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환율전쟁의 시대다
일본 경제는 다른 나라들,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과의 환율전쟁에서 이겼을 때 초장기 번영을 누렸다. 한때는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을 훌쩍 넘어선 적도 있다. 1980년대까지는 환율정책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미국과의 환율전쟁은 물론이고 환율을 상대로 국내에서 치른 전쟁에서조차 패배했고, 그 결과 초장기 경기침체를 겪어야 했다. 잠시 경기가 살아나는 것 같다가 다시 고꾸라지곤 했다. 지금도 일본은 선진국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환율정책이 결정적으로 실패한 뒤에 ‘단군 이래 최대의 난리’였던 외환위기를 겪었고, 그 여파로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역사적으로 환율정책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했다.
환율변동을 결정하는 자본수지와 경상수지
외환의 수요가 더 많아지면 환율은 오르고, 외환의 공급이 더 많아지면 환율은 떨어진다. 그렇다면 외환의 수요와 공급은 무엇이 결정할까? 환율변동을 일으키는 가장 직접적인 변수는 국제수지다. 국제수지가 적자이면, 외환의 공급이 수요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줄어들어 환율은 상승한다. 반면에 국제수지가 흑자이면, 외환의 공급이 수요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증가하여 환율은 하락한다. 그런데 국제수지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경상수지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수지이다. 이 둘을 합하여 종합수지라고 부른다.
경상수지는 상품 및 서비스의 교역 격차를 뜻한다. 우리나라 상품과 서비스의 수출이 수입보다 많아지면 경상수지는 흑자를 기록하고, 반대로 수입이 수출보다 많아지면 경상수지는 적자를 기록한다. 그리고 자본수지는 자본의 유출과 유입의 격차를 뜻한다. 국내자본이 해외로 더 많이 유출되면 자본수지는 적자를 기록하고, 해외자본의 유입이 더 많아지면 자본수지는 흑자를 기록한다. 환율의 변동은 이 두 가지 국제수지가 상호작용을 하여 결정한다. 경상수지가 적자더라도, 자본수지 흑자가 더 크다면 종합수지는 흑자를 기록하는데, 이 경우에는 외환의 공급이 증가하여 환율이 하락압력을 받는다. 반대로 경상수지가 흑자더라도, 자본수지 적자가 더 크다면 종합수지는 적자를 기록하는데, 이 경우에는 외환의 공급이 줄어들어 환율이 상승압력을 받는다.
자본수지는 성장률, 이자율, 환차익 등이 결정한다
자본수지는 무엇이 결정할까? 당연히 자본의 수익률이 결정한다. 우리나라의 투자수익률이 다른 나라보다 더 높다면 자본수지는 흑자를 기록한다. 돈이란 더 많은 이익을 찾아서 떠돌기 때문이다. 그럼 투자수익률은 무엇이 결정할까? 좀 복잡한 문제지만 최대한 간단하게 밝히자면 성장률, 환차익, 금리 등 크게 세 가지 변수가 결정한다. 그 밖에 외채도입과 같은 정책적 변수와 정치적 혹은 경제적 위기의식이 부르는 자본의 해외탈출 등 다른 변수들도 자본수지에 영향을 끼치지만 경제적으로는 이 세 가지 변수의 영향력이 가장 크고 결정적이다. 지금부터 이 세 변수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성장률이 높으면 수익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장률은 부가가치의 증가율을 의미하고, 부가가치는 소득을 의미하며 소득의 증가는 이익의 증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성장률이 높아져서 경기가 호조를 보이면 대부분의 사업이 이익을 남긴다. 따라서 성장률이 상대적으로 높으면 수익률이 높고, 수익률이 높으면 외국자본은 당연히 더 많이 유입된다. 이머징 마켓이라고 불리는 신흥공업국들에 있어서 성장률이 장기간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할 때 외국인 투자가 대체적으로 급증하곤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 환율이 비교적 오랜 기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떨어지면 환차익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런 경우에는 외국자본이 환차익을 기대하고 국내에 유입됨으로써 자본수지가 흑자를 기록한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보자. 환율이 1,500원일 때 1억 달러를 외국에서 들여오면 우리 돈으로 1,500억 원을 바꿀 수 있는데 환율이 1,000원으로 떨어지면 1,000억 원으로 들여온 돈을 모두 갚을 수 있다. 원금을 갚거나 회수하고도 500억 원의 이익이 추가로 발생하는 셈이다. 이것을 환차익이라고 부른다. 이런 환차익이 기대된다면 누구나 외국자본을 빌려오려 할 것이고 외국인도 이런 환차익을 노리고 국내에 투자하려 할 것이다.
