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사후에 유품을 정리하다가 나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품에 간직하고 있던 쪽지를 발견했다. 거기엔 크리스티안 4세의 임종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때 비로소 나는 평생 강하고 반듯하게 살아오신 아버지도 죽음을 몹시 두려워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죽음의 공포가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공포는 곳곳에서 불시에 나를 엄습했다. 한번은 나폴리에서 전차를 타고 가던 중이었는데, 차에 앉아 있던 소녀가 갑자기 죽었다. 어머니는 딸을 살려보겠노라고 악을 쓰며, 헛되이 상비약도 먹여보고 인형 같은 소녀의 몸을 흔들고 얼굴을 내리치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그 전에, 이를테면 내가 키우던 개가 병으로 죽었을 때도 나는 공포를 느꼈다. 개는 무언가 낯선 것이 다가온 것을 알았는지 나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던지다가 서운해 하면서 죽어갔다.
혼자 있을 때 나는 공포를 느꼈다. 밤이면 쓸쓸히 홀로 죽어갈 것을 상상하면서 침대에 앉아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면 나는 필사적으로, ‘죽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없지, 난 아직 살아있는 거야.’ 라고 중얼거리며 위로를 삼았다. 때로는 혹시나 창밖에는 희망이 있을까 하여 창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똑같이 차가운 밤이 끝없이 막막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얼마 전부터 그러한 공포도 우리에게 속한 우리의 힘이라고 믿게 되었다. 아직 감당할 수 없기에 낯설고 두려울 뿐, 우리 내부의 가장 중요한 힘이라는 것을.
오늘 나는 국립도서관에 앉아 더없이 조용하고 예의바른 분위기 속에서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있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내가 얼마나 비참한 가난뱅이인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아직 내 셔츠 깃은 더럽혀지지 않았고 내의도 깨끗하다. 하지만 거리에 나가면 내 실체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운명이 내뱉은 타액과 같은 인생의 낙오자들, 걸인들, 행상 노파, 그들은 내가 자기네와 같은 부류라는 것을 간파하고 은밀한 신호를 보낸다. 나는 두렵다.
결국 나도 병에 걸리고 말았다. 병원 뜰에는 가난과 병에 찌든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 차례가 오길 기다리며 이리저리 거닐었다. 그들 사이에 끼여 앉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시간이나 기다려 담당의사가 나왔기에 곧 내 차례이겠거니 했지만, 그로부터 한 시간을 더 기다린 후에야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의사는 빨리 빨리 간결하게 말하라고 재촉했다. 나는 증상을 되도록 잘 말하려고 애를 썼지만 의사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의사는 나에게 다시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복도에 나오니 약 냄새, 사람 냄새로 공기는 더 탁했다. 창문을 좀 열어달라고 요청했지만, 간호사는 창을 여는 건 금지 사항이라고 하였고, 복도에서 돌아다니는 것도 금지된 일이니 꼼짝말고 앉아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나는 빈 자리로 가 앉았다. 내 양옆에는 눈이 튀어나오고 잇몸이 썩고 있는 소녀와 시체처럼 꼼짝 않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들 사이에 끼여 앉아 있으니 묘하게도 마치 내가 항상 머물러야 할 그 자리에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마음속에서 무언가 엄청난 것이 밀려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공포였다.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병원을 뛰쳐나왔다. <“말테의 수기”일부 요약 발췌,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전영애 옮김, 서울대학교 출판부>
<장구채>
병과 죽음의 도시
사람들은 살겠다고 이 도시로 모여드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죽으러 오는 것 같다.
나는 거리로 나갔다. 한 남자가 길을 가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만삭이 된 임산부가 벽을 따라 힘겹게 걷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병원, 병원들. 늦여름 거리에서 풍기는 온갖 냄새들 속에 불안이 깃들여 있다. 유모차에 실린 어린아이는 불안으로 가득한 도시의 공기를 마시며 잔다.
도시는 휴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밤새도록 끊임없이 들려오는 전차 소리,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때문에 창문을 열어놓고는 도저히 잠들 수 없다. 그러나 때로는 소음보다 더 무서운 정적의 순간도 있다. 도시의 무지막지한 소음 뒤에는 무서운 결말 직전의 숨막힐 듯한 끔찍한 고요가 가라앉아 있다.
파리에 온지 삼 주 째. 나는 이미 나 자신도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변하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 변했으니 나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편지를 쓸 수 없다. 이제부터 혼자서 삶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병원들은 나에게 두려움을 자극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디외 병원에는 지금 559개의 침대가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와 똑같은 방식으로 숨을 거둔다. 마치 공장에서 대량으로 제품을 찍어내듯 병원이 죽음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온 삶의 결실로서 고유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오늘날 불가능해졌다.
죽음이 고유함을 잃었다면, 그것은 삶이 고유함을 잃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예전에는 열매가 씨를 갖고 있듯이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을 갖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작은 죽음을, 어른은 큰 죽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특유한 침착함과 조용한 품위를 지닐 수 있었다.
나는 궁정 시종이셨던 할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한다. 울스고르의 영지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너무도 느리게 죽어가셨다. 삶을 끈질게 붙잡으려 하셨다. 할아버지가 평생 강하게 사셨던 것처럼,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수종(水腫,살갗에 림프액이나 장액이 괴어 붓는 병)은 엄청난 위력으로 할아버지를 괴롭혔다. 밤낮 고통으로 신음하는 할아버지는 어느 한 곳에도 머물지 못하고 하인들을 시켜 온 집안을 계속 옮겨다니게 했다. 그래서 가족과 하인들, 심지어 짐승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달리며 고통의 나날을 겪어야 했다.
할아버지다운 죽음이었다. 할아버지가 평생 다 보여주지 못했던 교만과 의지, 지배력의 여분이 모두 터져 나와서 그 막바지에 폭군처럼 군림했던 것이다.
나는 두려움에 대처하기로 결심했다. 유일한 방법은 글을 쓰는 것뿐이다. 나는 아침부터 시작해서 하루 종일, 밤에도 자지 않고 글을 쓰기로 했다. 보는 법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돌이켜 본다. 스물 여덟 해를 사는 동안 내가 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쓴 거라고는 유치한 글 나부랭이에다 어설픈 희곡뿐이다. 시도 썼다. 그러나 젊어서 쓰는 시는 훌륭한 시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시는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와 사람들, 온갖 물건들을 보아야 한다. 또 보는 것에 그치는 것 아니라, 숱한 경험과 추억들이 내 안에서 피가 되고 시선이 되고 표정이 되고, 내 자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벌이 꿀을 모으듯 여러 해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 깊이와 향기가 모였을 때 어느 기적적인 순간에 비로소 한 행의 시구가 떠오르게 될 것이다.
<“말테의 수기”일부 요약 발췌,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전영애 옮김, 서울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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