폐아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몸이 곧 세상이지만 그 몸은 쾌락의 원천도 영양분의 원천도 아니다. 아이의 관점에서 보면 분리해서 바라볼 물체나 사람이 없다는 점이 문제다. 환상 속에서든 현실 속에서든 아이에게 자기 몸 외의 다른 세상은 존재하지 않기에 아이가 있을 곳이 없다. 자폐아는 참을 수 없는 고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성장을 희생시켜야 한다. 아이는 강박적으로 세세한 점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간신히 자신을 추스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아이들은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아이가 처음부터 사랑할 능력이 없거나 그런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신분열증의 경우에도 레슬리 파버Leslie Farber는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는 절망이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한다”고 『의지의 길The Ways of the Will』(1966)에 썼다. 즉 의미 있거나 유용한 의사소통이 환자와의 사이에서 가능할 것 같지 않아 절망을 느낀다는 뜻이다. 정신분열증 환자에게 부족한 것, 즉 경계와 실체가 있는 몸과 시간과 공간의 지속성에 대한 감각, 자신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행동의 주체라는 느낌은 우리에게 멀쩡함에 관한 지침을 제공해준다. 멀쩡함은 사람들이 어떤 상태에 놓이든,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하든 대처할 수 있는 자원, 즉 재능, 참을성, 회복력 등을 갖고 있다고 우리를 안심시킨다.
그러면 우울증은 어떤가? 우울증이라는 삶 속의 죽음, 때로 사람들을 완전히 지배해버리는 감정의 빈곤과 기진맥진 상태는 우리의 에너지원이 얼마나 애매한지 일깨워주는 무서운 표지이다. 우울증의 원인과 치료법에 관한 화학적 설명과 심리학적 설명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삶에 생기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맥락에서, 사람이 어떤 일을 겪으면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에 빠져 삶이 자신에게 주는 비극과 좌절감과 장애 앞에서 패배감을 느끼게 되는가?
멀쩡한 사람은 인생의 고민거리가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거나 그런 고민은 결코 겪지 않는 사람이다. 우울증 환자는 욕망의 결여, 의지력만으로는 쫓아버릴 수 없는 무기력감에 휘둘리는 듯하다. 죽고 싶어 하지는 않더라도 살고 싶은 이유를 찾아내지도 못한다. 그런 이유에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우울증에 관한 화학적 설명에 따르면, 기분이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특정한 화학물질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런 화학물질이 있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우울증은 곧 화학적 불균형을 의미한다. 이보다 기계적인 심리학적 설명에 따르면, 우울증은 기능 부전이다.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앤드루 솔로몬Andrew Solomon은 최근 발표한 회고록 『한낮의 악마The Noonday Demon』에서 “우울증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생기”라고 썼다. 생기가 없다면 문자 그대로 삶도 없다. 생기가 없다면 삶이 아예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울증에서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멀쩡한 자아, 적절한 수준의 이기심에 대한 감각을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적절한 수준의 이기심이란 살고자 하는 욕구를 지탱해주는 자아에 대한 감정을 말한다. 멀쩡함은 정확하게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 또는 자신의 무엇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사랑할 자아가 있다는 뜻이다. 멀쩡함은 대개 자아의 존재를 암시한다. 멀쩡함은 자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광기가 멀쩡한 자아에 맞서서 반反자아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질병으로서 우울증은 활기, 열정, 적극성이 멀쩡하고 바람직한 자아의 특징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멀쩡한 사람들은 무감각하지도 무기력하지도 않다. 그들에게는 열정이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멀쩡한 자아가 어떤 상황과 맞닥뜨리든 강한 힘을 발휘할 거라고 가정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예를 들어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 오히려 멀쩡한 행동, 즉 현실적인 행동이 되는 상황이 존재한다. 기근이나 고립상황, 자신에게 공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우리는 어떤 인생을 원하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의문을 감안해 멀쩡함의 가치를 매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멀쩡함을 통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들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하는 문제뿐 아니라 좋은 것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어떻게 해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도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제는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면 멀쩡함의 개념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멀쩡함과 광기에 대한 보고되지 않은 이야기 중에서 “돈을 향한 광기” 편에서 발췌 요약, 애덤 필립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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