셋째, 이자율이 상대적으로 높을 때에도 자본수지는 흑자를 기록한다. 이자율이 높으면 자본의 수익률이 높아지고 이에 따라 외국자본이 국내로 유입되기 때문이다. 경상수지가 적자를 기록하는 경우에 이자율이 평균적으로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경상수지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는 자본수지 흑자를 늘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이자율을 높임으로써 외국자본을 끌어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 밖에 경상수지가 대규모 적자일 때는 정책적으로 더 큰 규모의 외채를 도입함으로써 자본수지가 흑자를 기록하기도 한다. 경상수지가 대규모 적자라면 그만큼의 외환이 외국으로 이탈한다는 의미이므로 외채를 들여오지 않으면 외환보유고가 고갈될 수도 있기 때문에 외채를 정책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정치가 불안하거나 경제가 파국적인 위기로 치달을 때는 국내자본이 해외로 탈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역시 자본수지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국제경쟁력과 성장잠재력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이제 정리를 해보자. 환율의 변동은 국제수지가 결정하고, 국제수지는 자본수지와 경상수지로 구성된다. 그중 자본수지는 투자의 수익률, 즉 성장잠재력이 결정하고, 경상수지는 국제경쟁력이 결정한다. 그런데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력은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성장잠재력, 즉 잠재성장률은 지속 가능한 최고의 성장률을 뜻한다. 다시 말해, 성장의 지속을 불가능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가운데 기록한 최고의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성장의 지속이 불가능해질까? 일반적으로는 물가가 불안해지면 성장은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세계 경제학계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미국에만 해당하는 정의다. 다른 나라에서는 더 중요한 변수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국제수지의 약화다.
미국의 달러는 국제적인 기축통화이므로 국제수지 악화가 경제성장을 제약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오히려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는 세계경제에 통화를 공급함으로써 국제무역을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달러의 공급을 증가시키더라도 그 가치가 크게 하락하지 않거나 오히려 상승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국제무역에 필요한 달러의 수요도 함께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사정이 다르다. 국제수지 적자가 지속되면 경제성장의 지속은 불가능해지고 만다.
물론 경상수지가 적자일 때에는 자본수지 흑자, 즉 외채 도입을 통해서 그것을 보전할 수 있지만 이것은 지속 가능한 일이 아니다. 외채는 무한정 늘어날 수 없으며 언젠가는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큰 경상수지 적자는 외환보유고를 고갈시키거나 환율을 크게 상승시킨다. 만약 외환보유고가 고갈되면 우리나라가 1997년 말에 겪은 것처럼 극심한 외환위기를 감당해야 한다.
일본 경제는 외환위기를 벗어난 뒤 1955년부터는 본격적인 상승기에 진입하여 장기간의 고도성장을 이루어냈다. 1956년부터 1970년까지의 연평균 성장률이 9.6%에 이를 정도로 눈부신 호황을 무려 16년 동안이나 누렸다. 그만큼 일본의 환율정책은 성공적이었다. 특히 물가를 안정시킨 것이 국제경쟁력을 향상시켰고 국제수지가 악화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경제를 성장시킴으로써 경기의 상승기간을 장기화시킨 것이 초장기 호황의 열쇠였다. 눈부신 경제발전의 결과로 1960년대 중반에 이미 일부 산업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에 달했다. 예를 들어 조선산업, 트랜지스터 라디오, 모터사이클, 카메라 등의 생산은 1964년에 이미 세계 1위에 올라섰고 1968년 일본의 GNP는 서독을 제치고 세계 2위로 올라섰고 1인당 국민소득도 1,100달러로 세계 19위가 됐다.
