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로네, 나는 그대의 사랑을 잘 기억합니다. 학창시절 그대와 함께 했던 나날은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울스고르의 서재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었던 것 기억하나요? 그대는 내게 올바로 독서하는 법도 가르쳐주었지요. 무엇보다도 그대는 내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 자연의 힘처럼 모든 것을 성장시키는 사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아니,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삼 년쯤 전 베니스에 갔을 때, 어느 사교모임에서 한 소녀가 노래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 그대를 붙잡지 않았기에 나 그대를 굳게 안을 수 있네...” 그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그대의 조건 없는 사랑을 또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벨로네는 고귀한 사랑의 능력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신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벨로네는 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신의 사랑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그리스도마저 기피했던 것이 아닐까? 구체적인 사람의 형상을 가진 그리스도가 신에게 이르고자 노력한 사람들에게 장애물이 되어 그들을 사랑 받는 존재로 전락시켰기 때문에 피했던 것일까?
하지만 궁극적으로 신은 사랑의 방향일 뿐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의 사랑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상대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 소유하지 않는 사랑만이 결국 신에게 이르는 길이므로.
소유하지 않는 사랑
여자들은 수백 년간 사랑의 작업을 혼자 맡아왔다. 사랑을 한낱 유희로만 여긴 남자들은 산만함과 무신경으로 사랑을 방해했을 뿐, 밤낮 쉬지 않고 사랑하여 사랑을 깊게 만든 것은 여자들이었다. 사랑으로 여자들은 강해져서 남자들을 능가해버렸다. 그런데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 지금, 이제는 남자들이 변해야 할 차례가 아닐까? 어머니와 레이스 천들을 펼쳐보았던 때가 기억난다. 섬세한 레이스의 아름다움에 우리는 정신없이 매혹되었다. 그것을 짠 이는 물론 여자들이었다. 어머니는 한참 경탄하다가 문득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것을 짜야 한다면 어떨까?...” 그때 어머니는 여자들이 그렇게 정성껏 레이스를 짰던 것처럼 삶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짜 나가야 할 우리의 사명을 뜻하셨던 것이 아닐까?
사랑받는 사람의 삶은 그릇되고 위험하다. 아름답게 장식되었지만 속이 텅 빈 보석함을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안타까움처럼 사랑받는 사람의 미래에 남는 것은 허망함뿐이다. ‘사랑받음’은 불타 없어지는 것이요, ‘사랑함’은 고갈되지 않는 기름으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사랑받음’은 덧없이 사라짐이요, ‘사랑함’은 영속이다.
<“말테의 수기”일부 요약 발췌,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전영애 옮김, 서울대학교 출판부>
<꽃향유>
밀원식물이며 어린순은 식용, 감기 오열 발열 두통에 사용