때마침 일본의 엔화가치는 미국이 금태환 정지 선언을 계기로 점진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1970년 말 달러당 358엔이던 환율이 1973년 말에는 280엔까지 떨어졌고, 이후 1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1975년에는 305엔까지 상승했다가 이후 다시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978년 말에는 195엔까지 떨어졌다.
<“환율전쟁“에서 일부 요약, 최용식 지음, 새빛에듀넷>
일본 경제의 20년 침체, 왜 일어났나
국제수지 흑자가 일본 초장기 침체의 단초다
일본은 과도한 국제수지 흑자로 인해 엔화가 심각한 평가절상 압력을 받게 되었다. 1970년까지 달러당 360엔에 고정되어 있던 엔 환율은 1971년 말에는 314엔으로 떨어졌고 이후에도 계속 하락하여 1973년에는 280엔까지 떨어졌다. 이에 따라 일본 수출은 가격경쟁력이 약화되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엔화의 평가절상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1972년부터는 달러의 해외유출을 유도했다.
일본의 외환 해외유출 규모는 매년 늘어났고 이에 따라 엔 환율도 상승으로 돌아서면서 1975년에는 305엔을 기록했다. 엔 환율이 이렇게 급상승하자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는 1976년부터 다시 눈덩이처럼 커졌다. 국제수지가 이처럼 대규모 흑자를 지속하자 엔 환율도 당연히 떨어지기 시작하여 1978년에는 195엔까지 하락했다. 일본 정부는 엔 환율의 하락추세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기 위해 달러의 해외유출을 더욱 강력하게 유도했다. 이것은 그만큼 국내소득이 해외로 유출되었다는 의미였고, 당연히 국내경기는 내수부족에 시달리며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성장률 역시 크게 떨어졌다.
일본 경제는 1991년 경기하강을 시작한 이후 20년이 가깝도록 오랜 세월 동안 경기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때 세계인에게 ‘일본을 배우자’는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일본 경제가 왜 이렇게 처절하게 몰락했을까? 우선은 1980년대 말에 불어닥쳤던 주식과 부동산투자의 광기가 거품을 일으켰고 1990년 그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발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거품붕괴는 경기를 하강시킨 원인일 뿐 경기침체를 장기화시킨 원인이 아니다. 경제위기가 1990년대 초반 이래 20년 가까이 지속되었지만 일본 경제의 산업경쟁력은 여전히 세계 최강이다.
경제가 침체를 거듭했다면 새로운 정책을 모색하는 것이 정상이고, 그중 어느 하나는 성공을 거두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왜 성공할 정책은 찾아내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단 하나, 경제발전에 바람직하다고 굳게 믿었던 고정관념이 사실은 경제후퇴를 불러왔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까? 국가경제는 크게 실물 부문과 금융 부문으로 나뉘는데, 실물 부문이 튼튼함에도 불구하고 국가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 원인은 당연히 금융 부문에서 찾아야 한다. 금융 부문 중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대규모 국제수지 흑자였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일본의 무역흑자 중 일부는 외환보유고로 쌓였고, 나머지는 해외자산으로 쌓였다.
외환보유고는 통화금융정책의 경직성을 부른 것 이외에는 경제적으로 큰 부작용이나 후유증을 남기지 않았다.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 것은 해외자산의 급증이었다. 다시 말해, 해외자산의 급증이 경기침체의 장기화를 초래한 것이다. 1993년부터 일본의 해외투자가 급증하면서 해외자산도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 31조 8,000억 엔이었던 해외자산 규모가 2001년 말에는 127조 3,000억 엔으로 크게 증가했다. 문제의 핵심은 이런 해외자산이 반드시 수익을 올려야 한다는 데 있었다.
일본의 해외투자 규모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불과 4년 사이에 무려 3,000억 달러에 이른다. 이런 대규모 해외투자는 1990년대 초반부터 미국 등 국제 경기가 후퇴로 돌아서자, 큰 손실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일본의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경영수지가 심각하게 악화되었으며 매입했던 각종 부동산과 기업 및 영화사 등을 모두 다시 매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국내자본의 해외투자는 국내소득의 해외유출을 의미한다. <“환율전쟁“에서 일부 요약, 최용식 지음, 새빛에듀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